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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더서에 계시된 하나님 (에 9: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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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에 계시된 하나님 (에 9:20-28) 


우리 기독교인들은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애국심이 있습니다. 표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위기가 오면 애국심이 발동 됩니다.
   
이번에 그리스가 경제 위기에 처해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글에서 대한민국이 구제금융을 받을 때와 비교하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는 IMF가 왔을 때 금모으기 운동을 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만 살려고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글이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건 애국자 가나옵니다. 에스더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후가 된 후에도 자기민족을 위해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은 훌륭한 분입니다.
  
에스더서에서는 페르시아의 포로로 지내던 유대인들에게 닥친 민족의 위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BC486-464년까지 통치한 아하수에로 왕은 정치, 경제, 군사, 교육에 능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왕위 3년에 호화로운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부름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왕후는 폐해지고 그 자리에 유대인 포로이고 고아인 에스더가 올라가게 됩니다.
   
에스더가 왕후로 뽑힌 후에 왕실의 제 2인자인 하만이 에스더의 사촌 오빠며 대궐 문지기인 모르드개를 미워하게 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사촌오빠인줄을 몰랐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미워서 모르드개와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대민족까지 다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스더는 기도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그 당시 법도로는 왕후라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가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반가이 맞으며 에스더의 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그 결과 모르드개와 유대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하만은 자기가 세운 장대에 달려 죽게 되고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그 날에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수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념해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의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설교는 에스더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함께 합시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섭리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 혹은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기차 안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차 승객들에게 요한복음이 기록된 작은 책자를 나눠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썬다 싱이 준 성경을 보지도 않고 찢어 창밖으로 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철로 변을 지나던 한 사람이 종이가 날리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한 장을 주었습니다. 읽어보니 거기 “생명의 떡”이란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 말의 뜻이 궁금했습니다. 그 종이가 성경이라는 것을 알고는 성경을 한 권 샀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떡이라는 말이 어디 나오는지 찾기 위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후에 인도 교회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때 썬다 싱이 그 기차에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사람이 성경책을 찢어 창 밖으로 버렸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사람이 철로 변을 지나게 됐을까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스더서의 내용은 아하수에로 왕이 베푼 잔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80일 간의 긴 잔치입니다. 왕이 그렇게 성대한 잔치를 베푼 이유는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180일의 잔치 후에 7일간의 뒤풀이 잔치가 열립니다. 긴 잔치를 위해 수고한 수산성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 잔치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이 잔치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왕이 잔치 중에 왕비의 미모를 자랑하려고 왕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왕비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왕의 부름을 거부합니다. 왕이 진노합니다. 결국 이 일로 왕비는 폐위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폐위된 왕후의 자리에 에스더가 올라가게 됩니다. 당시 시대적으로 왕후가 왕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왕후 와스디는 왕의 부름을 거절했습니다. 이 배경에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올라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언적 섭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첫째,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에 올라갈 조건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은 부족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한 섭리입니다.
왕후는 얼굴만 예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도 물론 예뻐야 하겠지만 왕후의 자리에 맞는 혈통과 배경과 학벌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대인 포로였습니다. 그리고 고아였습니다. 에스더에게서는 외모 외에는 왕후로서의 자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세상적인 조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인간적인 조건을 보시고 부르신다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탈락하고 말 것입니다. 고전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을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에 문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않고,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능한 자도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인간적인 조건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가진 것이 부족하고 배운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하시면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하시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기가 죽어서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에스더처럼 인간적인 조건이 부족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을 폐하시고 이방인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왕후 와스디는 교만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거절했고 심지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우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버림과 이방인의 선택에는 또 다른 섭리가 있습니다. 롬 11:11에 보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왕후에서 폐해진 와스디는 그것으로 끝이 났지만 하나님의 손에서 버림받은 것 같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시기해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하와는 정말 예뻐요.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와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만드셨어요?”, “바보야,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습니다. 
 
2. 하나님은 역전승하게 하십니다. 
   
에스더서에는 유다 사람이며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와 아각 사람 하만의 싸움이 나옵니다. 아각사람이라는 말은 아말렉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만은 에서의 후손이요 모르드개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처럼 에스더서에는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이 나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미워하고,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미워하고,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고,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미워했습니다. 어찌 보면 에서의 자손 아각사람 하만과 야곱의 자손 모르드개와의 싸움은 숙명적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왕은 하만을 높여 나라의 모든 실권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하만에게 절을 하며 절대적인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대궐 문 앞에 있는 모르드개만이 유독 그에게 절하지도 않고 존경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심한 갈등과 대립이 시작 된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인 전부를 멸하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월 13일에 음모를 꾸미기를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대인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날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하여 50규빗이 되는 장대를 준비합니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은 누가 봐도 하만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정승 정도가 아니라 완전 K.O승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만은 국무총리 정도 되고 모르드개는 문지기입니다.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변수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싸움에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니 싸움의 방향이 희한하게 바뀌게 됩니다. 모르드개가 역전승을 하게 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었는지 궁중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궁중일기를 읽다가 과거에 모르드개가 왕을 위하여 공을 세운 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궁궐의 문지기들이 왕을 시해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눈치 챈 모르드개의 고발로 그들이 잡힌 사건의 기록입니다. 그 밤에 왕이 궁중 일기를 읽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다음 날 왕은 하만에게 왕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겠냐고 묻습니다. 하만은 속으로 왕이 상을 줄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고는 왕의 왕복을 입히고 머리에 왕관을 쓰게 하고 왕이 타는 말을 타게 해서 왕의 신하 중에 가장 존귀한 사람의 손에 맡겨서 그에게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여 그를 높여주라고 말합니다. 왕은 하만의 말을 듣고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타게 하고 하만으로 하여금 모르드개를 높이게 합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이 모르드개를 높이고 수종들게 된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역전승입니다.
   
