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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에 나오거든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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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나오거든 (사 6:1-8)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웃시야왕은  유대 나라의 10대 왕입니다. 52년 동안 유대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의 전반기는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와 복을 많이 받고 그의 지위와 명성이 올라가고 열국 가운데 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평안하며 부강해지고 궁궐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왕은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교만과의 싸움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성전안에 들어가 제사장을 제치고 향단을 분향을 하려고했습니다. 제사장이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바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할바니 왕은 성소에서 나가소서." 하자 제사장에게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그순간 나병이 발하여 성전에서 쫓겨나고 왕의 자리도 아들에게 내주고 별궁에서 지내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이렇게 웃시야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웃시야가 사라지자 허무함과 견딜 수 없는 공허함에 이사야는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기대했던 사람이 죽고 사라질 때, 또는 많던 재산이 떠나갈 때 그 충격은 심각합니다. 사람이 인기가 떠나가고 질병이 와서 건강이 떠나갈 때 그 충격은 큰 것이지요. 권력의 우산아래 잘 지내던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위로 받으려고  나아갔습니다.  허무함을 극복하려고 나갔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이사야는 그곳에서 크게 세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더러운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게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이사야가 경험했던 세가지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1)
  
이사야는 하나님이 높으신 보좌에 높이 앉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영안이 열려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웃시야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웃시야 위에 계신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영원한 왕국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눈이 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공허함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공허함을 느끼며 삽니다. 그래서 끝없이 물질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인기를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온갖 것으로 만족을 경험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천하를 다 가져도 마음의 공허함은 여전합니다. 이 공간은 하늘의 것으로 거룩한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이 채워질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채워질 때 참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의 아름다운 선물이 있습니다. 세 개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라고 하는 집이요, 하나는 직장이라고 하는 집이요, 하나는 교회,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라고 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부간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가정의 집을 주셨고 두 번째는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보람과 필요를 채우도록 하나님께서 직장과 사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에서  심령을 만족하게 하도록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 살면서 이 세 개의 집을 가져야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가정에서 얻습니다. 물질은 직장에서 얻습니다. 하늘기쁨은 교회에서 얻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채워져야 됩니다. 또 이 세 가지는 항상 짐을 질 때만이 채워집니다. 
  
가정의 행복은 서로 헌신하며 희생하며 끝까지 참고 살아갈 때, 짐을 질 때에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 아무 섬김이 없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에 가서 잠만 자고 밥만 먹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는 서로 사랑이라고 하는 짐을 질 때 행복이 오는 겁니다. 짐이 없을 때 사람은 허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잘 싸우는 이유가 아무 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피차 짐이 없이 서로 희생하고 섬길 마음이 없어지면 못마땅한 마음만 솟아납니다. '왜 늦게 나와? 빨리 나오라니까' 그러다가 크게 싸웁니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싸우고 스스로 상처받고 상처주고 헤어집니다. 
  
직장생활이 즐거워야합니다. 사업이 잘 되어야 합니다. 바쁘게 사업이 잘 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야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시고 항상 가나의 혼인잔치에도 채워주시고 항상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안토니오라는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랜 세월 수도했습니다.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을 내려오려고 생각하고 구두부터 수선하려고 수선공에게 갔습니다. 구두 수선을 하는 동안에 물었습니다. "식구는 몇 명입니까?" "아내와 아이들 8명으로 모두 10명입니다" "그러면 구두를 수선하여 열 식구가 굶지 않을 수 있습니까?" 
  
구두 수선공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주님의 종들의 신발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해지지 않도록 수선할 뿐입니다. 이것에만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요." 
   
이 수선공의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아직까지 수도가 덜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생활속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하고 받을 보수에 연연하다가 일 자체의 큰 즐거움을 놓치고 잇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은혜 받는 곳이에요.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또 주님 앞에 최선을 다 할 때 영적인 만족이 오는 거예요. 은혜가 오는 거예요. 그냥 교회를 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가정도, 직장도, 영적인 집인 교회도 다 땀 흘릴 때, 수고할 때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영적인 행복이 충만해야 가정도 행복하게 되고, 직업을 다 잘 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내 영혼에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는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높으신 영광, 하나님이 높으신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큰 위로가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심령, 공허하고 비어있는 마음을 주님이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것을 통하여 스랍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봅니다.  거룩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던 이에게 또 다른 세계, 영원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찬송이 가득하고 감사가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축복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성전에서 죄를 깨닫고 사함받아야 합니다.(5-7)

