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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행 2: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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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행 2:36-39) 
 
지난 주까지의 질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이셨다면 오늘 이 질문은 사람들의 질문이다.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 오셔서 구약의 요엘과 다윗을 비롯한 선지자들의 글이 다 인용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 지시고 죽으시고 장례 되어 사흘 동안을 무덤에 계셨다가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뿐 아니라 성령을 보내 주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모여든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바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천하 각지로부터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더 이상 과거 율법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증거와 함께 선포된 결론의 말씀이다. 

모두가 복음을 듣고 이렇게 탄식의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예루살렘에까지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고백은 순수한 마음과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한 물음일 것이다.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질문으로 영생이 관련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책임과 의무를 책망 받은 사람들에게 되묻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이런 안타까움을 고백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 각자가 말씀을 들으면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천하각지로부터 예루살렘에 모여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부드럽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앞에서 ‘주님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라는 우리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의 생명을 나눌 수 있는 … 


Ⅰ. 먼저 복음의 선포가 있었다.(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러한 복음의 선언은 뒤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5:30~31)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10:39~41) 

이것은 일찍이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사역이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복음의 선포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예수라는 선지자가 훌륭하다고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인가?’ 라는 트집을 잡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 하신 것처럼 인류 구원이 한민족에게서 가 아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약속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도 이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①믿음의 사람들이 확실히 알아야 할 분명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아니 죄를 가지고 절망으로 가야만 하는 온 인류가 알아야 할 내용이다. 

②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복음을 듣는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를 위해 그가 죽인 것이다. 

③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한다.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구원에 대상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 

에덴에서 쫓겨난 죄인 된 모든 사람이 참으로 알아야 할 복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고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당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역시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 각자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Ⅱ. 복음에 합당한 고백적 질문이다.(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①찔림이 있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래도 순수하고 부드러운 마음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세상에서 굴리고 달아진 이미 가죽같이 거칠고 굳어진 마음은 영적인 충격에도 찔림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 입장에서 대단히 순수한 마음 밭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다. 

또 찔림의 안타까운 모습도 누가는 우리에게 이 사도행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진리의 말씀을 전해 듣고 수용이 안되어 이를 가는 모습은 어두움의 사람들에게나 있을 모습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2) 

②삶의 방향을 물었다. 흩어진 각국에서 나름대로 회당이나 모임 속에서 [랍비] 라 칭함을 받는 이들도 있었을 것임에도 이제는 영적인 삶에 대해서는 자신의 방법이 옳지 못함을 인식하고 묻고 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③우리가 어찌할꼬? 제자들에게 “형제들아!” 라는 호칭 자체가 부드럽고 순수한 표현이다.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처럼 인간적으로 사도들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사도님들!, 거룩한 이들이여!” 라고 표현하지 않고 동족이요 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자세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신앙의 바른 자세라고 본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물음은 에덴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절망의 고백이고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탄식이고 영원을 향한 인간의 유일한 소망의 고백이다. 

이 물음은 죽음을 각오한 부르짖음이었고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물었던 질문과 같다. ≒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16: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22:10f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Ⅲ. 합당한 응답과 그에 대한 약속이다.(38~39)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우리에게 성경은 “신령과 진정”을 당부한다. 사실 이 둘이 함께 하지 않은 종교행위는 사람의 감정이나 이성은 몰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실 수 없다. 신령은 보이지 않는 내적인 요구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룩한 명령과 성령이라면 진정은 그것을 보이는 현실 속에서 채우는 외형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실 이 둘 중 하나에 편중될 위험성이 늘 있다. 신령에만 치중할 위험성과 진정에 치우칠 위험성은 늘 있다. 외관상으로만 충족시키려 한다면 진정에 치우쳐 말씀과 신령한 부분을 채우지 못할 위험성이 크고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내적인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경건주의운동과 같은 결과 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 한다면 내용적인 내면과 겉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가 다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용과 보이는 사실이 신앙에 있어서는 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믿음의 양면이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예배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반드시 충족 되어져야 한다. 

본문의 내용에 있어서 세례를 가지고 말한다면 반드시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는 절차가 없다면 태평양과 같은 깊은 바다에 골백번을 들어갔다 나와도 가치가 없고 반대로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는 절차를 다 거쳐도 물속에 장사되고 다시 올라오는 외형적인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은 ‘물 속에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곧잘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과소 평가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지적하신 사실의 부분, 진정의 부분을 간과하는 잘 못을 범하는 것이다. 

답변은 묻는 자에게 주어진다. 복음을 듣고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①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원리를 증거한다.(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부부 따로 자녀와 부모가 모두 각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②이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을 소개한다.(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온 인류는 에덴에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그리고 지구촌 구석구석의 모든 사람 각각이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역사를 들어야만 한다. 

부드러운 심령으로 듣고 오순절 예루살렘의 사람들처럼 물음으로 고백해야만 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 

거기의 답변도 역시 다를 수 없는 하나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여기에 대한 온 삶으로의 순종이 이 귀한 주님의 약속을 자신에게 유효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고백으로 주님의 희생의 떡과 잔에 나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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