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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모습 (계 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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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모습 (계 1:12-20)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은 장기려 박사는 의료 기술로 사람을 도왔다. 그의 인품에 반한 친구 지인들은 홀로 사는 그를 도우려 멋진 여인네들은 중매를 섰다. 그러나 그는 결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북한에 있는 아내를 사모하며 지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려 하는가? 주님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때에도 주님을 그리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주님을 보았다. 주님을 자랑하고 전한 증인의 죄목 때문에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된 그는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주님을 본 본문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귀한 예수님의 묘사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에 대한 묘사가 있다. 제자들 있는 곳에 나타난 주님은 요20:22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또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고전15:6~8에서 부활의 주님이 바울을 포함해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허나 주님의 세밀한 묘사가 없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분명히 보았다.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기록하게 된 주님의 이야기가 있다. 어디에서 이런 귀한 내 주님의 모습을 본 것인가? 

마틴 루터는 요한의 계시록이 상징과 환상, 생소한 언어들이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는 책이라고 혹평했지만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잘 모르는 것이다. 오늘 본문 계1:12~20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신약 27권 중에 가장 압권으로 기록된 주님의 자기 계시 장면이다. 주님은 어떤 모습인가?  

1. 교회를 지키시는 주님이다. (계1:13)

요한은 자기 귀에 들려진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 일곱 금 촛대를 보았다. 그런데 계1:13을 보면 예수님이 촛대 사이에 계심을 보았다. 여기 촛대 사이란 계2:20을 보면 일곱 교회 사이란 말이다. 촛대는 교회라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신 위치는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를 누가 넘본다 할지라도 교회 곁에 교회를 붙들고 있는 분이 주님이다. 주님이 사탄을 이겼으므로 음부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교회를 지키는 이는 경찰이나 용역업체 직원이 아니다. 교회를 지키는 이는 주님이시다. 다만 주님이 교회를 지키지 않고 내버릴 수도 있다.

계2:5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기는 교회란 주님이 버려둔다는 의미다. 교회가 회개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자 한다면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주님만 머리로 모시려 한다면 주님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교회를 지키신다. 주님이 교회를 버리실 리가 없다. 
  

2. 교회를 세밀하게 돌보시는 이는 주님이시다. (계1:13~16)

계1:13~16을 보면 주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 주님의 모습은 인자같은 이시다. 문법적으로 관사가 없기에 어떤 특정한 인물 모습이 아니고 사람 같은 존재, 사람 같은 인격적 존재를 보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같은 존재다. 7가지의 주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7가지는 아래와 같다.  

① 계1:13 발에 끌리는 옷의 모습이다.

발에 끌리는 옷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다.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죄인과 하나님의 사이를 중보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 금띠는 위엄과 영광의 상징으로 예수가 만왕의 왕이라는 것이다. 재림 예수, 다시 오실 예수의 사람 같은 모습은 왕이신 주님이시다.
  

② 그 주님의 머리 모습은 특이해서 계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라고 하였다. 

이는 요한의 눈에 보여진 주님의 깨끗하심, 죄 없으시고 성결하신 것을 뜻한다.
  

③ 주님의 눈과 발은 이렇다. 계1:14~15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주님의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살피시는 눈이기에 감출 수 없다. 정확히 말해 꿰뚫어보시는 주님이기에 주님은 심판주로 선다. 그의 발이 단련한 빛난 주석이라는 것은 발로 밟아 깨뜨려버리는 심판의 발, 엄위하신 심판의 주님임을 말하는 것이다. 
  

④ 계1:15 음성이 맑은 물소리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그의 소리는 물로 표현하는 것은 위엄있는 음성임을 뜻한다.
  

⑤ 계1:16上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잡으신 이다.

오른손은 사용하는 손이다. 주의 교회의 사자들, 목사들을 힘있게 붙잡아 사용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⑥ 계1:16中 입에서 좌우의 날선 검이 있다.

히4:12을 보면 말씀은 검이라고 하였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주님을 말해준다.
  

⑦ 계1:16下 얼굴은 해같이 빛나는 모습이다.

생명력이 넘치는 주님, 모든 만물 앞에 삶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 주목 받고 숨김이 없으신 주님의 밝은 인격을 보여준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표현할 수 없는 주님,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세세하고 정확하다. 그런데 주님의 일곱 가지 모습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나타난다. 

