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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지 않고 춤추지 않는 세대 (눅 7: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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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고 춤추지 않는 세대 (눅 7:29-35)


'세대'라는 말은 원래 연령의 차이 혹은 시대적인 간격으로 인한 구분을 나타내기 위해 썼던 말로서 보통 30년을 한 세대로 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자주 쓰이기 시작했던 초기 단계에는 그저 '신세대'와 '구세대'로만 나뉘어졌습니다.
즉 이미 인생 살만큼 다 산 장년들은 '구세대', 그리고 청소년부터 청년까지를 '신세대'라고 구분하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점점 더 급변하고 세분화되어 가면서 '쌍둥이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하는 요즘에 와서는 이 '세대'라는 말이 단지 연령의 차이뿐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생활모습 등에서 어떤 특징과 개성을 나타내는 그룹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저 '신세대'라고만 했던 것이, 이제는 무슨 '엑스 세대', '엔 세대', '미니 세대', '체크 세대' 등등 저 같은 '구세대' 사람은 그 뜻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온갖 이름의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대들 사이에는 시대적 차이를 훨씬 넘어서서 그 인생 가치관과 생활양식 자체부터가 크게 다르고 피차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사람"이라고 탄식하며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와 같은 기분이셨는데, 그것을 두고 본문 29절부터 31절에 기록하기를 "29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이룬 사역을 두고 칭찬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전한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였던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반면에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지금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주어진 기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교만한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바로 그런 후자의 무리들을 보시면서 우리 예수님의 입에서는 '도대체 이런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이런 답답한 인생들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장탄식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대"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 중에 연령별로 어떤 한 그룹을 잘라내어서 지칭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예수님 이후 시대의 사람들과 대조되는 '동시대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의 사람'이란 그 생각하는 것이나 생활로 나타나는 점에 있어서 무언가가 아주 특이하게 돋보이는 어떤 특수한 그룹의 사람들을 가리키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심정에 너무나도 공감할 줄 모르는, 영적으로 지극히 이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을 살고 있었으면서도, 실제로는 도저히 '예수님과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 불릴 수 없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무리를 가리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대의 사람'이라고 부르시면서 한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특수한 세대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예수 세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영적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그 세대란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회개의 촉구에 대하여 애통으로 반응할 줄 모르는 자'들이 곧 교만한 종말세대입니다.

본문 32절을 하반절부터 일단 먼저 보면 "32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너무나도 무감각한 그 이상한 세대를 두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예로 들어 "비유"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장례식 놀이'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한쪽 그룹의 아이들이 곡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데도 다른 한쪽 그룹의 아이들은 그것을 함께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다 같이 재미있게 놀자고 장례식 비슷하게 준비를 해 놓고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시작한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보였던 냉랭한 반응을 비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두고 '애곡'하라고, 즉 '회개'하라고 외친 선지자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도 '울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33절 말씀에 "33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라고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대로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실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사역의 일환으로써 세례 요한 자신 역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즉 철저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에 대하여 '그 세대의 사람'들의 반응이란 마치 동무들이 애곡하며 장례식 놀이를 시작해도 함께 가슴을 치며 호응하지 않는 무심한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놀이를 시작한 친구들을 보고 "왜 그런 괴상한 놀이를 하느냐?"라고 면박을 주는 아이들처럼, '그 세대의 사람'들 또한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라고 즉 '미쳤다'고 비난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이런 '무반응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에 예언되어 있는 예수님 재림을 선포하면서 '죄 회개'를 외치는 설교자들의 외침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저 "평안하십시오, 복 받으십시오, 만사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런 말들은 귀에 쏙쏙 들어오지만, "당신이나 저나 다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니 오직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그야말로 '귀가 가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 "왜 저 목사는 현대인들의 마음에 부담이 되는 설교를 하지? 한 주일 내내 고된 인생 사느라고 지쳐 있다가 모처럼 주일에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좀 위로가 되고 기분 좋아질 설교를 해 주지 않고..."하면서 혀를 끌끌 찹니다.
