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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긍심 (욥 6:1-7, 갈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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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긍심 (욥 6:1-7, 갈 6:9-10)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고난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다 크고 작은 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만 왜 어려우냐 하고 반문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고난의 짐이 있습니다. 자식의 짐, 가난의 짐, 질병의 짐 등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오늘은 독고의 짐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홀로 살아가다가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축하 받으며 태어나야 하고 죽을 때는 전송 받으면 가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 외롭게 살다가 죽을 때에도 혼자 외로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찾아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크고 작은 짐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멍에를 벗겨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본문은 욥의 탄식입니다. 욥은 너무 무거운 시련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견디다 못해 한탄을 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보며 고난을 저울에 달아볼 수만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1). 오늘은 욥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의인

욥 하면 먼저 세 가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욥은 의인이었고 부자였고 모진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욥의 의는 빛이 났습니다. 그의 10자매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저녁이면 욥은 그 열 남매를 위하여 정결의식을 행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는 또 부자였습니다. 부자가 의롭기가 어렵습니다. 욥은 철학이 있는 부를 이루었습니다. 욥은 부하면서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자랑하십니다.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이같이 의로운 자가 없느니라”(1:8). 

하나님은 욥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십니다. 다윗에게는 “내 마음에 합한 자”(행 13:22)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에게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 6:9)고 하셨습니다. 욥에게는 “이같이 의로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말씀하실 때 흥분하셨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극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한 사람 한 사람 평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욥을 말씀하실 때 흥분하시고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사탄이 그 칭찬을 듣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럴까,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니 그렇지 아니하면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갖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험해 볼까 하고 시도합니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뺏었습니다. 10남매를 하루아침에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과 건강을 빼앗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가 가출해 버렸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총체적인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도 옵니다. 

태풍이, 홍수가, 화재가, 가뭄이, 지진이, 녹조가, 적조가 세상을 뒤덮습니다. 생명체들이 다 죽습니다. 물고기들이 죽어 물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모습은 재앙입니다. 인간계에도 옵니다. 전쟁이, 고난이, 아픔이, 실패가, 질병이, 죽음이 옵니다. 지진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재앙입니다. 신앙인에게도 옵니다. 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욥에게도 그런 시련이 왔습니다. 무차별적으로 고난이 왔습니다.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때 욥의 모습을 보면 그 고난이 얼마나 위급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겉옷을 찢었습니다(1:20). 당시 사람들은 극도의 슬픔을 당했을 때 옷을 찢었습니다. 한국사람 같았으면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1:20). 고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머리털과 수염입니다. 극도의 슬픔 시 표현 방법으로 수염을 자르고 머리털을 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에 앉았습니다(2:8). 히브리인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재를 뒤집어썼다고 했습니다. 

여기 재는 히브리어로 “헤페르” 입니다. “똥더미”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불태운 재를 뒤집어썼다고 합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욥은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왜 태어나서 이런 고난을 보는가.” “내 영혼이 아프다”(7:11,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 “나에게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 있다“(3:26)고 한탄하였습니다. 킬 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때 찾아오는 단계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희망과 소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이나 소망을 상실하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고전 13:13)이 최고라고 말씀합니다. 

탈진 

욥은 결국 탈진합니다. 욥의 탈진은 고난의 과중함에서 왔습니다. 모세는 업무의 과중함에서 탈진하였고 엘리야는 승리감에 도취했다가 허를 찔림으로 허둥지둥 도망갔고 예레미야는 사역의 한계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이 너무 과중해서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욥을 힘겹게 한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구들의 몰이해입니다.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왔다가 욥에게 “이것은 죄 때문이다, 회개하라”고 윽박지른 바람에 욥이 탈진합니다. 

물론 고난은 죄 때문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당한 사람에게 고난을 가중시키는 행위입니다. 위로하러 가서 말조심해야 합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는 찾아가서 너무 쉽게 “용서하라”는 말 한마디를 그것도 실실 웃으며 사과하는 행위는 상대방 마음에 큰 대못을 박는 격입니다.

