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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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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며칠 전에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이 설교에 대해서 강의를 하실 때 꼭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설교자들이 정성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정작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 본문 그 자체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명설교자라고 해도, 그 사람의 설교를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설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바로 이 성경 말씀 본문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설교의 내용하고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성경 본문 바로 그 자체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성경 말씀은 시42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유심히 보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시42편의 말씀과 시43편의 말씀은 굉장히 비슷합니다. 

시42:5, 11절에서 반복되고 있는 후렴구가 시43:5절에서도 똑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시42편과 43편은 같은 한 편의 시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시42편과 43편은 다른 시로 구분해 놓긴 했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는 한 편의 같은 시로 봐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봉독은 시42:1-5절까지만 했지만,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눌 때는 42편과 43편을 모두 함께 보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책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에는 모두 150편의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편을 접할 때,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하나가 있는데, 시편에 실려 있는 말씀들은 시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가장 마지막으로 시를 읽어보신 적이 언제이신가요?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먼 옛날은 아니시겠지요? 어쩌면 시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가볍게 접할 수 있는 형식의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왠지 시를 본다고 하면, 햇살이 잘 드는 테라스에 앉아서, 아니면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유리창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 손에는 우아하게 에스포레소 커피 한 잔을 들고, 한 손에는 시집을 들고, 깊은 사색에 잠겨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하고는 영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하지만 시편에 있는 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에 있는 시들은 우리들의 일상적이고 척박한 삶의 자리 속에서 기록된 시들입니다. 어떤 시는 거친 광야 가운데서, 어떤 시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의 순간 속에서, 또 어떤 시는 질병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또 어떤 시는 영적인 갈급함과 목마름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시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모습들이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을 보면 이 말씀들이 시라는 느낌이 사실 잘 안 납니다. 문자 배열이 전혀 시처럼 배열되어 있지 않아서, 시라는 느낌을 잘 안나고, 그래서 시편 말씀이 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까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성경 본문 자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렇다면 성경 본문이 원래 시라면, 이 말씀을 우리가 시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개역 개정 성경으로는 시의 느낌이 잘 안 나는데,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을 정말 시처럼, 시의 모습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시42-43편 말씀 전체를 표준새번역으로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에 있는 화면을 보시면서, 제가 한 연을 읽으면, 여러분들이 다음 연을 읽고,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마치 시를 낭독하는 듯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떠셨습니까? 말씀이 조금 더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습니까? 시편 말씀이 이토록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구나 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42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말씀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이 시편의 저자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었길래, 이토록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건가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시편의 저자는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바닥까지 핥으면서 간절하게 물을 찾는 것처럼, 그런 갈급함과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내면의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명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생명수를 발견하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3절 말씀을 시편 저자는 종일토록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사람들의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 조롱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할 만큼 하루 종일 눈물을 쏟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줄 맑은 시냇물과 같은, 생명수와 같은 물을 찾아 헤맸는데, 그가 얻을 수 있는 물은 그저 눈물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고, 눈물만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 원했던 것은 내 마음의 갈증을 적셔줄 맑은 시냇물이었는데, 하나님께 그에게 주신 것은 거대한 폭포와 깊은 바다의 물결입니다. 그 큰 물결이 밀려오면서, 이 사람을 온통 휩쓸고 지나가버렸습니다.
    
큰 물이 폭포수처럼 밀려와서 땅을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홍수가 나는 겁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쓸려가 버리고, 폐허만이 남을 뿐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맑은 시냇물을 구했지만 그가 찾을 수 있는 물은 그저 눈물이었을 뿐이고, 폭포수처럼 큰 물이 밀려와 온통 휩쓸고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폐허 밖에 없고,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리는 상황 속에 놓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절망의 끝자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를 둘러싼 원수의 손길이 그를 압제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적들이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이 그를 비방하고 있고, 대체 네가 그토록 자랑하는 너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인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갈망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것, 원수가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조롱해도 아무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 지금 시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왜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나의 원수들이 ‘너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데, 저는 거기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시인은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이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침묵은 이 시를 쓴 시인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동일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없는 침묵 앞에서 영혼의 갈급함과 간절함으로 고통스러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토록 힘든데, 지금 제가 이토록 괴로운데, 왜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시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걸까? 우리도 그 이유를 몰라서 괴로워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성경을 보면 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지 우리에게 몇 가지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사59: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귀가 어두워서 우리의 탄식을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통로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우리가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하여도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혀 있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마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면, 가장 먼저 우리 안에 어떤 죄가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들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그 죄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의 보혈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안에 아무런 죄를 발견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 같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욥은 온갖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고,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건강마저 잃고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과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냐, 어서 하나님께 회개하라라고 하면서 욥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욥은 나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죄악되게 행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하나님은 욥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1~2장에서는 욥이 어떤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3장부터 본격적으로 욥과 그의 세 친구들과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욥3장부터 시작해서 욥37장에 이를 때까지 욥은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하나님은 한 마디도 욥에게 대답하지 않으면서 그저 침묵하고만 계셨습니다.
    
