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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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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 교회 출신 강대현 선교사의 사역지인 미얀마에 다녀왔습니다. 미얀마는 6.25 동란 때 우리나라에 유엔군을 파병해 준 고마운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얀마는 골수 불교 나라여서, 세계 여러 불교 국가 신도들이 순례를 올 정도라고 합니다. 양곤 시내의 인구가 450만 명이라고 하는데, 장차 승려가 되겠다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8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강선교사는 그 동안 10개의 교회를 개척해서 여섯 교회는 미얀마 교회로 소속시키고, 현재는 4교회와(사진), 선교원, 그리고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사진) 강선교사의 두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모두 미국 유학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미얀마는 북한과 더불어 폐쇄적인 나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개방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저 불교 국가인 미얀마가 선교사님들의 사역으로 복음화 될 수 있도록 잊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성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나님을 찬미한, 영원한 성도의 목자 송을 음미하면서,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와 같은 제목들로 말씀을 증거 했는데, 돌이켜 그러한 제목들만을 생각해 보아도, 설교자 자신이 은혜가 새롭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을 통해서 공급하시는 꼴을 먹으면서, 여름 목장을 지나 이제 가을 목장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제까지 그토록 선하고 어지신 목자 하나님께 대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시편 23편을 마무리 짓는 설교를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한 다윗의 노래가,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향한 다윗의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신뢰가, 우리의 신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황혼녘에도 시들 줄 모르는 끝없이 푸른 다윗의 소망이,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한 말씀을 살피고자 하는데, 저는 이 구절 말씀이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택하는데 많은 고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라고 제목을 정하긴 했지만, 그 앞에 있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는 말씀도 너무나 은혜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속하는 품성입니다. 

교의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선’을 이렇게 분류하기도 합니다. 1)하나님의 자선-이것은 일반 생물에 관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모든 생물을 관후, 인자하게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뜻합니다. 시 145:15-16에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사랑-이것은 이성적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3)하나님의 은혜-이것은 청구권이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주시는, 곧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인 행복을 의미합니다. 4)하나님의 긍휼-이것은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고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을 말합니다. 5)하나님의 인내-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말합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 회개할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에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갈 때, 순간순간 하나님의 자비의 대문을 노크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최대의 지혜임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고, 한 시간도 살 수 없고,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이를테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해 받음이 없게 해주시고, 지팡이와 막대기, 곧 사랑과 공의로 인도해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발라, 잔이 넘치듯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었는데,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데서 나온 확신에 가득 찬 그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확신에 가득 찬 다윗의 신앙고백을 더 깊게 분석해 볼까요? 1)하나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 각양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선의 원천 되시고 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시냇물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공급하심, 인도하심, 양육하심, 보호하심, 이 모든 것이 선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시냇물인 것입니다. 2)하나님의 선이 전달되는 방법은 불가항력적이다-하나님의 은혜도 미련하고 우둔한 인생에게 맡기면 거절하기가 쉽습니다.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미련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련하고 분별력 없는 선택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선물은 최고로 복되고 좋은 선물이므로, 거절할 수 없도록 강권하여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하나님의 선의 지속이다-하나님의 선하심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는 말씀처럼, 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영원부터 영원까지 지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4)하나님의 선의 불변이다-‘나의 평생에’ 라는 말씀처럼, 어둔 밤이 지나면 반드시 새 날이 오듯,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애가서 3:23-24에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다.”고 했습니다. 

5)하나님의 선의 확고하심이다-“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은 반드시 우리 평생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걸음마를 하는 어린아이의 뒤에는 항상 따스하고 자애로운 엄마의 눈길이 지켜보며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을 볼 때, 기뻐서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손뼉을 치면서 대견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비틀거려 쓰려 지려 할 때에는, 재빨리 좇아가서 붙들어 줍니다. 이것이 어찌 걸음마를 하는 어린아이에게 뿐이겠습니까? 결혼하여 출가한 딸에게도 따뜻한 부모님의 눈길은 떠나지 않고, 항상 뒤따르며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정녕, 반드시 우리의 뒤를 따라와서, 쓰러지려고 할 때에 붙들어주시고, 넘어졌을 때에는 일으켜 주시고, 외로울 때에는 위로해 주시고, 삶에 지쳐 괴로워할 때에는, 새로운 힘과 용기와 소망을 북돋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신앙 편력에,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와서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벌써 넘어져 버리고, 벌써 하나님을 떠나 멀리멀리 죄악 된 길로 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제로 느끼고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들의 생활에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우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모든 일이 형통할 때,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평안할 때에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몸이 병들었을 때 그 때는 무어라 말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고통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볼 때 그 때는 무어라 말할 것입니까? 직장을 잃고 빚에 쪼들릴 때, 나는 그 때 어떻게 반응하게 될 것입니까? 