에베소 교회는 계2:1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으로, 서머나 교회는 계2:8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버가모 교회는 계2:12에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두아디라 교회는 계2:18에서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이로, 사데 교회는 계3:1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계3:7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3:1에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이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다르게 나타난 주님이 모습이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주님의 일곱 가지 모습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다른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의 상황과 그 교회의 영적 수준과 그 교회의 고통과 경험, 입장에 맞추어서 주님의 모습 중의 한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교회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교회를 세밀하게 돌보시는 주님인 것이다. 귀중한 교회, 이 교회가 모두 다 이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기에 주님이 자신의 모습 중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에 나타나는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 세밀하게 교회를 알고 있고 세밀하게 교회를 돌보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어떤 유혹이 있더라고 어떤 도전이 있고 시험이 있더라도 요동하거나 자신 없는 신앙 생활을 하지 말자. 주님은 분명히 교회를 아주 자세히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완전하시다.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충성과 증인됨에 있어서 주님은 완전하시다. 완전한 사랑으로, 완전한 겸손으로, 완전한 지혜로 교회와 나를 돌보시는데 주저하며 패잔병처럼 지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주님은 다 아신다. 익히 교회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셔서 거기에 맞게 돌보시는 세밀하신 분이시다.
  

3. 교회를 위해 할 일을 주시는 주님이다. (계1:17~20)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볼 수 없었던 주님의 용모를 보았다. 그 해처럼 빛나는 것 같은 얼굴을 볼 때에 요한은 죽은 자처럼 엎드렸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살아있는 분이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셨다. 그리고 계1:19에서 할 일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은 본 것인 과거사, 지금인 현재사, 장차 될 일인 미래사를 기록하라는 사명을 맡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 것은 1장이고, 지금 있는 일은 2~3장이며, 장차 될 일은 4~19장까지라고 구분하지만 그렇게 볼 수 없다. 1장에도 세 가지 시제, 2~3장에도 현재와 미래가 다 섞여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이 만난 주님은 교회를 위해 할 일을 주신 주님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 할 일을 요청하셨다. “가서 제사 삼으라.”, “소금과 빛이 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성령을 받으라.” 모두 다 동적이다. 행동적이다. 실천적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에게는 계시를 듣고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신다. 책상에 앉아 정적으로 일하는 것도 사명이다. 기록하는 것도 사명이다. 하박국도 합2:2에서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으니 주님은 교회를 위해 할 일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하는 일이 다 달라도 무릎 꿇는 일이 있고 전도하는 할 일이 있고 헌금을 드리는 물질 섬김의 일도 있고 주님이 다양하게 일을 맡기신다. 

교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할 일이 없다고 빈둥대는 사람도,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일하겠지’하며 핑계대고 뒤에 쳐져 있는 사람들은 변해야 한다. 사실 어느 날 많은 이들이 변한다. 성령의 감동이나 음성이 들리면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기에 교회를 위해 할 일을 결단하게 된다.   

신약 성서 어느 복음서, 어느 서신 속에도 나오지 않는 이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돌보며 교회를 위해 할 일을 맡기는 주님을 믿고 나아가기를 결심하자. 나는 주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이 기도하는 내 의자 옆에 앉아 계신다는 강력한 느낌, 임재 의식을 받았다. 나는 내 몸을 그 분께 기울여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이 옆에 계시고 그의 숨결을 느낀 것 같은 그 임재 의식 속으로도 나는 주님의 종이다. 그 감격으로 일어설 수 있었는데 요한처럼 우리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신앙의 새로운 전환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는가? 주님을 그리며 주님을 만나려 하며 주님을 기대하자. 

찬송가 87장을 지은 H. Barraclough는 주님을 사모하는 작사를 하였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 보았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우리는 계1:12~20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본다. 요한이 전해 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진다. 믿음으로 손을 내밀 때 그 옷자락에 아니 그 주석 같은 발 앞에 엎드러진다. 거룩하게, 바르게, 의롭게 바로 산다는 다짐으로 사랑으로 용서하며 긍휼을 가지고 산다는 마음으로 일어서게 된다. 주님의 모습을 느끼기만 해도 속일 수 없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주님의 모습을 믿으라. 달라진 크리스챤으로 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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