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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를 넘어 화해를 향해 : 야곱 이야기(10) (창 3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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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넘어 화해를 향해 : 야곱 이야기(10) (창 33:8-14)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인 ‘용서와 화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쉽게 용서가 됩니까? 쉽게 화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 해 전에 상영되었던 전도연 주연의 영화, ‘밀양’을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전도연은 사랑하는 아들이 유괴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엄청난 슬픔을 경험합니다. 아들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 하나님을 전하고, 그녀는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는 여러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불안하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것은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서 그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면서 결국 살인범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용서하기 위해 살인범을 만난 그녀는, 희색이 만면한 살인범을 봅니다. 그는 전도연에게 자신도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그래서 기쁘다고 말합니다. 할렐루야를 부르는 그 살인범을 보면서 전도연은 요새 젊은이들의 말대로 ‘멘붕’을 경험합니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충격과 허탈감이 몰려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죽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당신을 용서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그래서 그렇게 뻔뻔스러운 얼굴을 해? 죄책감을 갖지도 않고,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엄마에게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용서를 받아?’ 

그녀의 마음은 살인범에 대한 미움과 함께 살인자를 쉽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신앙을 버리게 되고, 그녀의 삶은 나락에 빠지게 됩니다. 

어머니로서의 전도연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용서가 이런 것이라면, 상대방을 용서하기가 정말 싫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공동체, 예를 들어 국가 간의 문제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일본 총리 노다의 말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방문을 마친 후에 일본 정부가 내뱉고 있는 말들은 망언에 가깝습니다.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주장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들이 행했던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도 슬그머니 발뺌을 하려고 합니다. 노다 총리는, “강제로 연행했다고 하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도 않고, 일본 측 증인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위안부 사건을 유야무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과거 36년 동안 행했던 만행과 역사적인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에 의해서 동원되었던 한국인의 피해자가 700만 명이 넘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총알받이로 강제 징병되어 끌려간 젊은이가 20만 명 이상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용서하고 일본과 화해하며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용서는 과거의 아픔을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와 화해.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아니, 실천하려고 하면 더욱 괴롭고 힘든 것이 용서와 화해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에서와 야곱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야곱과 에서가 만나 지난날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화해에 이르게 한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용서하고 용서 받게 했을까요?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주고 때론 상처를 받았던 일들을, ‘이제는 모두 없던 것으로 하자!’하며 너그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창고 밑에 그저 가라앉혀 버린 아픔의 기억들은 위기를 만나 조금만 건드려져도 다시금 구정물처럼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기에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에서 그 사람 용서도 참 쉽게 하네.’ 그들은, 에서는 야곱처럼 집착이 강한 사람도 아니고 끈질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화를 벌컥 냈다가도 다음날이면 잊어버리는 유형의 남자이기 때문에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에서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에서가 야곱이 가족들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면, 자기도 가족을 데리고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400명이나 되는 무장된 군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표시였습니다. 아직도 야곱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였고, 여차하면 그대로 야곱을 파멸시키겠다는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에서의 처음 마음이 나중에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형을 속이고 배반함으로 형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20년 동안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서와의 만남이 점점 가까워지자 ‘형이 나를 용서해 줄까?’ 생각하며 불안해 했습니다.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상처를 준 야곱과 상처를 받은 에서 모두 과거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20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와 화해를 위해 매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즉, 용서의 자리에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를 받을 자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둘째, ‘가해자가 용서를 빌지 않더라도 피해자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용서할 수 없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된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상처를 준 가해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용서는 처음부터 일그러지고 뒤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용서를 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용서를 통해 상처를 준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면, 그것이 곧 상처를 받은 자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용서라는 것이 가해자에게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생이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용서하는 것이 마치 죄악을 묵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용서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하지만 용서의 행위가 정의의 손상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가 정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행위가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문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그대로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는 용서하기를 싫어하면서도 누군가 남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를 계속 권면합니다. “너 지금 고통 받고 있지? 마음이 불안하지? 빨리 용서해야 돼. 너 착한 사람이잖아. 예수 믿는 사람이잖아. 그러니 어서 용서를 해야지” 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 콤플렉스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상처를 받은 자는 용서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 자기의 결단으로 행해야 진정한 용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남에게 함부로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어떻게 마음이 풀어진 것일까요? 분노에 차서 무장군인을 데리고 나갔던 에서의 마음이 무엇으로 누그러진 것일까요? 바로 야곱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먼저 그는 형 에서 앞에서 바짝 엎드렸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창세기 33:3)