이와 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아심을 갖게 하는, 일종의 시험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답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애가서 3:3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했고, 32절에는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고 했으며, 시편 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배우나이다.”고 했고, 71절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으며, 롬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구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또한 그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하고,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시고 우리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한 것이라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그 무엇이든지, 우리의 뜻과 성품, 우리의 됨됨이를 잘 아시는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가장 적절하고 최선한 방법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C. S Lewis라는 사람이 쓴 ‘The Problem Of Pain-‘고통의 문제’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말하기를 “안락을 행복으로, 고난을 하나님의 무능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과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단순한 쾌락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고난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이해해야 한다. 쾌락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인격의 형성이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선은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한 우리의 도덕적 개발로 나타난다.”라고 고난에 대하여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시 27:10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고 했으며, 사 49:15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나 제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혹 부모가 우리를 버리고, 남편이 나를 버리고, 아내가 나를 버리고, 자식이, 친구가 우리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강력한 부정문 가운데 한 구절은, 히 13:5절의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한 다윗의 확신은, 그대로 우리의 확신이 되고, 우리의 신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인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자랑스럽고 기쁨에 넘치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이 시편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소망이 가득 찬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결론적인 문장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생각을, 지상의 행복이나 안락에만 두지 아니하고, 그가 정한 목표는 하늘에 고정되어 있으며,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그에게 이 소망이 없었다면, 지금껏 그가 누려온 모든 축복을, 소유한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집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성전 혹은 예배당을 의미한다.

다윗은 성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시 27:4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했고, 시 122:1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했으며, 시 84:1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했고, 10절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에 나아 올 때, 이렇게 사모하고, 기뻐하고, 복된 줄 알고,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가족 집단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에 들고,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떼에 속한, 한 마리의 양이 된 행복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필립 캘러 목사에 의하면, 그가 목장을 처음 경영하던 청년 시절에 있었던,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웃 목장의 주인은 무정하고 게으른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웃 목장의 양들은 항상 부러운 눈으로 자기의 목장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웃 목장의 양들은 초목이 무성한 여름철에도 굶주림으로 고생을 했으며, 옴과 기생충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다리가 너무 야위어서 빈약한 몸마저 지탱이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그 불쌍한 양들의 희망은 울타리를 뚫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 목장의 양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울타리 끝을 돌아서 필립 캘러의 비옥한 목장으로 넘어 들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싱싱하고 푸른 목초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가 포식을 한 양들은 소화 기관에 이상이 생기고, 결국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필립 캘러는 이웃 목장의 양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 손수레에 담아 주인에게 가져갔더니, 무심한 주인은 아무 말도 없이 칼을 뽑아 들고 3 마리 암양들의 목을 베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사탄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웃 목장의 양들은 필립 캘러 목장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필립 캘러는 그 양들을 들여보낸 적이 없고, 그래서 양들은 그의 소유가 되거나, 그의 관리와 보호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의 관리나 보호를 받았더라면, 처음에는 제한된 마른 양식을 공급하고, 점차로 싱싱한 목초를 공급했을 것이며, 그렇게 했으면 양들은 절대로 목숨을 잃은 불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목장의 양들은 마음대로 들어와서 갑자기 포식을 하다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죄악 된 세상은 폐허가 된 목장과 같고, 사탄은 무자비한 주인과 같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영혼이나 행복을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사탄의 포악한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우리’ 곧 하나님의 목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관리와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입니까? 

3)여호와의 집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여호와의 집이라 하는 이유는,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집처럼 위안과 안식을 얻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 뿐이라. 내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라.♪ 여러분 중에는 꽃피고 새우는 집도 없고, 주인의 눈치나 쫓겨날 위험이 없는, 작은 집 한 채도 없이 고생하는 분들도 있지요? 설혹 자기 집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얼마나 많은 문젯거리가 있고, 얼마나 결핍된 것이 많이 있습니까?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도 배신이 있고, 미움과 증오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집, 하늘나라는 어떠한 곳입니까? 거기에는 속임도 없고, 배신도 없고, 미움도, 증오도 없습니다. 가난과 질병이 없고, 한숨과 눈물이 없으며,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니 이별이 없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는 마귀가 없고, 마귀가 없으니 죄도 유혹도 없습니다. 기화요초 만발하고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 그 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는 다시 쫓겨나게 될 위험도 없습니다. 일 년이나, 십 년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 년이 하루 같이 즐거운 그 집에서, 영원히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고 있는 오두막집에 사는 한 가난한 여인이, 빵을 떼고 잔에 냉수를 따르면서 “이 모든 것과 그리고 예수! 아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공동 번역 성경은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로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시편 전체를 정리해 보십시다. 어떤 분은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 되시는 양된 성도의 생활환경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1)양떼의 밑-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2)양떼의 옆-물가가 있어서 시원합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3)양떼의 또 다른 옆-목자 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4)양떼의 앞-진수성찬과 같은 상이 놓여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말씀의 상과, 영생을 얻게 하는 성찬의 떡과 잔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양떼의 위-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 위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양떼의 뒤-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에, 정녕, 반드시 따라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7)양떼의 장래-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양떼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여호와의 집,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도 선하고 좋으신 목자와, 그 목자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시고 감독자가 되시는 주님을 일평생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한 다윗의 확신과 소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위에 사는 동안 주님의 전, 주님의 교회, 주님의 목장, 주님의 양떼, 주님의 가족 중에 거하다가, 장차 위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시기를, 우리의 참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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