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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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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1-7)


지난 주일에 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 있는데 강한 믿음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면서 자기 자유를 누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유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보다 연약한 형제를 위해 덕을 끼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의 음식을 먹는 일로 의견이 나뉘었을 때 자유와 사랑이라는 원리를 따라 서로 하나가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성도는 우상에게 드려졌던 어떤 음식이라도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된다는 확실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혹시라도 그런 지식이 없어 양심에 거리낌을 가진 연약한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가 나의 자유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나를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에서 연약한 형제가 음식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면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전했던 이 원리를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도 보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한 다음 오늘 읽은 본문 15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시킵니다.   이제 여러분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그리고 로마서가 각각 비슷한 원리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나의 육체를 기쁘게 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 아니라 보다 연약한 이웃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1, 2절에 이 원리가 요약되었습니다.   첫째,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둘째, 나의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랑의 법입니다.   

첫째 원리를 살펴봅시다.   믿음이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런 원리에서 바울은 약한 형제들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롬14:2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이렇게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또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 건강, 시간, 물질, 재능 등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만 확실히 알고 행하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더 아름답게 세워져 갑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심은 나를 자랑하고 힘을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너의 힘을 과시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그와 반대입니다.   없는 사람 앞에서 믿음을 자랑하며 돈을 자랑하고 지식을 뽐내며 권세를 부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약한 자들을 섬기고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주셨습니다.   믿음이 약해 실수하고 넘어지는 형제를 보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상한 곳을 만져주는 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 할 일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들추어 내고 만인 앞에 폭로하여 약한 자를 아주 넘어지게 하는 것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약점을 이사람 저사람들에게 알려 흉보지 말아야 합니다.   쌓인 스트레스 푼다고 시댁의 약점, 처가의 약점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 가족의 약점은 내가 보호하고 사랑으로 함께 져야 할 짐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가족들도 서로의 약점을 나누어 짐으로 함께 세워져가야 옳습니다.  

둘째로, 강한 사람은 그 강함을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사용합니다.   내 손에 있는 돈으로 맘껏 사고 먹고픈 것 맘껏 먹으며 누리고픈 것 맘껏 누려 나의 기쁨을 만족시키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더 크고 더 좋은 것 가지고 싶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내가 가진 것 자랑하픈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악한 본성에 굴복하여 오로지 나의 기쁨만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손에 있는 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나 좋을대로만 사용하지 않고 이웃을 돌아보아 나눔으로 선용하길 원하십니다.   희년운동은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나눔을 실천하자는 운동입니다.   개인의 소유가 늘어나고 재산이 확장되는 것을 강제로 통제하고 몰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누려야 할 행복의 터전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희년운동은 가난한 사람,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정신입니다.   일하지도 않고 놀고 먹는 게으른 사람에게 무조건 퍼준다는 말이 아니라 일하고 싶지만 기회조차 얻지 못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터전, 일하는 보람을 얻는 기회를 나누는 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입니다.   

지하철 역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묻지마식 범죄가 사회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칼부림을 한 사람은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내 처지가 불운하고 힘들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식으로 자기 울분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오도록 절망감과 패배감을 안겨준 이 사회도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으로 자기 배만 채우고 도에 넘치도록 과시하며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갈수록 병들게 합니다.   약자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무참하게 짓밟는 강자들의 차가운 시선과 거만한 태도는 약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폭발하게 만듭니다.   갈수록 무서워지는 세상을 탓하며 나를 방어려고  더 많은 돈과 학력과 지위로 더욱 높고 견고한 방어벽을 쌓으려 하기 전에 이웃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기 위해 가담하고 협력하는 것은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삶이나 휴머니즘에서 나오는 선행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도덕과 윤리차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온 명령입니다.  바울은 3절 이하에서 그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하셨으니 우리도 그를 본받아 그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내가 나의 강한 믿음으로 나의 자유를 절제하여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희생적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며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먼저 받은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빚을 이웃에게 갚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사양하고 세상으로 오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대로만 사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늘의 권세를 내려놓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대로 우리가 서로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연약한 자들, 실패한 사람들을 향해 자업자득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식의 차가운 평가를 내리는 것보다 이웃이 겪고 있을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설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용서했다면 여러분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했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고 용서입니다.  잘못은 고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비판이 아니고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라 격려로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용서하셨는데 왜 우리가 안된다고 합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셨으니 우리도 용서하고 서로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신론자 이어령 박사가 기독교인으로 회심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마음이 즐거웠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반대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본래 기독교인이었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이 어느 기독교계 신문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인데 그 기사를 보며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어릴적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길거리 전도의 열심도 있었던 사람인데 일본으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사회적으로 괜찮은 위치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없어 갈등하다가 다니던 교회를 떠나 성공회 교회를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답을 얻지 못하고 선불교 선방에서 삼천배를 한 후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소개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말이 싫었다.  기독교 신앙이 나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은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쳇바퀴 돌듯이 만들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런 신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  교회를 떠났다고 예수를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못난 사람들을 껴안은 분이다.    각자 깨달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고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됨이다.”