실로 오늘날 역시 죄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자의 외침을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세대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세대를 향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4절의 말씀에 보면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회개하라'는 촉구를 그렇게도 듣기 싫어하는 자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심판받을 날만 남아 있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자기 죄를 두고 애통할 줄 모르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교만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두로"와 "시돈"은 예로부터 우상숭배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소돔"은 잘 아는 대로 성도덕 문란의 최악의 표본 같은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회개할 줄 몰랐던 이 갈릴리의 세 동네들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 악명 높은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도 더 악했으면 악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 재림의 날에 누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심판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들,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살인이나 간음 따위의 중죄를 저질렀던 악인들이 가장 중한 벌을 받을 것 같습니까?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너희"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원의 권능,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온갖 은혜, 아무 핍박도 박해도 없는 이 평화 시대 - 이런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은 모르는 이 '완고하고 교만한 세대'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심판 날에는 무당 앞에서 절하던 사람보다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판 날에는 세상에서 마음대로 방탕하고 살았던 악질 인생보다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웠으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영혼을 두고 애통해 볼 줄 몰랐던 사람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판 날에는 육백만의 유태인을 학살시킨 나치의 독재자나 2천만의 인민을 굶주림에 몰아넣었던 북한 공산 독재자보다는, 신앙생활에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출석 교인'으로만 내내 살았던 사람이 틀림없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세대가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이야말로 심판 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세대를 향하여 경고하고 계십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고 겉보기에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심령으로 진정 애통하며 자복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교만의 세대'에 남지 않도록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돌이켜 보며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의 초청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악한 종말세대입니다.

다시 본문 32절 상반절을 다시 보시면 "32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터의 아이들이 이제 '결혼식 놀이'를 하는 장면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쪽 아이들이 연회장에서 "피리를 부는" 흉내를 내면서 흥을 돋우려고 하는데, 다른 한편 아이들은 그저 멀거니 보고만 있고 이에 호응하지 않는 경우를 예로 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한쪽이 무슨 놀이를 시작해도 다른 한쪽이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 자연히 전체의 흥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회개의 촉구'에도 무반응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친히 초청하신 '구원의 잔치'에도 전혀 기쁨으로 응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저 울고불고 애통에 빠지게만 해 놓고서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일단 참된 회개가 일어나면 즉시 그 다음 단계 즉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기쁨이 넘치는 잔치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고마운 초청을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냉담했습니다.
34절과 35절의 말씀이 바로 그런 '시큰둥한 무반응의 세대'를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서 "3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는 무슨 다른 '증거'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하여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가운데 사는 신자들의 삶이 바로 이 복음이 '옳은 것' 것임을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일반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멸시 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그처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구원의 잔치를 만끽할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율법사들로 대표되는 '그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기쁨을 전혀 공감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무감각한 '불신앙의 세대'의 사람들은 그처럼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 준 예수님을 가리켜 그저 '놀기 좋아하고 저질의 인간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비난만 퍼부었던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복음을 듣고 똑같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두 세대로 나뉘어집니다.
한쪽은 예수님과 사귀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나서 야단인데, 다른 한쪽은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마치 수준 낮은 저질 인간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큰 차이가 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앞에 언급된 사실, 곧 '애통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서부터 그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은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선포가 그저 맹숭맹숭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부터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리 '죄 사함'을 약속해 준다고 해도 전혀 기뻐할 이유도 없고 잔치할 기분도 나지 않을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애통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전혀 딴판입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중한지, 얼마나 고질적인지, 얼마나 갚을 길 없이 많은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가운데 오직 자복하며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깨끗하게 씻어졌다는 이 놀라운 복음 선언 앞에 그야말로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기쁨인 것입니다.