두 번째 경험은 심령의 경험입니다. 웃시야는 말할 수 없는 이 죄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죄를 억누르면서 감추면서 살아온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같이 드러나면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뜨거운 불에 있는 이 핀 숯을 가지고 내 입에 대면서 정결함을 얻는 경험을 합니다. 첫 번째는 눈이 열리고 두 번째는 마음이 열려졌습니다. 죄사함 받고 난 심령 속에 마음에 큰 기쁨과 소망과 어디서 날아오는지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기쁨이 왔습니다. 
  
죄를 가지고는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의 짐을 짊어지고는 이 세상을 힘있게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내 죄를 정결하게 해 줄 것입니까? 누가 내 죄의 짐을 벗겨 줄 것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는 차를 타도 불안하고요. 걸어가도 사고 안나나 하고 불안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혹시 무슨 건강에 좋지 않지는 않나?  언제나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유함이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도 떨어지지 않나? 뉴스만 보아도 앞으로  불경기가 오지 않나? 항상 불안해합니다. 이모든 것이 어디에서 옵니까? 죄에서 오는 거예요. 죄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닫혀 있습니다. 이 문을 누가 열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옷자락이 주의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옷 잘입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우리를 덮어주는 곳입니다. 주의 사랑의 옷자락이 우리를 덮어 주시는 곳입니다. 주의 긍휼과 은총의 옷이 우리를 덮어 죄를 가리워주는 은혜로운 곳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 악한 죄를 우리 하나님이 기억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담대히 힘있게 능력 있게 살아 갈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의 마음 문이 열려졌습니다. 죄사함을 받아 마음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죄를 깨닫고 제단 숯불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심령을 적시고 정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강하고 담대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성전에서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8)
  
세 번째, 이사야에게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일 많은 이 땅위에 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많은 사람들을 죄와 멸망에서 건지기 위하여 하나님은 누구를 보낼까?  죽어 가는 많은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자원하여 갈자가 누군가? 찾으십니다.  그 때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헌신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에 눈이 열려 자신의 더러운 죄를 보았고 제단 숯불로 정결하게 사죄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귀가 열렸습니다. 눈도 열리고 마음도 열리고 신령한 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교회에 나오다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전하는 설교로 들려지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들려집니다. 예수께서 나에게 오셔서 오늘 말씀해 주시는 이 거룩한 음성을 들을 때 비로서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의 기쁨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이제 주님의 그늘 아래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들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위대한 선지자로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어느 날 개하고 닭하고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개가 닭에게 하는 말이 "너는 아침에 일찍이 꼬끼오 하고 울어서 주인의 아침 새벽에 일어날 수 있도록 깨워 줄 수 있는 사명을 지녔는데 요새는 왜 벙어리처럼 울지를 않느냐?" 하고 물었답니다. 닭이 하는 말이 "요새는 세상이 달라져서 언제 자는지 언제 깨는지 알 수가 없고 그리고 알람을 자기가 필요한 때에 틀어 놓고 자기 때문에 내가 울 필요가 없다"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닭이 말하기를 "근데, 개 너는 도둑이 올 때 짖는 것이 네 사명인데 요새 도둑이 이렇게 난무하는데 어째서 너는 도대체 왜 짖지를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개가 하는 말이 "주인이 도둑인데 언제 짖겠냐?" 그랬답니다.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한 선지자에게만 있는 과정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높으심과 전능하심과 주의 옷자락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일군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헌신하여 사명감당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성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고 더러운 심령을 정결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가장 고귀하고 보람된 일을 맡겨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여 일터에 가고 가정으로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지라도 주님이 보내신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나옵니까? 십자가 그늘이어서 나옵니다. 은혜의 그늘입니다.  세상의 그늘은 잠간입니다. 하나님의 그늘은, 예수님의 그늘은 영원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이곳에서 자유를 얻으며 평안을 누리며 영원하고 거룩한 기쁨을 맛봅니다. 성전에 나와 마당만 밟고 그냥 돌아가지 마시고 영광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고귀한 사명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매주일마다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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