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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행복을 누리는가? (계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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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복을 누리는가? (계 1:3-6)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은혜와 평강의 기원은 일곱 교회를 향한 축복이다. 일곱 교회는 딱 7개의 교회란 개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 영적 상태가 다르고 교회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고 권면과 칭찬이 다른 일곱 교회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데 이 일곱 교회는 기독교 2,000년간에 나타난 수많은 교회의 일곱 유형이다. 앞으로 나타날 어떤 교회라도 다 이 유형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2만개의 교회가 이 일곱 유형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는 기원은 전 우주적 교회를 향한 축복이다.

이 은혜와 평강을 비는 인사의 방법은 사실 바울의 서신들과 똑같은 방법이다.

고전1:3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1:2, 갈1:3, 엡1:2, 빌1:2, 골1:2, 살전1:1, 살후1:2, 딤전1:2, 딤후1:2, 딛1:4, 몬1:3도 마찬가지다. 서신들은 모두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는 문안 인사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바울과 요한이 어떤 관계 속에서 신앙의 소통을 누렸는지는 모르지만 교회에 보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의 인사가 똑같은 정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일단 요한계시록은 교회 문서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돌보기 원하는 목회 문서다. 묵시서이기에 종말론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세상에서 교회의 승리를 보장하는 문서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에게 행복한 영적 생활을 기원하는 것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사랑, 구원, 축복, 상급을 거저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해진다. 마음에 평강, 즉 은혜 받은 결과로 만들어진 마음의 상태가 평강이기에 영혼이 행복에 들어간다. 다윗이 받은 은혜를 보라. 죄를 범하고 침상이 썩도록 회개하는 눈물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용서 받을 자격 없는 다윗을 하나님이 용서해주셨다. 이것을 롬4:7~8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다. 은혜 받은 자는 행복하다. 심판 받을 것을 받지 않고 처벌 당할 것을 처벌 받지 않고 멸망 당할 것을 멸망 당하지 않게 된 은혜는 마음 안팎에 행복이다. 우리는 신앙 생활의 여건이 어떠하든지 이 큰 복, 셀 수 없는 영혼의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계1:9의 말씀처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도 이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삶이 춥고 외롭고 떨려도 이 행복을 누려야 한다. 

그러면 이 행복이 어디로부터 와야 하는가?

물질, 환경, 사람, 명예, 승진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시고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 기댔던 이 세상은 너무도 야박하고 이 세상은 너무나도 무정하고 무자비하다. 시기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되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때 상을 주고 보수를 높여준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무능하고 실력이 떨어지면 외면당하고 쫓겨난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는 딤후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런 한복판 속에서 쉴 수 있을까?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좋은 회사, 좋은 포지션을 가져도 너를 넘어뜨려야 되는 사회에서는 영혼의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돈도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가난한 자가 돈을 벌면 당분간 행복이 주어진다. 

연소득이 8,000달러가 넘어서면 돈도 행복과 무관하다고 한다. 국민일보에 실린 벤 호벤(R. Veenhoven)은 돈과 행복이 분리되는 숫자가 연소득 1만 달러라고 하였다. 경제 성장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 잘 살면 이혼율, 자살율, 성폭행, 살인, 방화, 우울증이 높아진다. 사람의 내면의 정욕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점을 바꾸어야 한다. 삶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행복을 누리는가?

1.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행복해야 한다.