이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려고 준비한 장대에 달리게 됩니다. 가족들도 몰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려고 한 그 날 유대인들이 원수를 죽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완전 역전승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밀어주시고 그 결과 패배할 수밖에 없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전승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사울 왕을 봅시다. 사울은 왕이었고 다윗은 왕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누가 봐도 사울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사울은 점점 약해지더니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은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성경에는 다윗과 사울의 싸움과 같은 역전승이 많습니다.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과 애굽군대의 싸움도 그렇고, 히스기야와 앗수르의 산헤립의 싸움이 그렇고, 모르드개와 하만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번 올림픽에서 신아람 선수가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억울하게 메달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멈춰버린 1초, 우리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1초에 그렇게 많은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판이 편파적으로 심판을 봐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신다면 우리의 인생은 역전승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사명을 위하여 사람을 세우십니다. 
   
에스더의 사명은 위기에 처한 유대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에스더를 유대민족 가운데서 태어나게 했으며, 고아인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은혜를 입어 잘 자라게 했고, 왕후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더의 사명은 왕비가 아닙니다. 왕비가 되는 것은 사명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사명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착각입니다. 자리에 오르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사명인 것입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가면 도시 한복판을 가르는 ‘스기하라’의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대사관의 부영사였던 ‘스기하라’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1940년 여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인접한 나라인 리투아니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안전하지 못해 또 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비자를 발급하는 대부분의 대사관들은 이미 철수준비로 문을 닫았습니다. 

다만 일본 대사관이 문을 아직 닫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유태인들은 일본 대사관으로 몰려갔습니다. 당시 부영사였던 스기하라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본국에 문의했고, 본국은 비자발급을 금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본국의 명령을 거부하고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한 유태인의 수자는 무려 6천 명이 넘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억하고 리투아니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그 거리 이름을 ‘스기하라’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스기하라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소.” 우리는 스기하라의 태도에서 사명자의 삶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총리가 사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7년 흉년 중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특히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 이주 시켜서 큰 민족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소원하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되었든 그 자리 자체가 사명이 아닙니다. 그 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에 4:14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나”라고 말합니다. 에스더는 그 말을 듣고 자기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그리고서 금식하고 왕 앞에 나아가서 자기 민족을 구원합니다.
   
저는 인생의 성공은 사명의 성공이라고 믿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큰 기업체의 회장이 되고,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고 해도 자기의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자기를 세우신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여자 청년이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서원을 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언어 훈련도 잘 했고 기본적인 신학 훈련도 했습니다. 자기가 인도에 가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둔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형부도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조카 넷을 그대로 두고 인도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본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인도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 대신 인도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네 아이가 잘 컸습니다. 놀랍게도 그 중에 세 아이가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이모가 늘 인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 자매가 다시 선교 본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25년 만에 다시 편지를 씁니다. “제 대신 세 아이가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배로 인도에 선교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 땅에 팔려갔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복수심에 불타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애굽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사명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 70명을 살리시려고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셨구나.’ 요셉은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형들을 품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마 17:27에 보면 바다의 물고기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낚시에 그 물고기가 걸렸습니다. 물고기가 동전 한 세겔을 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동전으로 예수님과 자기의 성전세를 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 한 마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자리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명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사명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저는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문에서 어느 목사님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기자 하나가 ‘한국 교회는 불량품 같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그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느 목사도 어느 교인도 그 말에 변명을 할 수 없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설교는 많이 했지만 사명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라”라는 말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복을 받아서 무엇해야 하는가’입니다. 왜 복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걸 놓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끝났다는 말은 인생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이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기도의 사이렌을 울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천사들이 출동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구원 얻는 후사들을 돕는 구조대원인 것입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무슨 소리일까?’ 하며 귀 기울이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 50:15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모르드개는 민족적인 위기를 만나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왕 앞에 나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에스더는 왕 앞에 나아기지 못한지가 이미 30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왕비라 할지라도 왕의 부름이 없이 왕 앞에 나아가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살 수 있는 길은 왕이 손에 든 금규를 내밀면 됩니다. 만약 왕이 금규를 내밀지 않으면 아무리 왕비라도 죽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금식하고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제3일에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갑니다. 왕이 왕후 에스더를 보는 순간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손에 잡고 있던 금규를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규 끝을 만집니다. 그리고 왕을 자신의 잔치에 초대하게 되고 하만의 궤계를 알기게 되고 모르드개를 달려고 준비한 장대에 하만이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죽음을 당하기로 된 그 날에 유대인들이 원수를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자매가 아이를 낳았는데 대머리였습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빠지는데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대머리였습니다. 아이가 대머리이니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새벽마다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안수의 능력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이의 어머니는 매일 아이를 데리고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목사님께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아마 스트레스를 무척 받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도 머리카락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이 되니 머리카락이 다 났습니다. 그 어머니의 15년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를 드린 것이고 그 믿음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저는 기도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도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기도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제가 군에서 야간사격 훈련을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분명히 제 표적에 10발을 쐈는데 표적지 검사를 해보니 20발이 맞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총알이 표적지를 맞추고 튕겨 나와서 다시 표적지를 맞춘 것입니까? 아니죠. 제 옆에서 사격하던 병사가 저의 표적지에 발사를 한 것입니다. 그날 그 병사는 고참들에게 많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 병사는 다른 병사와 동일한 자세로 엎드려서 표적지에 집중하고 사격을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기도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방향 중에 좋은 방향은 자신의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사명에 초점을 맞춰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에스더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2. 하나님은 역전승하게 하십니다.
3. 하나님은 사명을 위하여 사람을 세우십니다.
4.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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