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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빛 주님 (요 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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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주님 (요 8:12-20)


기독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갖는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언덕 위에 신앙에 관하여 방황하는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인생은 무엇인가' 그가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더듬어 찾아도 그 하나님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한 줄기의 빛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 빛이 언덕 위에 있던 이 사람에게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한 줄기 빛으로 인해서 그 길을 발견한 그 순간,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자기에게 다가온 한 줄기의 빛을 보고 지적인 방황의 언덕에서부터 그 길을 향해서 자기의 몸을 던지듯 뛰어 내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의 결단이 참된 신앙의 경험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지적인 모든 요구에 관해서 반드시 응답을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아직도 그 하나님께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빛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한 줄기의 빛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속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한 줄기의 빛, 이 계시의 빛이 나에게 던져졌을 때 내가 이것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이 계시의 빛줄기를 붙들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시작하느냐에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세상의 빛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빛과 어둥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알거니와 익숙한 곳이라고 해도 어둠이 깔리게 되면 움직이는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건 소돔 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고 하셨고 주의 천사가 이에 롯에게 이르기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홍수와 불로 세상을 멸하고 난 다음에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가 하면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고 하신 히 5:12의 말씀처럼 여전히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라지 못하는 아이처럼 또는 몸만 자라는 아이처럼 그렇게 우리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과 같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를 않는데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밤이 되었고 불빛도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어찌 밤길을 대낮처럼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나름대로는 이 길이 진짜고 이 길이 바른 길이라고 하지만 마치 깊은 어둠 속에 잠긴 것과 같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분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날마다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십시오. 온갖 추잡한 범죄들로 가득합니다. 예전에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살아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는데 요즘은 잠시 문밖을 나가도 문을 잠그지 않았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향약이다 두레다 해서 서로 돕는 상부상조가 우리네 미덕이었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많은 이주 노동자들과 탈북자유이주민들까지 뒤섞여 있다보니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것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섭게 느껴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흔히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숨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무법천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낮에는 조금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밤이라면 누가 보랴 해서 아수라와 같은 모습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네 본성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온갖 계획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할 뿐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이 마치 그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탄식들을 많이 합니다만 예전 먹고 살기 바쁠 때는 그말처럼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딴 짓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단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어둠 속에는 어둠을 밝히는 불이 필요하듯 이 어둔 세상 역시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고 해도 일단 빛이 비쳐지면 어둠이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손전등을 가지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기불을 켜면 그래도 조금은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을 켜논 그곳뿐입니다. 하지만 낮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빛을 가로막은 극장과 같은 곳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눈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빛 아래서는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태양빛이 비치고 낮이 되매 세상의 어두움이 밝히 드러나듯 빛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우리의 어두웠던 것들이 밝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어둡고 혼돈스러웠던 것들이 다 물러가고 거짓되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석을 감정할 때 빛을 비춰봅니다. 그러면 그 보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어두움 속에 있을 때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 빛이 비쳐지게 되면 가짜는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하고 감추려고 해도 빛 가운데서는 결국 그대로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 주님이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달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햇빛을 받아 반사하게 되면 대낮만큼은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는 사물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특히나 보름달의 경우는 상당히 밝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우리가 주님의 빛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비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 선생은 “만약 등대가 될 수 없다면 양초라도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빛되신 주님을 믿어 생명의 빛을 지니게 된 우리는 결코 어둠 속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세상을 향해 비춰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차량 리모컨의 배터리를 교환하기 위해서 시계가게를 들렀습니다. 한번도 들른 적이 없는 가게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냥 청바지에 티 하나 걸치고 있는 저를 향해 대뜸 하는 말이 “목사님이세요?” “아니 제가 목사인걸 어떻게 아세요?” “그렇게 보이세요” 그러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둠은 빛을 민감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는가 하면 우리 안에 세상의 빛이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숨기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의 빛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의 갈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디언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컴컴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없습니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해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일 뿐입니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오지만, 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입니다. 곧 다시 아침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환한 낮이 되죠. 아무리 밤이 길어도 그것은 낮에 의해서 물러가고 말아요.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에도 해가 없는 것은 아니죠. 해는 반대편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어요. 밤에 뜨는 달을 보면서 우리는 밤에도 해가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이런 자연의 원리는 곧바로 영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여리고에 디매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매오는 가난했어요. 가난은 디매오의 집에서 떠날 줄을 몰라서 가난을 옷처럼 입고 사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기쁨도 잠시 아들을 낳고 보니 업친데 덥친 격으로 보지를 못하는 겁니다.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집에 날 때부터 보지 못하니 너무 기가 막혀서,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바 디매오’라 불렀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디매오’가 그의 이름이 되고 말았고요.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인생, 참으로 가엽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천해도 먹어야 살죠. 그래서 소경 바디매오는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죠. 바디매오의 일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리고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을 벌리고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동정심이 발동하면 동전 하나 던져줍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하고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인사를 합니다. 헌데 동네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짓궂은 아이들은 구걸하는 깡통을 발로 차버리기도 합니다. 공연히 돌멩이를 던지기도 합니다. 모두가 못 사는 세상이다 보니 어떤 날은 한 푼도 구걸을 못하고 빈털털이로 돌아와 하루를 깡그리 굶는 날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 어느 날, 여리고 거리가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운 겁니다.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웬 일이냐고 물었어요.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마음속에 어떤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이봐! 시끄러워, 조용히 못해?”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바디매오가 아니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막무가내였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단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캄캄한 어두움에 사는 사람의 절박한 소원이자 부르짖음입니다.

