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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크신 하나님의 질투 (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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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크신 하나님의 질투 (출 20:1-6)

오늘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전재하고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노래 중에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오! 크신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더 큰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늘보다도 크고 바다보다도 깊고 우주보다도 넓은 분이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크냐?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같은 태양계가 수억 개가 모여서 만든 것이 은하계인데 이 은하계 같은 것이 수억 개가 모여서 우주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주는 그보다도 큽니다.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존재인가를 상상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를 생각할수록 사람은 작아 보이고 하찮은 존재로 생각되고 우주의 고독한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인간을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왜 관여하실까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릴 때에도 나이가 같은 사람끼리 어울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갑이어야 친구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너무 큰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른이 인터넷 상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는데 그 대상이 초등학생들이다, 그건 부끄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같은 사람끼리도 나이가 같고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우주보다도 더 크신 분이 왜 이렇게 작고도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관여하신다는 말인가. 이것이 혹시 과거 인류가 무지할 때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할 때에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축소해서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말했지만 사람이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인류의 의식이 발달하기 이전 미신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정이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일에 왜 간섭하실까. 나의 작은 생각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이런 질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이 제2계명 속에 하나님의 두 가지 상반된 면모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거대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이 계명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늘보다도 땅보다도 물보다도 크신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물이든 다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만을 경외하고 섬겨야지 하나님이 만드신 어떠한 피조물도 두려워 할 필요 없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무지한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천둥이 치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또 폭풍우가 몰아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섬기고 산이든 바다든 고목나무든 해든 달이든 별이든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어려워하고 섬겼던 무지함과 미신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든 별이든 달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보다도 높고 그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둘째로 오늘 본문에 그와는 상반된 하나님의 면모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구절에서 그 크신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매우 인간적이고 하나님을 작게 보이게 만드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다니, 사람 같은 하나님, 그 크신 하나님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면모를 발견하는데 그러나 사실입니다. 성경 저자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한 계명 속에 담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배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젊은 남녀가 질투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질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투가 뜻하는 것은 배타적인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부부가 같이 TV를 볼 때 사모님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저 탤런트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쁘냐고. 그럴 때 남편이 당신이 더 예쁘다고 대답해야지, 만일 글쎄 라고 한다든가 저 탤런트가 더 예쁘다고 말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뭣 하러 질문을 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예쁘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과 예컨대 개미와의 관계와 다릅니다. 사람은 개미보다도 크지요. 그러나 개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개미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인간은 지극히 작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은 사람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실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어요. 모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고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해야 되지만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한다든가 미천한 존재로 멸시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내 자신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되고 내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는 귀한 목적이 있는 것이고 내 인생에는 귀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은 모두가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실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할 수 있었는지 이것은 늘 신학적인 논쟁의 핵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영지주의자 같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이렇게 낮은 사람으로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고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든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있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가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류애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류애는 먼 사랑, 막연한 사랑, 안전한 사랑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굶는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저런, 누군가가 도와야 될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막연한 인류애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까운 사랑이요, 배타적인 사랑이요, 위험한 사랑이에요. 위험하다는 말은 아픔을 수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갈 때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고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므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랑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시는지 그걸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뿐만이 아니고 하나님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격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을 수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도 저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건 지극히 쉬운 일입니다. 

예컨대 책상에 성경책을 올려놓았는데 그 위에 일간지 소설책 · 만화책 · 영수증 이런 것을 올려놓으면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다른 책들을 우선시한다는 그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올려놓으려면 성경책 위에 다른 걸 올려놓으면 안돼요. 

또 주일에 교회 가는 대신에 어디 놀러가는 것. ‘하나님이 얼마든지 이해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니까. 너그러운 분이니까 얼마든지 이해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한 면모만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질투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 놀러가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사람, 마음속에 아직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에요. 

적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놀러가긴 가더라도 별로 재미가 없어야 됩니다. 마음이 편치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놀아야 되나. 내가 이렇게까지 놀 자격이 있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시느냐.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하나님은 초원에도 계시고 바다에도 계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놀러간 사람이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합리화하는 것뿐이지요. 

또 봉사하는 일을 맡아 놓고 펑크 내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사, 대신 누가 때울 수 있지 아니하냐.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많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셨을 때는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이 계단을 내려갈 때 자기 아들딸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것을 즐거워하지요. 손을 잡아줄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계단을 내려갈 때 손을 잡아줄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봉사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한 것뿐만이 아니고 나의 역할, 나의 사명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랑, 하나님의 질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와 정성과 사랑과 나만이 채울 수 있는 믿음의 그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너그럽게 넘어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면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질투하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죄라는 얘기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a thousand generations -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놀랄 노자에요.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잊지 않으시고 천대까지 그것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구절을 알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크고 우리는 이렇게 작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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