엊그제 병원심방을 하였습니다. 환자들은 한결같이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흔히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병상은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입니다. 자신을 점검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을 살펴보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편안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찾아가서 죄가 많아서 그러니 회개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상담 차 찾아왔습니다. 내가 한 가지 죄를 지었는데 눈물로 이미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 방송설교를 들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죗값을 물으신다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설교자에게 전화를 해서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니 “사실”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내 아이가 지금 아픈데 그때문인가요”하고 물으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죗값을 다 찾겠다면 누가 그 앞에서 온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가볍게 쉽게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던 친구들은 너무 가볍고 쉽게 곤란에 처한 욥에게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회개하라, 죄 때문이 아니면 왜 이 고난이 왔겠느냐” 그러니까 욥은 지금 지고 있는 짐이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너무 고난의 규모가 컸습니다. 하루아침에 10남매를 잃었습니다. 전재산을 잃었습니다. 몸에 부스러기가 돋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2:7-8)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탄합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혔고 내 피부는 굳어져 터지는구나.”(7:5). 권투경기를 보면 쉴 사이 없이 펀치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러면 KO 되는 것입니다. 병원 심방을 가 보았더니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안 좋아 호흡이 곤란하였습니다. 

신장이 안 좋아 일주일에 두 번씩 투석해야 했습니다. 고관절이 부서져 버려 일어설 수가 없어 누워 살아야 합니다. 너무 짐이 무거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너무 짐이 무거우면 쉽게 지칩니다. 쉽게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또 욥의 고난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앞이 막막하고 캄캄합니다. 잠깐 고난이면 감당하겠는데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 상식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그 상식 시간 내에 터널을 빠져나가면 문제가 안 됩니다. 상식 시간보다 길어지면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식 시간보다 훨씬 더 길어지면 더 불안해 집니다. 언뜻 대구지하철 참사가 떠오르게 됩니다. 욥이 고난이 크기도 했지만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쳤습니다. 고난이 길면 다 실패하게 됩니다. 순교자는 빨리 죽여주면 순교하게 됩니다. 순교자는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교하면 영웅이 될까 봐 쉽게 순교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오래 지루하게 끌고 갑니다. 지쳐서 항복하게 만듭니다. 순교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 끌기입니다. 욥이 생각할 때 고난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어두울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욥을 힘들게 한 것은 오늘의 고난에 대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0남매가 하루아침에 죽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도적질 당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건강을 잃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이렇게 큰 재앙을 당할 만큼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리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유를 모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힘듭니다. 끝을 모릅니다. 마라톤선수가 목적지를 아니까 뛰는 것이지 없어 보십시오. 

어떻게 뛰어 가겠습니까. 욥이 그러니까 더 답답하고 고난이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탄하기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잉태하였다고 즐거워하던 날 죽었더라면”, “그 밤에 내가 배지 아니했더라면” 하고 한탄한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한탄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엄살떨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신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프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것만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당장 면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하십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고 호소도 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진가 

그래도 욥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 입니다. 그는 회복을 기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그때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노라”(29:1). 결국에는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소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또 하나는 욥은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 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 그 말은 내가 죽어서라도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끝까지 순종합니다. 

10남매를 잃었습니다.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으실지니이다”(1:21). 욥은 “하나님께 입술로 죄짓지 않았다”(2:10)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견지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순종은 하나님 뜻에 순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순종이 신앙의 큰 요소입니다. 이 순종은 얻었을 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수지맞고 형통할 때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순종은 잃었을 때, 손해 보았을 때, 고난 받았을 때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송 중에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 없으시고“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 안 미친 곳 하나 없네.” 작사 내용을 보면 작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도 실망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닙니다. 한 번도 실망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작사자의 어린 딸이 어느 날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사망합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시다고 고백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승복한 때문이고 순종한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이 일이 슬픈 일이고 불행한 일이지만 좀 깊이 들여다보면 깊으신 경륜을 가지신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깊은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승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이렇게 신비한 생활입니다. 

사탄이 이 같은 욥의 순종의 모습을 보고 손을 들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욥을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욥을 향하여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욥이 잃었던 10남매를 다시 주십니다. 더 많은 재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건강을 회복시키십니다. 욥이 이 고난을 70세경에 겪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은 욥의 인생을 170년 더 살게 하셔서 모두 240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욥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 두 가지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잘 합니다. 그러면 사고가 없습니까. 남들의 잘못으로도 얼마든지 불행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의인도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정론(Theodicy)입니다. 이 세상은 악인들이 뻔뻔스럽게 살아갑니다. 악인들은 더 건강하고 풍부하고 잘되고 형통하고 성공도 합니다. 의인은 도리어 헐벗고 압제 당하며 손해보고 실패하기도 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의 모순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라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하여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이런 현실 때문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 세상은 잠시 동안 악이 득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힘에 겨워 지쳐 있습니까.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갈 6: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욥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욥의 승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 모두의 승리였습니다. 욥의 해피엔딩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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