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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도성 1 : 벧엘, 하나님의 집(창 2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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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도성 1 : 벧엘, 하나님의 집(창 28:10-19) 
 
 
❚거룩한 도성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한 주간 은혜 중에 잘 지내셨습니까? 세상이 하도 험하고 악해 하나님 은혜 아니고서는 한 주를 평안히 살고 이렇게 주일에 웃는 얼굴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앞뒤 옆에 계신 성도들과 인사 나누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할 새로운 시리즈 설교는 ‘거룩한 도성’이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지명(地名)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지명들은 각기 독특한 신앙적인 교훈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성서지리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하게 됩니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 전체와 특히 이스라엘이 위치한 가나안 지방, 오늘날의 팔레스틴 지역을 자세히 공부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몇 주간 성서지리학 시간처럼 그 수많은 지명과 도시의 이름을 일일이 다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대표적인 도시의 이름을 뽑아 신앙적인 교훈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오늘 살펴볼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다음 주일에 살펴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거룩한 시온 성,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시입니다. ‘여리고’라는 성은 영적인 승리를 상징하며, ‘아이’라는 성은 영적인 패배를 상징합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고귀한 도시입니다. 이밖에도 참 많은 도시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도시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 도시의 이름에 숨어있는 귀한 영적인 의미들을 되새겨보고자 했는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이른 오늘부터 몇 주간 말씀을 통해 함께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이 결실의 계절에 깊은 말씀의 세계로 즐거운 말씀 여행을 떠나가 보십시다. 제가 여행 가이드가 되지요.

오늘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벧엘’이라는 성읍에 대해 말씀을 나눕니다. 벧엘은 오늘날 예루살렘 북방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베이틴’이라는 도시입니다. 성경에 이 벧엘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설고 물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8절에 보면 벧엘 동쪽 산으로 장막을 옮겨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답게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서 삶의 터전인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지금은 이사를 수없이 다니고 또 포장이사 하면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쉽게 이사를 합니다만 아브라함 당시는 이사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내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씨족사회로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 사는데 이 동네를 떠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나가라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해 낯선 이방인의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정도로 믿음을 대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사를 할 때마다, 장막을 옮길 때마다 항상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도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여러분에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헌데 벧엘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는 첫 장면은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 28장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이 벧엘에서 소중한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성경에서 이 벧엘이라는 도시가 아주 중요하게 등장한 두 장면을 찾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곳, 벧엘

자, 성경에서 벧엘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진 도시일까요?

첫째,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돌 기눙을 세운 곳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본문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면 야곱이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지고 거기서 유숙하려고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워 잤다고 말씀합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노숙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멀쩡하게 집도 있고 가족도 있는 야곱이 길바닥에서 그것도 돌을 베개 삼아 노숙을 하게 되었을까요? 지금 야곱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 특히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곱게 자란 막내아들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은 사건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는 펄펄 뛰며 동생 야곱을 죽이려 들고 형을 피해 처량한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잠시만 피해 있으라고 하셔서 지금 야곱은 천리만리 떨어진 밧단아람의 하란 땅으로 도피하는 중입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남동생 라반이 있다고 하지만 외삼촌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안한 상황입니까? 얼마나 큰 위기입니까?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정든 집을 떠나, 부모와 가족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처량하게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길바닥인데 편안한 잠자리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겉옷을 펴서 이불 삼고 베개 대신할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야곱은 베게 비슷한 모양을 한 돌을 발견해 베고 잠을 청합니다. 그런데 잠이 잘 올 리 없지요. 자기 처지가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고 낯선 세상에 자기만 뚝 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으로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절망감에 젖은 야곱은 억지로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꿉니다. 12절을 보세요. 꿈속에 사닥다리 하나가 나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 사닥다리 꼭대기는 저 하늘 위까지 닿아 있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에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늘까지 닿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 사닥다리는 야곱이 누워있는 이곳이 하늘과 통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하늘과 이어진 그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 정도로 야곱이 누워있는 이곳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3절부터 보세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아 외로움과 처량함에 잠든 야곱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네가 외롭게 처량하게 도망가는 중이지만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할 것이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도망 가다가 지쳐 날이 저물어 길바닥에 자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소망을 주시고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과 함께 하면서 어디로 가든지 지키며 인도하시다가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놀라운 약속까지 하십니다.