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만이 그 짐을 벗겨 주는 손길에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멍에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아무 조건도 없이 한순간에 가볍게 해 주시는 손길이 얼마나 후련한지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주님의 '구원의 초청'에 이끌림을 받은 성도는 이제 날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생애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와 '영적 세대'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저 '세리와 죄인'들만 모인 자리처럼 보이겠지만, 이 잔치 자리야말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충만한 곳임을 마음껏 누리는 행복한 '예수 세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정말 알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는 '이상한 세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철저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만 빠져 있는 가운데 그저 아무 제재도 받지 않는 '자유방임'을 개인의 권리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을 보면서, 지각 있는 기성세대는 '질서'와 '희생'과 '덕'이라는 가치관을 아예 잃어버리고 있는 이 사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근심을 떨쳐 버릴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행복은 바로 공산주의의 무서운 핍박과 무력남침을 이겨낸 결과로써 누리게 된 것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반공(反共)세대'는, 기본적인 역사관조차 없이 "요즘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무책임한 소리로써 이 나라의 청년들을 '무방비 상태의 비둘기떼'로 만들고 있는 '386세대'의 종북좌파 정치가들을 보면서 땅이 꺼지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더욱 한심한, 더욱 까다로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어떤 세대를 정의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촉구' 앞에 애통으로 반응할 줄 모르고 '구원의 초청' 앞에 기쁨으로 반응할 줄 모르는 '반(反)복음, 무(無)예수의 세대'입니다.
이런 세대는 예수님 당시 때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예수님 심판하실 날까지 계속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오늘 이 시대에 바로 이 현대 교회 안에서도 역시 이처럼 '울지 않고 춤추지 않는 영적 무반응의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서는 '통성기도'라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기도란 마치 무슨 '귀신들린'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무심한 신세대'들이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 세대에는 철따라 모이는 부흥사경회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쁜 하늘 잔치'로 여겼고 그래서 그렇게 즐겁게 모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주일예배 한 번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게으른 현대 교인'들에게는 그런 특별집회들이란 좀 '병적이거나 광적인' 신자들이나 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말라가며 '구원의 기쁨'을 잃어가고, 그 대신에 그저 '점잖은 표정'만 내내 짓고 '얌전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가장 고상한 신자인 줄로 아는 신종 세대가 바로 현대 교회 안에서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희생제물로 자신의 몸을 바쳐 주신 예수님 앞에서도 전혀 자복과 애통이 나오지 않는 이상한 세대,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갚아 주시고 그 대신에 천당 영생을 공짜로 얻게 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도 전혀 자복과 애통이 나오지 않는 이상한 세대,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갚아 주시고 그 대신에 천당 영생을 공짜로 얻게 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도 조금도 감사의 희열이 터지지 않는 실로 답답한 세대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 바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후죽순처럼 뻗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의심의 세대'요 '불신앙의 세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불충의 세대'요 '배교의 세대'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무반응하는 세대, 예수님에 대하여 시큰둥한 세대가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권능을 많이 행해 주고 계시는 '교회' 안에서 팽배해 있으니, 주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의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을 향하여 "내가 이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들이 벌써 회개하였으니라"고 탄식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고 곡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야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하고 '연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맞장구치지 않는다고 해서 또 뭐라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비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화육하신 사건도 무슨 '애들 장난'처럼 보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 고통의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사건도 무슨 '배우의 연기'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죄를 두고 애통하며 자신의 눈물로 그 주님의 발을 씻었던 '죄인인 한 여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복음은 진짜 중의 진짜입니다.
'한 편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신 주님의 '십자가 대속'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사건들 중에 가장 감동력 있는, 다른 그 어떤 것과 비길 수도 없는 최고로 위대한 실화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고마운 복음의 부름 앞에 회개의 애통으로 '울 줄' 알고 구원받은 감격의 기쁨으로 '춤출 줄' 아는 진정한 '복음 세대', '예수 세대', '천국 세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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