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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 (막 13: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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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 (막 13:32-37)


막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막13: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막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막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역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9:28 전반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이는 예수님의 초림 때를 가리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계속해서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읽어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재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집니다. 과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초림의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림의 예수님은 오셔야만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에 수록된 감람 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생생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에 있을 여러 징조들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감람 산 강화는 끝맺음을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재림의 때입니다. 

막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시기 전에 있을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재림의 징조들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든지 죽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실제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는 중한 병이 들었을 때, 죽음이 점차 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가 죽을 날과 죽을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과 다시 오실 때를 사람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도 모르고, 신약의 사도들도 모르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모릅니다. 이렇듯 사람은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모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10 말씀과 같이,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습니다. 또한 마13:39 말씀과 같이, 마지막 때에 천사들은 추수꾼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막13:2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모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 날과 그 때를 모릅니다. 천사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 자신도 모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 날과 그 때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딛2:13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사실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자신이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를 생각해봅니다.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었습니다. 마26:53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자신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6~7에서 이 사실을 잘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에 따라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이 다시금 예수님에게 그 때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행1:7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이 때 예수님은 “내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계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때와 시기를 자기의 권한에 두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우리에게 미리 계시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여기에 두 개의 명령이 나옵니다. “주의하라”와 “깨어 있으라”입니다. 둘 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도록,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에게 알리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히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세대에 살든지 간에, 그 세대가 바로 역사의 마지막 세대이며 세상의 끝을 살아가는 세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면, 늘 주의하며 늘 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주의하라”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감람 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네 번 하셨습니다. 3절에서 “주의하라,” 9절에서 “조심하라,” 23절에서 “삼가라,” 그리고 오늘 본문 33절에서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역만 다를 뿐, 실상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특별히 우리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런데도 마치 그 날과 그 때를 아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시지만, 자기들만은 그 날과 그 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뻔뻔하고도 불경스러운 말입니까? 

우리는 이와 같이 거짓된 말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 곧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하는 속임에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네 번이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절, 34절, 35절, 그리고 37절에 각기 한 번씩 이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드셨습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깨어 있지 못하다가, 홍수로 다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마24:37~39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물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노아의 때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에 여념이 없어서, 임박한 심판에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백이십 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벧후2:5 말씀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곧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계속해서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단 한번도 홍수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제외하고서,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로 바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 예수님은 홀연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드신 후에, 마24:42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홀연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늘 갖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자기의 권한에 두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날과 그 때를 인위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는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늘 주의합시다. 아울러 늘 영적으로 깨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언제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우리 모두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시는 상을 듬뿍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종들의 비유입니다. 

막13: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르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그의 재림이 임박함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 이제 여기서는 종들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임박한 재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면, 한 마디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들의 비유는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막12:1에도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여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주인은 자기 종들에게 권한도 주고, 아울러 책임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각자가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대로 열심히 일하여, 그에 상응하는 달란트를 남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문지기의 사무는 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명한 바와 같이, 문지기는 서로 교대를 하더라도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 언제라도 오면, 즉시 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이는 종들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왜 예수님이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까?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지기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 주인은 저물 때나, 밤중이나, 닭이 울 때나, 새벽이나 아무 때라도 올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옛날 로마시대에는 밤을 네 경으로 구분했습니다. 

일경은 저물 때로, 저녁 여섯 시에서 아홉시 사이입니다. 이경은 밤중으로, 저녁 아홉 시부터 자정까지입니다. 삼경은 닭 울 때로, 자정에서 오전 세 시까지입니다. 마지막 사경은 새벽으로 오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입니다. 

아무튼 문지기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타국으로 간 집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문지기는 깨어 있다가, 얼른 주인을 위하여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이 그에게 맡긴 사무이며, 또한 주인이 그에게 명한 바입니다. 

막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문지기는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문지기의 입장에서 보면, 집 주인은 홀연히 오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지기가 예기치 못한 때에, 또는 뜻밖의 때에 집 주인이 갑작스럽게 집으로 되돌아오는 셈입니다. 

설마 집 주인이 밤에야 오겠어? 오면 낮에 오겠지! 그러면서 문지기가 자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홀연히 돌아온 집 주인은 문 밖에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집 주인은 그 문지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그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반면에 집 주인이 홀연히 왔더라도, 문지기가 깨어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지기는 얼른 주인을 위하여 문을 열 것입니다. 그러면 집 주인은 깨어 있는 문지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그에게 상을 내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들의 비유에서, 집 주인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집 주인이 타국으로 간 것처럼,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집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홀연히 되돌아올 집 주인을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홀연히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깨어 있다”라는 동사는 “그레고레오”입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그레고리(Gregory)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평생 깨어 있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우리도 늘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홀연히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준비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며 우리에게 귀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막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예수님은 감람 산 강화를 끝맺음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말 성경은 “깨어 있으라”가 앞에 나오지만, 실제 원문은 맨 뒤에 나옵니다. 원문대로 번역을 하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깨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벧후3:9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13:10 말씀처럼,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고 난 후에야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뚜렷한 명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 있어야, 우리 주변에 있는 잠자는 자들을 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밝히신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이 오셨을 때입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엎드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리고는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앞으로 재림의 예수님은 구름을 타시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예물로 드리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우리의 옥합을 깨뜨릴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 때 우리는 바나바처럼 우리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바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때는 더 이상 이 땅의 물질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예물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예수님에게 드릴 가장 귀한 예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생각하면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예수님에게 드릴 가장 귀한 예물은 바로 전도의 열매일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단 한 사람을 열매로 맺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깨어 있고, 아울러 힘써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을 깨웁시다. 

골4:3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 모두에게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증인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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