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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합시다 (살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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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합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 

     교회사를 살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는 날자를 예언했던 일들이 수없이 있어왔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경우를 비롯해서, 중세시대, 그리고 최근의 경우까지 대부분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의해서 아버지만이 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주장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비복음적인 주장들은 모두 불발로 끝나면서, 세상에 좋지 않은 인식을 주었고, 그결과 그리스도교가 거짓예언을 일삼는 집단으로까지 비춰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이단으로 정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교회의 입장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져서 부지불식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을 하면 무조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예수의 재림을 사모하고 갈망한다고 찬송하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개신교회의 영적인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불신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해져 버리는 경향까지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많은 한국그리스도인 가운데는 “그냥 복음대로 현실에 충실하게 살면 되지, 무슨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두려워하면서, 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이해는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무지한 산물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당신께서 재림하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 날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날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한 자세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날마다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단들의 거짓된 예언들로 말미암아 성경의 진리, 곧 복음까지 거짓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목욕물을 버리다가 목욕통에 있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강림절 절기를 맞아서 본문 데살로나가전서 5:1-11절을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자는 말씀을, 몇 가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데살로니가교인에게 말씀하기를,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그 때와 시기’를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사건으로 이해를 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날이 임박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말한 ‘그 때와 시기’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고, 우주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인 만남이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종말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죽음이란 과정을 통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의지하고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낙원에 이른 자가 경험하는 만남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생각할 때 알 수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고, 모르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아는 것 세 가지는 (1) ‘죽음이란 사람은 누구나 가야하는 길이다.’ 라는 것이고, (2) ‘죽음은 아무도 함께 가줄 수 없는 길이다.’ 라는 것이고, (3)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라는 점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이 모르는 것 세 가지는 (1) 언제 죽을지 때를 모릅니다. (2) 어디서 죽을지도 죽을 장소도 모릅니다. (3) 어떻게 죽을지 죽는 형편도 모릅니다. 맞는 말이니다. 이처럼 해 아래 사는 인생들은 누구나 죽음이 어디에서,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하루를 계획하고, 1년을 계획하고 일생을 계획하며 살아가지만, 사실 그것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 아래 사는 인생은 누구나 한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듯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자주 그런 느낌이 듭니다. 언제 ‘아차’하는 순간이 닥칠지 모릅니다. 잠간 졸았더라면, 조금만 늦었더라면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죽음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 가까운 곳에서 따라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날은 항상 여러분에게 임박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종말에 대해서 준비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지금 종말이 내게 닥친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자세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우주적인 종말의 날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종말 곧 ‘그 때와 시기’란 것도 실은 우주적인 종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적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몇 번이나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전체가 216장인 신약성경에서 무려 318번이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까지 모세(신33:2)와 다윗(시102:16) 그리고 이사야(사 59:20)와 예레미야(렘23:5)와 다니엘(단7:13), 스가랴(슥14:4)와 같은 예언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재림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때의 징조가 이 시대에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재림과 종말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인 (1) 자칭 재림주라는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고, (2) 난리와 소란의 소문들이 있으며 (3)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며, (4)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5) 무서운 일과 하늘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6)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 까지(눅21:8-12)의, 징조가 구체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딤후 3:1-5절에서 바울이 지적한 말세의 징조인,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때’가 바로 지금 이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모든 모습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은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징조가 지금 이 세대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믿음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말세라는 이야기가 쉽게 나오는 형편입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그 때와 시기’가 가까이 왔음을 몸으로 까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예수님 만날 준비에 열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종말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날은 인류 모두에게 이르는 날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맞이하는 종말이 상당히 다를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4-9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사람들도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투구를 씁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종말은, 도적같이 홀연히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도적은 남의 집에 들어갈 때에, 언제 너의 집으로 도적질을 하러 간다고, 경고를 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도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도적같이 임한다는 바울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경고를 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경고를 이미 받았지만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그 날이 임할 때에는 언제나 도적같이 임하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경고 하지 않고, 마지막 날이 닥치면, 그리스도인까지도 마음속으로 오신 주님에 대하여 서운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종말의 날을 설명할 때에, ‘노아의 때’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표현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노아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하는 일을 보고는 비웃었고, 노아가 전하는 말을 듣고는 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정한 날이 되어서, 하늘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그 때가 심판의 때인지는 알지 못하고,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적같이 임한 종말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지금도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는 음성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고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도적 같은 날을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늘의 경고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종말의 날이 바로 심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터뜨려 전쟁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미국은 폭탄을 투하할 도시에다가 경고를 했습니다. 비행기로 한 달 전부터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이 곳에 엄청난 폭탄이 떨어질 것이니 몇 월 며칠까지 이곳을 떠나라”고 계속해서 삐라를 뿌렸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피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원자폭탄은 투하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는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재림의 날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치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날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히로시마 주님은 육체만 멸망했지만, 재림의 날에는 육체와 영혼이 영원히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그 날은 잉태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맞이하는 종말의 날은, 전혀 다른 날입니다. 그 날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아는 날이고, 준비하고 있는 날이고, 소망을 이루는 날입니다. 물론 바울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맞이하기 때문에, 불신자에게는  도적같이 홀연히 오는 날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죄악 된 세상 가운데서 낙을 누리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기에, 그 날이 올 때에 오히려 찬양하며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 그 날은 구원의 날이고, 이 땅의 모든 죄와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얻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온갖 세상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날은 예수님께서 믿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얻는 날(계21:1-2)입니다. 그러니까 그 날은 상급을 받는 날이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 날이고(마25:14-30), 여러분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완전하게 씻어지는 날입니다.(계21:3)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빛의 자녀입니까? 어두움의 자식입니까? 불신앙 때문에 도적같이 그 날을 맞고, 심판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 날을 구원의 날로, 하늘나라 유업을 얻는 날로 만들기를 바라십니까? 이제부터는 과거의 부끄러운 옛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버리고, 빛의 자녀답게,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살아서 그날이 구원의 날이 되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그 날을 준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잔다는 것은, 속된 세상과 어두움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쾌락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근신하라는 것은 재림하는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믿음생활을 성령 안에서 감당하는 균형 잡힌 믿음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도 안되고, 곧 종말이 온다고, 믿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일을 안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6-8절에서 바울은 마치 병사가 전투에 임해 있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군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자세를 파수꾼처럼, 그리고 전투병처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파수꾼이 파수하지 않고 잠을 자는 것은 곧 자멸하는 행위입니다. 전선에서 경계를 서는 초병은 ‘내가 졸면 나 뿐 아니라 전우들의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다!’ 라는 경각심을 가지고, 피곤할지라도 경계 근무에 임해야만 합니다. 이런 초병의 자세가 바로 근신하고 깨어 있는 자세입니다.  

