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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때문에! : 야곱 이야기 (7) (창 29: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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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 야곱 이야기 (7) (창 29:13-20)
 
야곱의 삶은 건강하지 않은 만남투성이였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삶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삶이란 만남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들이 모여 인생을 이룹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우리 인생의 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을 만남으로 보았을 때, 야곱의 인생은 어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아버지 이삭과의 만남에서 실패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그 한마디를 그토록 듣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하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늘 가슴이 비어 있었습니다. 서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 리브가와의 만남은 어떠했을까요? 그것도 정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며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야곱의 인생을 지배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앞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마보이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없는 삶이었습니다. 형 에서와도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 형은, 치열한 경쟁자이자 적대자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불행하고 답답한 만남 속에서 야곱은 청년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건강하지 않은 삶으로 인한 갈증을 단번에 해소시킨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듣고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마음에 새깁니다. ‘아, 내 삶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선물이구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구나.’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에 그는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와 담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지난날의 슬픔과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과거로 묻을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향해서만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기를 떠나보내면서 하신 말씀대로 어머니의 고향땅 하란에서 복된 여인을 만나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을 향해서 자신있게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우물가였습니다. 우물가. 그곳은 어머니 리브가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였습니다. 리브가는 우물가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만나 남편 될 이삭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먼 길을 떠났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얘야, 너도 우물가에 먼저 가봐라. 그러면 아주 건강한 처녀를 만나게 될 거다. 신실하고 지혜로운 처녀를 만나게 될 거다.” 

광야의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곧 생명입니다. 사람들과 짐승들이 그곳에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서로의 친분관계를 다지며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물을 길으면서 삶의 잡다한 사건들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이렇듯 이곳은 남자들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여인들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함께 물 길러 온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슴에 맺혔던 것들을 풀어내며 위로와 치유를 받았던 복된 자리가 바로 우물가였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우물가는,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옛 방앗간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대학 청년 시절에는 사람들이 종종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부르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남녀가 모일 장소가 많아 자연스레 그 말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청춘남녀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교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로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교회가 연애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 와서 기도하는 청년들, 교회 와서 말씀 사모하는 청년들, 교회 와서 주님 안에서 인생의 꿈을 품는 자들이 서로 만나서 귀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야곱은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바로 이 우물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우물가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라헬이 양을 몰고 우물가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 여자다. 하나님께서 나와 짝을 지어주신 복된 여자다.’ 라고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창세기 29:10)

라반의 딸이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후닥닥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장정 두 세 명이 들어서 덮는 우물 아귀의 큰 바위를 혼자서 들어 옆으로 치웠습니다. 자기가 힘이 세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인이 몰고 온 양떼들에게 물을 먹여줍니다. 

야곱의 첫사랑입니다.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이라는 여인은 영원한 연인이었습니다. 한순간 사랑하고 멈춰선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 여인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야곱이 마지막까지 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아내, 야곱의 순진무구한 사랑을 받은 여인, 그 사람이 라헬이었습니다. 
아가서에는 라헬을 향한 야곱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노래가 있습니다. 아가서 4장 9절과 10절입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아가서 4:9-10)

야곱은 라헬과의 첫 만남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800km 이상을 뚜벅뚜벅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라헬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자신의 사랑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야곱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머니 사라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과정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였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어떠합니까? 이삭은 아버지의 종이 먼 곳에서 데리고 온 리브가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창세기 24장 67절에는 이삭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아내 리브가를 통해 위로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랑은 중매를 통해 이루어진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라헬은 중매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첫 만남으로 가슴 설레는 사랑을 시작하여 결혼까지 이어진 연애결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다’는 말이 두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창세기 29:18)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창세기 29:20) 

여러분, ‘사랑’이라는 말이 진부하게 들리십니까? 아니면 ‘사랑’이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십니까? 사랑은 위대한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도 해당되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갖고 있는 한, 가장 소중한 말이 “사랑한다.”입니다. 

한 여인을 향한 전심의 사랑이 야곱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곱의 가치관과 인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야곱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물질을 축복의 내용이라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붙잡아야 비로소 안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욕심쟁이였고,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이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으면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창세기 29:18)

야곱이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라반에게 이야기합니다. 라헬을 위해 무보수로 칠년을 봉사하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야곱의 옛 모습이 없습니다. 무언가 보이는 것을 움켜잡아야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음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직 물질을 추구하던 마음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집착과 사랑의 열정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사랑의 집착은 보이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집착은 물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외형에 대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열정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격을 존중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같은 마음으로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 중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요셉 속에 자신의 곁을 먼저 떠난 라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이 깊은 사랑을, 그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창세기 29:20)

칠 년을 며칠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며칠을 수십 번, 수백 번 해야 칠 년이 됩니다. 그런데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칠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라헬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을 넘어서고, 시간을 영혼 속으로 몰아가는 큰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야곱은 칠 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라헬에 대한 사랑을 지켜나갔습니다. 이것은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 방정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뇌 연구가들은 인간이 설레는 가슴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기간을 길어야 2~3년 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이유는 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라고 하는 3가지 종류의 화학물질이 분비되는데 이것들이 사랑의 열정을 생성시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면 이 호르몬의 작용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애정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유효기간은 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을 단순히 호르몬 작용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심리학적 현상으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삭막하고 천박한 이해일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를 무시한 이해일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대에는 그대를 꿈속에서 그리며 살고, 20대에는 서로 만나 신나서 살고, 30대에는 환멸을 참으면서 살고, 40대에는 아예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그대 가여워서 살고, 60대에는 그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살고, 70대가 되면 서로 고마워서 산다.’ 열정은 사라졌을지 모르나 분명 이것도 사랑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습니까? 

사랑의 열정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랑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 나만의 사랑으로는 뇌 과학자들의 이야기처럼 호르몬 작용이 멈출 때 내 사랑도 멈춰 서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상대를 바라볼 때 나와 상대의 연약함 속에 담겨져 있는 아픔들이 사랑으로 덮어지고, 사랑의 열정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사랑받기를 원했던 그가, 사랑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그가, 이제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아가서 8장 6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 8:6-7)

모든 재산으로도 살 수 없고,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는 불길 같은 사랑의 열정을 야곱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의 마음과 성품을 바꾸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빨리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야곱을 치유하셨습니다. 사랑받기만을 원하고 붙잡기만을 원했던 그가 자기의 전체를 쏟아 붓는 사랑을 하도록 말입니다. 

사랑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젊어지는 비결입니다.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아내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남편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야곱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움켜잡기에 급급했던 우리들이 변화되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아가는 뒷면에는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기에 우리가 생명을 얻고 이 자리까지 오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은 교회를 위해서 밤을 새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웃을 섬기며 교회를 사랑했던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이 만큼의 복을 받은 것은 생명을 걸고 이 나라를 위해서 충성했던 순국열사들, 애국지사들, 국군 장병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사랑의 사람입니까? 내 속에 사랑의 열정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집착 속에 멈춰 서 있습니까?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거기에 우리 전체를 쏟아 부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사랑의 집착에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사랑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가를 깨닫고 거기에 우리의 삶을 쏟아 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바르게 세워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67년 전에 해방을 주신 이 땅, 저 북녘의 백성들에게도 자유가 선포되는 축복의 날이 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랑의 열정이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뜨거운 열정을 갖고 나의 가족과 이 교회, 그리고 이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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