계1: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가 세 가지 시제로 표현되었다. 현재 시제로 지금 계시는 하나님이다. 인생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곧 봄이 왔는데 벌써 여름이다. 그 여름도 곧 흘러 지나고 입추, 처서도 지났다. 현재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시간표와 다르다. 지금도 계시는 하나님이다. 또 과거 시제로 전에도 계신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모세를 부르실 때, 사무엘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언약을 하셨고 사명을 주셨고 할 일을 예언해 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셔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지만 전에도 계셨던 분으로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분이다. 우리의 시간으로 볼 때 현재가 있고 과거가 있다면 하나님은 오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과거, 현재, 미래를 다 가지신 자존자(自存者)이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으로 역사 속으로 오실 하나님이다. 오늘의 삶의 뒤죽박죽을 끝내고 악의 득세를 심판하며 영혼의 행복을 빼앗긴 인생들을 세우기 위해 오신다. 우리 인생에 대한 본래 창조된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을 고치고 새 것을 만들기 위해 오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와 평화를 주신다. 이 하나님에게 삶을 맡겨라.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한 그대로 “내가 하나님을 찾기까지 인생의 참 안식이 없었나이다.” 하는 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품, 과거, 현재, 미래를 쥐고 계신 자존자, 영존자, 전능자의 품이 아니면 다 헛되다. 아리따운 님의 품도,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의 품도, 세상을 꿰뚫는 만물의 지혜의 품도 주님이 없으면 영혼의 행복을 주지 못한다. 

2. 완전한 성령으로부터 행복해야 한다. (계1:4下)

계1:4下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분이다. 이 일곱 영은 계4:5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으로 나타나고 있고 계5:6 “어린 양 … 일곱 눈”으로 언급되어 있다. 일곱 영은 무엇인가?

대부분 학자들은 완전한 성령으로 이해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는 하나님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슥4:10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했기 때문에 성령이 온 세상을 다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두루 살펴보시는 성령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나의 상처, 나의 아픔, 나의 괴롬 등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도 성령이 두루 다니시며 헤아리시니 위로가 된다.

성령이 어떻게 일하실 것인가? 성령은 위로자, 상담자, 변호사, 조력자로 번역되기에 완전하신 성령이 상처를 싸매신다. 기름을 부으신다. 보혜사 성령이 능력을 더하시고 질서있는 마음, 온유한 마음으로 안내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롬8:26에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라도 대신 도고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위로를 얻는다. 완전한 성령의 일하심으로부터 혼돈과 무질서는 잠잠해지고 지금 당장 은혜와 평화를 맛본다. 참된 영혼의 행복, 이 놀라운 복의 상태가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완전하신 성령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을 기대하라.

3. 부활하셔서 왕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해야 한다. (계1:5)

계1:5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으니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예수께 속한 자들의 부활은 보증하셨다. 

인류의 최대 원수는 죽음이다. 죽음이 주는 허무와 절망, 우울을 어떻게 뛰어넘는가? 그러나 예수는 인류의 최고 원수와 싸워 승리하셨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독, 죄를 다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불안과 수치,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러므로 해방 받은 우리의 삶의 평강, 영혼의 행복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온다. 

예수는 이 당의 임금들에게도 지배자가 되신다. 만주의 주,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주님이시다. 따라서 그 예수와 함께 있는 자들은 이긴다는 것이다. 계17:1~12에서 음녀와 짐승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왕되신 예수님, 주되신 주님이 참된 행복을 줄 수 있다. 그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사 피를 흘려주셨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나를 그냥 둘 수 없으시다. 나를 새로운 존재로 세우신다. 

죄에서 자유케 해방하신 주님은 계1:5~6을 보라.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젠 하나님의 나라의 권속이다. 의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다. 그리고 제사장 신분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주를 모르는 이에게 연결자가 되게 세우셨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진정한 삶의 만족과 행복은 이것을 확신할 때 거저 들어온다. 나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해진다. 

요한은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누리게 될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상투적 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행복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며 축도할 때 고후13:13의 말씀을 가지고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축도는 성도가 반드시 누려야 할 권리이므로 쉼없이 기원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라. 예수님 때문에 평안하라. 성령님 때문에 위로가 있으라. 삼위일체 하나님 때문에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 행복이 있으라.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다.

관계를 점검하라.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하나이고 성령이 성자와 하나이듯 우리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가? 관계를 회복하라. 그 분께로 가까이 나아가려할 때 행복이 공급된다. 은혜와 평강이 강물처럼 흐르는 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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