이 부르짖음을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하니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던지고 예수님께 달려나옵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의 말씀에 “곧 보게 되어 예수를 좇았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빛이라고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던 사람, 지금까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며 살던 사람이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달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숲과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자매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신령한 빛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천국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와 마귀, 가난과 어두움, 질병과 고통, 절망과 좌절과 상관없는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이젠 빛 가운데 계십니까? 어두움에 다니면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을 만나기 쉽습니다.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각종 질병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분명히 정지하라는 빨간 불빛이 켜졌는데 그냥 달리면 교통사고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가 나면 죽습니다. 안 죽는다 해도 엄청난 재산의 피해를 입습니다. 사고 나면 애매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힙니다. 사람으로는 못할 짓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사람을 살립니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빛 가운데 행하여 생명의 빛을 얻는 사람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자신의 겉옷까지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달려갔어요.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어요. 그래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았어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눈이 열렸어요. 빛을 보았어요. 세상을 보았어요. 주님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날마다 만나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시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만 따르십시오. 어두움에 다니지 말고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시고 생명의 빛을 함께 비추는 성도가 되심으로 자신도 살고 가족도 살리며 이웃도 살리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 되시며 빛 그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시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빛이 충만한 것입니다. 다만 잠시 그 빛을 가리는 것들이 있어서 거기에 어둠이 깃들이지만, 그 어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가리는 것들이 치워지는 순간 곧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어둠이 빛보다 우세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때도 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기에, 어둠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의 역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리는 악한 어둠의 훼방은 일시적이며, 결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참 빛 되신 예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시므로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므로 그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가 오시지 않아도 이미 빛으로 창조된 세상인데, 어째서 다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사탄이 이 세상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둠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상은 하나님의 빛이 없는 캄캄한 밤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원래 이 세상은 빛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겨울이 긴 캐나다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개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썬팅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고, 화해하고 넓은 마음으로 용납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분쟁과 시기와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어서, 평안은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과 의와 진실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감사와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한 때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윗통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그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들을 몰아내실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둠과 대결하시어 그 어둠의 세력들을 꺾어 놓으셨습니다. 계 3:20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주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며, 바르게 살지도 아니하며, 진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햇빛이 비치면 반드시 거기에서 싹이 나듯이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반드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참 빛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심으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은 이 빛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둠의 세력에 눌리지 않으며, 그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시 27:1~3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지금 어떤 위협이나 어려움, 어떤 시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다 물러갔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살기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거하면 능히 그 모든 문제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길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빛 아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느냐입니다. 양지바른 곳에 햇빛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햇빛을 받기 위해서는 양지 바른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주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을 찾아가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연구하며,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갈 때 그 빛은 우리 속에 생명이 싹트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시간 시간 주님 앞에 나아와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빛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들을 가질 때 주님의 빛이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믿음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둠의 세력들이 계속 우리를 위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합니다. 마치 해가 있어도 밤이 오는 것과 같고, 혹은 해가 떠도 짙은 구름이 끼어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잠시이며, 그 환난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길이 참아 그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며, 환난을 믿음으로 이기고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용사가 될 것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밤도 아름답습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며, 재창조의 시간들이기에 밤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둠과 밤은 빛과 분리되었었지만,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 안에서 하나되어 긍정적이며 선한 것으로 그 이미지가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빛을 믿는 사람들은 밤하늘의 오둠 속에서 오히려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보고 추운 겨울도 오히려 휴식하며 새로운 창조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습니다. 겨울이 혹독하게 추울수록 그 겨울이 지난 봄에는 더욱 화사하게 꽃이 피게 마련입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어둠과 밤, 그리고 겨울은 생명을 시들게 만드는 무섭고 혹독한 시련이며 걸림돌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은 소리 소리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며, 겨울도 은총의 계절로 변화된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회가 세계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주님의 빛 아래서 볼 때에는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추운 겨울이라고 생각하면, 이 겨울은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잘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므로 어두웠던 세상을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비쳐진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혼돈과 죽음은 다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안에 모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하면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빛의 열매인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이요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은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주와 함께 하는 자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비되었던 마귀로부터 세상에 왔으되 이제 예수를 믿어 거듭난 인생이 되었기에 주 안에서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주를 떠나 있는 사람은 다시 마귀의 품으로 즉 영원히 멸망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도 떠나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합니다. 이런 멸망자가 아닌 영생하는 생명을 지닌 우리는 그러므로 세상을 당당하게 살되 죽어가는 인생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 기도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계관시인인 테니슨이 친구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테니슨에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시인이었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아름다운 꽃 앞에 서서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이보게,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태양과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 빛이 없으면 시들시들 죽고 말 것이네. 태양 빛이 없다면 이 꽃은 살수도 없고, 꽃을 피울 수도 없는 것처럼, 나도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없으면 영원히 죽고 말 것일세.”

모든 생물들은 빛을 통해서 생명을 얻습니다. 빛이 없으면 미생물이나 식물, 동물들은 모든 활동이 중단됩니다. 생명활동은 빛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빛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었습니다. 빛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빛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각종 식물이나 물고기, 동물들을 창조하셨다면 어둠 속에서 혼란이 오고 모두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생물이 자라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영적인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이 조용기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 질문을 받고 조용기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다시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빛과 어둠 간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마귀는 결코 구만리장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있으면 마귀는 그 즉시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마귀는 순식간에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가려면 빛되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성령충만한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앞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요 말씀 안에서 깨어 있어 기도하심으로 빛된 삶을 사기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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