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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 의지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시 8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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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의지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평생 동안 열심히 신앙 생활하던 어떤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막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가 붙들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아,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곳을 통과하려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뭐, 복잡한 것은 아니고 당신이 일생 동안 살아온 것을 점수로 환산하여 1000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1000점이라 구요? 별로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요.” 
“자 그럼 이제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얘기를 해보세요.” 
“저는 30년 동안이나 어떤 선교 기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했지요.” 
“아! 그래요? 정말 대단하군요. 1점입니다.”
“네? 1점이라 구요? 그것밖에 안됩니까? 이상하군요. 계속하지요. 저는 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하여 무려 40년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훌륭히 키웠습니다. 내 아이들은 지금 모두 목사, 교수 등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행복했답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매우 훌륭하군요. 요즘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매우 드문데, 2점 가산입니다.” 

“네? 2점이라 구요? 정말 모를 일이군요.”그는 벌써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1000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점수가 올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바심이 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지난 60년 동안 한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장년부 성경 공부를 인도했어요.” 
“당신은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또 1점 가산 하지요.”

베드로의 말에 그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겨우 4점이군요. 그런데 난 어떡하죠? 더 이상 점수에 보탬이 될만한 얘기가 없는데 예수님 난 어떡하나요? 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이 못되나 봅니다. 제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게 구원을 주실 이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이 말을 마치자 베드로가 박수를 치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야 당신은 1000점을 얻었습니다. 이젠 들어가도 좋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 어떻게 제가 1000점을 얻었죠?”베드로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데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에 가장 낙심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가장 행복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나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라는 탄식과 다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성전에 나갈 수 없는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도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낙심하여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그러한 가운데 시84편은 하나님의 집에 관한 시로서 그 정서와 사상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12)라고 노래합니다.
  
의지하는(바타흐)이란 (피난하기 위해) 서둘러 가다라는 뜻에서 '신뢰하다', '의뢰하다'의 뜻이 나와 어려움과 환난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또는 곤핍한 상황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규례에 대한 자유와 하나님의 집에 대한 특권을 가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방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복 받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갈 수 없다면 믿음으로써 그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으며 편안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일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 일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배하는 성도들만이 복을 받습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한 말씀은 그가 쫓겨나 있던 때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주의 궁정에  거하는 자의 복을 말한 시인이 이제는 비록 자기가 잠간 동안 그 특권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전혀 비참한 처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멀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위로 중의 가장 좋은 위로로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들을 빼앗겼다면 마땅히 마음에 탄식과 슬픔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환난에 대한 감정이 결코 우리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서라도 주를 의지하며 믿음과 인내를 발휘하기만 하면 계속 행복을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복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어느 때든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복은 바로 이 한 가지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삼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 자신을 믿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사람을 의지하는 이 모든 것보다 더 복된 줄 믿습니다. 

의학공부를 하는 한 미국의 여대생이 있었다합니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곤할 때 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합니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하멸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다합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약을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리자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날 저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나아갔다합니다. 뚝 위에 올라서서 여태껏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합니다. 

[ 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다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다합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합니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합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하려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다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깨끗이 마약을 끊어버렸고 지금은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의지 할 때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께 의지 하는 자는 주의 궁정을 사모하며 주의 집에 사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를 말합니다.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진정한 복입니다. 주의 집에 가는 자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들러 보는 자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한 번 또는 두 번 오가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자가 아닙니다. 여관에서 머물 듯 잠시 동안 머무는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 오는 방문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곳에서 생을 보내기로 작심하고 봉사하기로 서원하고, 밤이나 낮이나 머무는 자를 말합니다.

주의 집에 살겠다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주의 집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성도는 주의 집을 거처로 삼기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과 함께 지내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참으로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는 항상 주를 찬송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집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어서, 그들의 삶은 온통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마음과 입술이 주를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주님과의 교통은 주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늘 찬양하며 영화롭게 합니다.

복을 받으려는 자는 주님을 항상 찬송해야 합니다. 한없이 좋으시어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집에 살며 그분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

레스드톡은 울위치에서 저녁 설교를 한 후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그 기차에서 한 젊은 장교가 그를 보더니 다가와서는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저녁 설교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올바은 삶을 살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레드스톡은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는 물었습니다. “이것이 똑바로 설수 있겠나?”장교가 고개를 젖자. 레드스톡은 손으로 연필을 잡아 똑바로 세웠습니다. 이를 보고 장교가 되물 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손으로 쥐고 계시잖아요” “그렇다네, 자네의 생명과 의지는 이 연필과 같이 무기력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자네를 올바로 붙잡아 주실수 있으시다네”25년후 레드스톡은 인도에서 그 장교를 다시 만났습니다. 장교는 기차에서의 교훈 이후 자신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신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의지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연필과 별로 다를게 없는 우리가 어찌 우리를 영원히 세워 주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로 서서 사명 감당하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의 복을 누린다고 합니다.(시 84:5)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음, 정해진 시간에 열심이 있는 형제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하도록 은혜를 받은 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온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쁜 마음으로 이 거룩한 절기에 시온에 가는 사람들만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고 절반의 마음만을 바친다거나, 마음은 없이 외형적으로만 예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복을 누립니다. 마음을 담지 않고 드리는 어떤 기도나 찬양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며, 마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도 하나님은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을 집에 둔 채 시온을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난 자는 노새의 대열과 다를 바가 없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 마음에 경사진 길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 길은 주의 장막이 있는 곳으로 가는 가파르게 경사진 길을 말합니다. 이 길을 히브리어로 "메실로트"(twlsm)라고 하는데, 높은 자갈길이나 시온으로 향하는 계단 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든 산길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길도 없이 절벽과 경사진 곳이 많이 있는 황야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새롭게 되면, 이 마음에 길이 생기고, 하나님을 위한 대로가 생기는 줄 믿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길을 사랑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주님의 길이 있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우리 마음에 있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길에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스트라칸 목사가 어느 날 서재에서 친구와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딸이 들어왔습니다. 딸의 줄넘기 줄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아버지에게 건네어 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그는 친구와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무심결에 그 줄의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의 딸이 들어와 “아빠. 고마와요!”하고 깡충깡충 뛰어 나갔습니다. 스트라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지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주님께서 그것을 다 해결하게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자기의 힘만으로 해결하려고 그토록 애를 씁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
주님만 의지할 우리 인생의 헝클어진 줄도 잘 풀릴 줄 믿습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서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시85:6)