일곱 번이나 머리를 숙이면서 에서에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또 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함이니라 (창세기 33:8)

같은 형제가 아니라, 형 에서를 ‘주님’으로 자신을 ‘종으로’ 칭하면서 에서에게 다가갔습니다. 또한 그는 형 에서에게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형에게서 은혜를 입기 원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 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올 때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누가복음 15:19)

야곱은 집 나갔던 탕자가 아버지를 주인으로, 자신을 품꾼으로 여겼던 것처럼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며 용서를 구한다는 점에서 야곱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뻔뻔해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하면 하고, 하지 않으려면 말아라. 나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는 형 에서에게서 빼앗았던 장자권을 자기가 그동안 모은 물질로 보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데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창세기 33:11)

우리에게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아무런 보상 없이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에서에게 주어 그의 마음을 풀고자 노력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직접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의 엉치뼈를 내려치셨습니다. 그 즉시 야곱의 환도뼈는 위골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쩔뚝거리며 에서에게로 나가야 했습니다. 서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제 조금 전에 던졌던 질문, ‘가해자가 잘못에 대한 고백이 없을 때도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 것인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답은 무엇일까요? ‘용서한다’입니다. 이때의 용서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잊어버리자’하며 내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저주를 살아계신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 상처 입은 자를 신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끈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가슴 속 분노와 아픔을 하나님께 쏟아내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향해 “적대자들이 나를 향해서 다가옵니다. 내가 어찌할까요? 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하나님 뭐하십니까?” 하고 항의하는 글들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다 드러내면서 결국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가슴속에 맺혀있는 억울함 같은 것이 하루 종일 나를 억누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상대방이 회개를 하던 회개를 하지 않던 내가 먼저 용서하는 마음으로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소연 하십시오. 하나님께 투덜거리고 하나님을 비난하세요. 그리고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감행하실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갖고 있는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가해자로부터 나를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평안이 다가오고, 하나님이 주신 참다운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화해가 재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용서는 화해와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가해자의 죄고백과 피해자의 용서가 함께 어울리는 것이 화해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만났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자리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3장 4절에는 그 화해의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세기 33:4)

에서가 달려왔습니다, 두 팔을 벌렸습니다, 목을 안았습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형 에서가 용서의 마음으로 동생 야곱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비슷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누가복음 15장에서 다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돌아온 아들을 두 팔 벌려 안아준 아버지의 마음이 에서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모습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용서한 형 에서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라 (창세기 33:10)

야곱은 큰 기쁨으로 형 에서와 함께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옛날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화해한다고 그 사람과 재결합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그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서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창세기 33:12)

용서와 화해의 자리에서 에서는 야곱에게 함께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것을 거절합니다.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말입니다. 서로 화해하고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예전처럼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님은 형님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각기 제 길을 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화해한 야곱과 에서를 모두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화해가 내 것이 될 때, 진정한 화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용서해야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용서를 시작하십시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터트려야 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마음 속 분노와 울분을 하나님께 토해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가해자와 내가 묶여 있었던 아픔의 관계를 단절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꼭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욱 담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위해 이런 모든 것들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고, 화해의 사건을 내 것으로 삼아야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내가 화해할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용서가 무엇인지 화해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면서 만약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면 잘못을 고백하고, 내가 용서해야할 사람이면 모든 고통과 아픔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잘못을 고백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라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해자면서 때로는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게 우리의 삶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확인들을 통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용서와 화해의 사건들을 펼쳐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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