욥은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고만 계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욥에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욥38장부터 하나님이 다시 등장하시는데, 이 때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고난을 당한 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시지를 않습니다. 뜬금없이 욥이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세상의 이치들에 대해서 물어보시면서, 네가 이런 것들을 다 알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만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만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뜻에 순종하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욥이 그 고난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도 가만히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특별한 깨우침을 주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계신 분이 혹시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이 침묵을 통해서 내게 깨우쳐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세 번째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침묵하시곤 합니다. 성경을 보면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경우가 두 차례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때였고, 다른 한 번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가 등장한 이후로,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의 약 400여년 동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그들이 그토록 괴로움 가운데 신음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약 400여년 동안 유대 민족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른 민족들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괴로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 동안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드디어 끝났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이 마쳤을 때는 모세가 등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신구약 중간 시대가 마치게 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온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때를 앞두고 침묵하시곤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는, 우리에게 더욱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시기 위한 잠깐 동안의 유예 기간일 뿐입니다. 그 침묵의 때가 끝나면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은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서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 침묵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부어주실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끝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시간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침묵의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오늘 시편의 저자는 그 침묵의 때를 보내는 가장 좋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42편과 43편에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42:5, 11절에 나오고, 또 43: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42:5절 말씀으로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낙심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왜 너는 이토록 불안해 하고 있느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 나는 오히려 하나님께 소망을 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을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인을 도와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안 도와주신 것입니까?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라는 이 말이 이미 도와주셨다는 것인지, 아직 안 도와주셨다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아까 우리가 함께 읽어봤던 표준새번역을 보면, 이 말씀을 조금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라는 표현 자체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만 고백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신다”라는 구체적인 정황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그의 얼굴의 구원으로 인해서”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신다”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는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셨다라는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주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시인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신 건지, 도와주시지 않은 것지 확실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시인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고, 목마름과 갈급함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의 주위에는 원수와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고, 그들은 여전히 시인을 향해서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들기로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그의 소망을 옮깁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 안에 있는 영적인 갈급함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시냇물이 아니라 눈물과 폭포수 같은 거친 물살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침묵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고 갈급하게 하나님을 찾지만, 내 안에 있는 죄악들을 하나하나 찾아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를 향해서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조롱의 말을 던질 때에, 우리는 그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질문 앞에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나의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서, 침묵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 힘을 얻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 위에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대결을 벌여서 그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승리 직후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다는 소식이 왕비 이세벨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불 같이 화를 내면서 엘리야를 찾아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겁을 집어 먹고 도망쳐 버립니다. 이 때 엘리야의 모습은 바로 조금 전에 위대한 승리를 거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엘리야는 광야 한 가운데까지 도망쳐서 로뎀나무 밑에 앉아서 차라리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하기까지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를 호렙산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곳에서도 엘리야는 여전히 차라리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두어 가달라고 하면서 여전히 겁에 질린 채로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엘리야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호렙 산 위에 임하여 그곳을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가장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데 그 가운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는 커다란 지진이 일어납니다. 땅이 흔들리고, 거대한 산이 요동을 치는데도, 그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무런 말씀없이 침묵하십니다. 지진이 끝나자 이번에는 불이 나옵니다. 온 세상을 삼켜 버릴 정도로 거대한 불길이 호렙산을 스쳐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나도, 온 세상이 뒤흔들리고, 천지가 부서져 내릴 것 같은데도,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이 가만히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 다음에, 그 때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세미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소리였습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바람과 지진과 불에 비하면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작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하셔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었다고 하시면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어려움이 몰아닥치고, 마치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에, 그 때 대체 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한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대체 언제까지 침묵하시고, 언제까지 나의 이 갈급함과 답답함을 모른 척 하시겠습니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이 세상의 소리가 너무 크고 요란스러워서 단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새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답답함과 목마름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찾은 것은 시냇물이지만, 그러나 내게 주어지는 것은 눈물 밖에는 없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소망을 두고 기다려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침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게 되는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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