이 꿈을 꾸고 깨어난 야곱은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한 후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짓습니다. 히브리말로 ‘베트’란 ‘집’이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베트엘, 즉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벧엘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 그곳은 본디 루스(아몬드 나무라는 뜻)라는 평범한 지명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하던 도시인 루스가 야곱이 꿈을 꾸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 하나님의 집인 벧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도 특별한 체험이지만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아 낙심하고, 소망을 잃고 실망한 야곱에게 새 소망을 주시고 축복을 약속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신 결정적인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 벧엘에 자기가 베고 잔 돌을 기둥처럼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제단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장소이고, 내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하는 체험을 한 장소라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 모두는 ‘벧엘의 체험’을 한 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체험을 한 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안 그러고서는 남들 다 쉬고 놀러가는 이 좋은 휴일에, 더욱이 며칠 동안 지긋지긋하게 비가 오다가 모처럼 활짝 개인 이렇게 좋은 일요일에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할 리가 없습니다. 쉬는 것보다, 노는 것보다, 세상의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더 좋고, 더 소중한 줄 알기에 여기 나와 계신 것 아닙니까? 마치 평범한 동네인 루스가 야곱의 체험 후 벧엘,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되고, 하나님을 통해 새 인생을 시작하고 새 소망을 얻게 된 것처럼, 우리 인생도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인생이고 세계 수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 벧엘의 체험을 한 후 특별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까? 물론 모태신앙이나 어려서부터 교회 나온 분도 계시지만 상당히 많은 성도들은 인생을 살다가 위기를 맞고, 힘든 일이 생겨서 교회를 나왔습니다. 실패를 경험하거나 고난을 당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를 찾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최대의 위기 때문에 벧엘에 왔습니다. 위기나 고난 아니었으면 집에서 편안히 지내지 여기 올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고난은 힘들어도 그 때문에 벧엘에 오게 된 것이 큰 은혜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절망이 희망이 되고, 고통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여러분도 꼭 이런 체험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미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현재 야곱처럼 위기를 겪고 계신 분들, 고난과 절망, 외로움을 겪는 분들은 지체하지 말고 벧엘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꿈을 꾸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모든 고통은 희망으로 바뀝니다. 우리 하나님께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둘째,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을 체험한 거룩한 벧엘이 우상이 세워진 장소가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은 큰 고민이 하나 생깁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가 자기편이 되고 영토도 남왕국 유다보다 훨씬 큰데 정작 종교적인 면에서 북왕국이 남왕국 유다의 상대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왜요? 남왕국은 예루살렘을 차지했고 거기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암만 자기가 큰 영토를 차지했어도 북왕국 백성들이 다 남왕국의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죄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니 심각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 북왕국 백성들이 자꾸 남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이 백성들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고 남왕국 왕 르호보암에게 붙어서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나? 등등 걱정 또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이렇게 고민하던 여로보암이 나름 기가 막힌 묘안을 생각해 내게 되지요. 바로 북왕국의 벧엘과 단에 성소를 만들고 거기에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 제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금송아지가 신이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신이 바로 이 금송아지 신이다(마치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괜히 남왕국 예루살렘까지 고생해서 가지 말고 여기서 편안하게 이 금송아지에게 절하고 제사하면 된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특히 벧엘은 앞서 설명한 대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단을 쌓은 역사적인 장소니 거기 성소를 세우고 찬란한 금송아지를 세워 예루살렘에 필적한 종교적 명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 바람에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서 졸지에 우상을 숭배하는 ‘우상의 집’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에도 벧엘은 두고두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나 아모스 선지자는 이 벧엘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에 혹독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서 10:5에 이 금송아지 우상 때문에 ‘하나님의 집’인 ‘벧엘’이 ‘벧아웬’, 즉 ‘허무의 집, 죄악의 집’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벧엘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요즘 교회가 팔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교회가 팔릴까요? 부채를 얻어 새 교회당을 애써서 지었는데 부도가 나거나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나 안타깝게도 교회가 팔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교회 건물이 이단에게 팔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돈을 많이 준다니까 이단인지 뭔지도 모르고 파는 경우가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교회가 절에 팔리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부산에 가다 보면 분명 모양은 교회인데 찜질방인 건물이 보입니다. 

교회가 팔려 찜질방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모양은 분명히 교회인데, 딱 십자가만 달면 교회인데 절인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가 팔려 절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팔려 찜질방이 되고, 교회가 변하여 절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집이 말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참담한 일이란 말입니까?

마찬가지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벧엘, 그 거룩한 장소가 우상을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치적인 야욕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변하여 수치스러운 ‘우상의 집’이 된 것입니다. 있을 수 없을 일이지요. 하지만 여러분, 이런 일이 내 삶에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이 안 계시고 우상이 서니 우상의 집이 된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예수 믿는 집안이라 해도 그곳은 우상의 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 으리으리한 집에 살아도, 제아무리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고,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여로보암처럼 내 이익 때문에, 내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치워버리면 우상 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남들 부러워하는 큰 예배당을 으리으리하고 지은 들, 겉으로 볼 때 분명 십자가를 단 교회당 건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지배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지 아니 하시면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나만의 벧엘이 있습니까? 꼭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나만의 벧엘을 어떤 곳으로 만드시겠습니까? 야곱처럼 하나님 만나고, 내 인생이 회복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내 욕심, 고집 때문에 부끄러운 ‘우상의 집’으로 전락시키겠습니까? 전적으로 여러분께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나만의 거룩하고 소중한 벧엘을 만들어 잘 지켜 가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힘들고 지치면 달려갈 수 있는 나만의 벧엘,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 회복되고 새 힘을 얻는 곳, 절대 어떤 이유로든 그곳을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말고,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거룩하고 소중한 벧엘로 만들어 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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