순례자는 성전이 있는 시온으로 향하며 그 발길만으로도 복이 있다고 노래하는데 여기에 걸림이 되는 것은 “눈물 골짜기”(바카 골짜기)입니다. 순례자들은 눈물 골짜기(바카 골짜기)를 지나야 비로소 시온의 큰 길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절기를 맞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꿈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눈물의 골짜기로 불리우는 메마른 골짜기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 순간 이 절망에 빠진 골짜기의 순례자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일어나 다시 꿈의 도시 시온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 순례자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 바로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먹을 나무 열매도 마실 물도 변변치 않은 메마른 골짜기를 며칠씩 지나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연상해 봅니다.
이는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메마르고 황량한 골짜기의 상징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질 때 우리를 더욱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위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위로 자가 되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우리를 외면하고 아니 오히려 고난 중인 우리에게 더욱 절망스러운 말로 상처를 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서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메마른 중동의 골짜기에도 샘이 솟는 곳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실제로 늦은 비는 3-4월에 오지만 초막절 순례자들의 여행 계절인 10월-11월에도 이른 비가 내려 계곡을 적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은 주께 의지 하며 기적을 믿는 자에게만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제공하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위로는 많은 경우 위로 그 자체로 끝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위로는 받았지만 환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은 위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7)라는 자리에 이릅니다. 힘을 얻고 그 다음에 주시는 약속이 '얻고, 더 얻어'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시온에 도달하여 하나님 앞에 서 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입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손을 든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일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생 순례의 여정에 이런 절망스런 골짜기가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진달래 꽃 필 때까지'의 저자 신영희씨 부부는 큰 야망을 가지고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던 차에, 이번에는 최세웅씨가 뇌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수술결과는 더욱 안 좋게 되었습니다. 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습니다. 살아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때, 신영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를 드렸겠는지,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희씨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동안, 최세웅 씨는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뭔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거센 손이 그의 목을 조였습니다. 그 손을 뿌리쳐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때, 구름이 몰려오더니, 그 구름사이로 빛이 나타났습니다. 너무도 환한 빛이었습니다. 구름을 뚫고 비춰오는 그 환한 빛이 최세웅씨의 전신을 비췄습니다. 빛살이 온통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목을 조르던 힘이 사라졌고, 최세웅씨는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최세웅씨가 정상인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기적은 최세웅씨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세상 욕심'을 버렸습니다. 이제는 '참된 삶만이 중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마음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사라졌습니다. 신영희씨 부부가 그동안 의지했던 것은 세상적인 명예와 출세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는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최세웅씨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게 되었을 때, 신영희씨가 먼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에서도 하나님만 의지 할 때 기적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 84:10)라고 고백하게 되낟고 합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하여 도착한 성전에서 순례자는 그곳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겠다는 신앙을 표명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공감이 가는가요? 죄 속에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하나님의 집에 예속되어 거룩한 의무에 순종하는 일이 기쁘다고 합니다. 이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의 봉사에서 행복감을 느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의 악인의 장막에서 천날보다 주안에서 한날의 가치가 이렇게 큽니다. 이것을 알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이처럼 영광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아무리 대단한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며 산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누리는 즐거움에 비하면 그것은 일천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보다, 여호와의 집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장막에 문지기로 있으면서 문을 열 고 닫는 것이, 악인의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 호령을 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장막은 능력을, 궁정은 위엄을, 제단은 신성을 나타낸다면, 집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합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주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죄인들 가운데서 부정을 저지르며 고귀한 자리에 올라 풍요와 사치와 안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깨끗이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 생각합니다.
좌석을 안내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교회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엡 2:19-20).

전체가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과 절반도 못한 사람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20장). 이 불평등과 불합리성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가족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은 문지기 같은 일꾼들이 받는 시간제 수당 같은 것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한 스코틀랜드인 신자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다네.''오, 그래? 그럼 내게도 그것을 들려 주게.''그래, 읽어 주지.'말을 건넨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그가 발견한 성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

그 말씀은 바로 시편 56:3이라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도 동의하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 훌륭한 말씀이군 . 그런데 말야, 나도 오늘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지. 자네가 발견한 것보다도 더 훌륭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네. 자, 이사야 12:2을 보게나. 그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자, 어떤가?' (MOODY MONTHLY)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여야 하나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사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주께 의지하는 좋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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