그 글을 읽으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폐와 헛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끼며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그 마음 속에 자리잡은 비진리의 악영향이 이렇게 한 영혼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교회에서 자라고 배우는 동안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 믿고 성공해야 한다는 성공철학과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다른 교우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며 자유와 평안이 없었던 그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 제대로 정리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목말라 찾았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찾으려다 실패하고 실망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선불교에 몸담아 생각과 마음을 텅 비우는 자유로움 속에서 내가 원하던 방식의 대답을 들었을 때 이제야 진리를 터득했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이 원하던 진리를 자신이 원하던 방식으로 만났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원하던 자유와 진리는 그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그런 사람을 높여주며 그것이 구원과 복인 것처럼 선전하라고 세워진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며 그 이름으로 죄씻음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법을 배우는 기관입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 길은 고난과 시험과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며 부귀영화나 성공 신화를 간증하기 위해 정상을 향해 줄달음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그분은 교회의 의미나 구원과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겨를도 없이 성급하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가 다니던 지역 교회를 떠날 수는 있지만 교회의 주인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가 만났다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온 다른 신지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녔던 교회에서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를 출석하는 동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장하고픈 것은 결국 선방에서 깨달음을 통해 발견한 자기 자신이 구원의 시작이고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참나, 참자아이며 부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 혹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길은 선불교가 기독교와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여 연약한 믿음을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성경이 확실하게 제시하는 내용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가 본질이라면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 어느 날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냐와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입니다.   어떤 식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할까, 예배는 한 시간이면 될까 두 시간을 드려야 할까 이런 비본질적인 부분에서 서로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와 고린도에 있는 교우들에게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갈라서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본질적인 주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 당부합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해야 하고 정상에 올라서야 하며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주장은 복음의 본질이 아닌 성공철학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 없고 비본질적인 성공철학이 난무하여 성공하지 못한 한 영혼을 초조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하는 교회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 책임이 큽니다.  성공신학, 성공복음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이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하여 바닥을 헤맬 때 불안과 죄책감에 억눌려 쓰린 가슴을 안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거기에 참 자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소속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내가 기여한 것이 미미하다 생각될 때 밀려오는 죄책감과 부담은 자유와 평안함을 빼앗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만나기도 전에 먼저 교회에 와서 부딪히는 복잡한 인간관계와 시간, 물질의 부담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낳고 나를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 염증과 불만을 가지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사람이 ‘나는 교회는 떠났어도 예수를 버린 것은 아니다’ 라고 했지만 결국 교회가 아닌 다른 공동체 그것도 선불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당당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몸담고 있던 지역교회가 불완전했다면 그보다 건강한 교회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를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답을 얻지 못해 결국 교회를 떠났다고 하니 그가 원하던 교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죄인이라는 말 듣는 것이 싫었다고 했는데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당연히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뇌도 없고 내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의 날개를 펼치고 현세와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다 어느 순간 내가 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만나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나누고 전하는 교회다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도 약한 자도 함께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서로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 받아져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강한 자가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살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범죄행위 배후에 없는 자와 낮은 자들을 향한 가진 자들의 거만함과 무자비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회의 약자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질 수 없습니다.   너희가 게으르고 무지하며 성실하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귀찮고 불편하다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나만큼 누리지 못하는 이웃의 연약함을 돌봐주는 행동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에서 ‘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 사랑을’이라는 글귀를 인용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받으라는 말씀은 이 원리를 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공격을 받을 때 서로 마음이 일치해야 하지만 삶의 방식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때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되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약한 형제를 위해 나의 자유를 절제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 낮고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받으셨으니 나도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고 복 주신 것은 나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부르신 까닭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부르는 축복송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라는 가사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시고 기쁨을 주며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십니다.   이런 귀한 사명을 받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보며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주의 은혜 속에 평강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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