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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충만한 공동체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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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공동체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관심 대상 제1호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직접 세우셨고, 지금까지 이끌어오셨고,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움직이는 열쇠요 방향이요 정신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이 타락하지만, 반대로 교회가 살아 있으면 세상은 희망에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참교회의 모델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교파나 제도가 중심이 된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교회! 그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현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생기와 기쁨이 넘치고 능력과 기적이 역사하는 교회이고,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결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실수가 많은 교회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현재 우리들이 목격하는 교회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교회는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와 분명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로마제국을 뒤엎었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건물도 없고 제도도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었고 무엇보다 성령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론(敎會論)은 예수님의 교회론이어야 하고, 우리의 목회철학은 사도행전의 목회철학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님이 의도하시고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우리 교회의 비전이고, 저의 비전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 9가지 가운데 첫 번째로 성령 충만한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살펴보고, 신구약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충만한 성도와 공동체에 관하여 고찰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성도,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1.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모습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교회의 특징들 중 가장 큰 특징은 그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소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입니다. 최초의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성령으로 탄생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시작되던 날의 성령님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성령님은 기도하는 120명의 무리 속에 임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당시 위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한 곳에 모여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열흘 후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모여 있던 무리들 위에 홀연히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충만해지고 불이 임하자마자 성령의 바람, 곧 생기가 임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들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진리로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kerygma)요,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성령에 취한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나라 방언으로 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순절에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님은 회복시키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1, 4절). 

예수께서는 이날의 성령 강림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부터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모인 무리들은 모두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가득하여 어떤 다른 생각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께 사로잡힌바 되면 그 사람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만을 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여 강한 바람 같은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위험한 상황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쳤던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의 변모된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 후 엄청나게, 아니 불가능하게 보이는 변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사도행전 2장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기도에 온전히 힘썼습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사람들의 의기투합이나 결심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보혜사 성령님의 강력하고 뜨거운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불이 언 손을 녹여주듯이 성령님은 우리의 차가운 심령을 녹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짐 엘리엇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붙지 않는 석면같은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불이 활활 붙을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을 내게 부어 주옵소서. 또한 나를 주님의 뜨거운 불꽃이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사도들과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은 하나님의 오랜 구원의 경륜 안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욜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남녀노소, 남종과 여종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은 오순절 날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이날 몰려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행 2:16)이라고 확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부으심, 곧 성령 세례는 예정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 세례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실은 세례요한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역점을 둔 메시지였습니다. 

요 1:33-34=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세례요한이 파악했던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요한에게 계시하신 내용 중 현저한 주님의 사역은 성령 부으심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혼돈이 있지만, 성령 세례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양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A급 신자가 되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것은 성령 세례를 성화와 혼돈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가 거룩하게 성숙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 세례가 중생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성령 세례를 강조한 세례요한이나 주님의 강조점을 약화시킵니다. 성령 세례는 이미 중생한 성도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이 마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듯이 충만함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의 성령 충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누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요 15:3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 세례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결신자를 얻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행 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미 결신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 받는 모습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방문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2, 6-7절).  

이처럼 성령 세례의 약속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성경의 분명한 약속인 성령 받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교회사 2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이었으나 성령 세례를 체험한 이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뜨거워 변화된 사람 가운데 요한 웨슬리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은 술취함, 싸움질, 도박, 자살 등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고, 교회는 소금의 맛을 잃은 때였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아침 9시 15분 경에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읽던 웨슬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주님이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일생에 처음으로 그런 뜨거운 감격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웨슬리는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 성령 운동이 크게 일어나 오늘날의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실패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영국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면 미국교회가 자랑하는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요 철학자요 신학자입니다. 그는 항상 설교를 종이에 적어와서 호롱불 옆에서 읽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청중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느날 그가 “진노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설교 원고를 호롱불 옆에 놓고 읽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숨겨놓았던 죄악들, 그동안 믿는다고 하면서 외식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며 데굴데굴 구르면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런 성령의 부으심의 현상이 계속되자 미국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의 집회에 참석해서 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각기 자신들의 고장에서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저 유명한 대각성 전도운동으로 번져갔고 미국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태초의 계시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던 그 말씀(Logos)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성도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의 수난을 통해 인류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사 하나님의 자녀와 소유로 삼으십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 되려면?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의 모습으로 닮아가려면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성령 충만해야 하고, 전 회중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가장 놀라운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경험하는 최상의 축복은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사역을 기록한 성령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신 상황과 때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마음대로 오시게 할 수는 없지만, 과거 성령께서 어떤 경우에 오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성령 충만을 준비하는 일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느 때 성령을 받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사도행전을 찾아보겠습니다. 

1) 성령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다릴 때 오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역으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 사도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 기도하며 기다린 것처럼, 오늘 우리도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을 교회에 두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강령처럼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 가운데, 수요밤 금요밤 기도회 위에, 각 구역들의 모임과 매일의 새벽기도회 위에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2) 성령의 선물은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을 때 주어졌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성령의 부으심은 이제 ‘모든 먼데 사람’ 곧 복음이 전해지는 만방의 사람들에게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에 비추어 내 속의 허물과 죄악을 철저히 내어놓는 일에 힘씁시다. 성령님은 회개하는 가정, 회개하는 구역 위에 불같이 역사하십니다.
  

3) 성령의 부으심은 성도들이 모여서 합심 기도할 때 임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체성이 잘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할 때 모인 무리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원리는 변함없습니다. 1907년 1월 14일 밤과 15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있던 1500여명의 남전도회 회원들이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할 때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회개운동이 크게 일어나 주위 사람들과 지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원하여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여러분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의 대 계명, 즉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화는 일’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까? 

주님의 성령은 이처럼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제자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순종의 채비를 차린 사람에게 오늘도 성령의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5) 성령의 부으심은 많은 경우 설교 말씀을 경청하고 있을 때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 강림의 역사가 가현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1:44-45). 

세례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믿음만으로도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성령강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 충만의 역사는 이처럼 획일적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데도 현대교회는 이러한 면에서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육부서의 사역에서 설교의 영역이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의 강단에 붙어 있는 표어입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는 이 강단에 또다시 초청될지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조건 짧은 설교를 좋아하는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경향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성령님은 성도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때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구역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장악하셔서 여러분의 전 삶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도록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느 때 성령의 부으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항상 해당되는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때 성령 충만의 비결은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기대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됩시다. 교회의 집회 참석을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십시오. 특히 기도회로 모일 때가 우리 영혼이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설교 말씀을 받을 때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살전 2:13). 말씀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나의 마음을 찔러올 때 이를 회피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꼬?”

주님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대상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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