    사단은 항상 여러분을 노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세상의 가치관과 즐거움이 여러분의 삶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경계를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에게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0-1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갖추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은 악한 영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는 항상 개인군장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만일 작전에 찬여하는 병사가 철모와 군화를 신고, 방탄조끼와 소총과 방독면과 대검과 탄띠와 수류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면, 그 병사는 적군에게 ‘나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이미 병사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믿음은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흉배는 방탄조끼의 역할을 하는데,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 바로 여러분의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은 언제나 예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한 영은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먼저는 고난을 줍니다. 그것으로 안 되면 풍요함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이 주는 풍요함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이 틈을 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군병이 가져야 할 것은 구원의 소망입니다. 구원의 소망만이 어려운 현실을 이기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수많은 성도가 집요하고 끈질긴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고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구원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이렇게 죽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있다는 소망이 박해를 견디게 한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충만하게 갖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데살로니기 교인에게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피차’라는 표현입니다. 덕을 세우는데  피차에 세우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혼자서 믿음생활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라는 믿음공동체를 주시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 굳게 서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 혼자만 서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 곁에 있는 지체들을 세우는데 힘을 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주안에 굳게 서는 길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령 아래 있다면, 마땅히 서로를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연약함이 형제의 연약함이 되어서, 서로가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어야합니다. 영적인 필요까지도 채워줘야만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합니다. 내게 필요이상으로 있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서 왜 그것을 내게 주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처녀들은 어두운 바깥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한 편은 지혜롭다고 하고, 다른 편은 미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속한다고 보십니까?

    바울은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종말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은 모든 사람에게 오는 날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깨어서 말씀으로 무장을 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를 도우며 피차에 덕을 세우며 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제부터는 그 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교인 모두와 함께 믿음의 덕을 세우고자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준미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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