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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가? (창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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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가? (창 3:1-21)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故이병철 회장이 질문한 24개중에 5번째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는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질문에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음주 운전자에 의해 사고를 당해 전신 화상을 입고 살게 된 이지선 자매의 고난을 이해 할 수 있나요? 지난번 태풍으로 인해 수십 년 수고하고 애써서 일구어 놓은 양어장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남해안의 수산업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 할 수 있나요?   

성경도 보세요. 욥기에 욥이 당한 고난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생일잔치하던 도중에 대풍으로 열 명의 자녀들이 집이 무너져 몰살당합니다. 양과 소 낙타 등 엄청난 재산이 한순간에 잃게되는 고난, 거기다가 육체적인 고통이 계속되는 고난, 이런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육체적 고통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과 신앙적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때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에는 Test와 Temptation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를 다 ‘시험’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Test로 쓰이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성숙을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를 받치라는 시험은 Test입니다. 

그러나 Temptation으로 쓰이는 시험은 ‘유혹’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려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기 위한 시험입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시험은 어떤 시험입니까? 중요한 것은 Test이든 Temptation이든 결과는 우리를 성숙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욥의 고난을 보세요. 

일시에 자식을 다 잃게 되고,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온몸에 종기 악창이 생겨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었을 때, 하나님이 허용하셨으니 Test도 되고, 사단이 요구한 것이기에 Temptation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시련이면서 동시에 마귀가 준 유혹입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왜죠? 그런 시험과 유혹이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사탄이 주는 것인지 명확하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란 유명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직접하고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간접적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고난을 통해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욥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성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고통 하는 고로 내가 있다”라고 했고 “인생은 고통을 앎으로 비로소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지구상에 모든 생명 중은 고통 없는 생명은 아예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이런 고난과 고통이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뭐라고 답할까요?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1.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의 파괴로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창세기 3장은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알게 하고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죄를 모르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체로 창조하셨기에 인간과 언약을 맺습니다. 

창2:16~17절을 보세요.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선악과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의미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오늘 봉독한 3장에서 깨어집니다.   

뱀이 와서 하와를 유혹을 합니다. 뱀은 그냥 뱀이 아닙니다. 사탄이 그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면 언약의 체결자인 아담이 아닌 하와입니다. 

왜 하와일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 하와는 언약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때 하와의 답변을 보세요. 창3:2~3절입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잘 보세요. “먹지 말라” 했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안했습니다. 
그런데다 “정녕 죽으리라” 했지 “죽을까 하노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유는 언약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뱀은 대놓고 거짓말로 유혹합니다. 4~5절을 보세요.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결코 죽지 않는다”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 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이 깨어집니다. 여기서 인간은 온갖 고통과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죽음은 원래 인간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깬 결과로 찾아오는 죽음은 인간이 맛보게 되는 고통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부른 당사자는 인간입니다. 누가 에덴의 행복을 망가뜨렸습니까? 어떤 사람은 “고통은 神이 악취미가 있어 인간에게 내린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대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파기의 결과로 말미암아 자초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어떤 종교는 고난이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고통, 고난, 시련, 슬픔, 고뇌, 불행, 죽음의 근원은 언약을 파괴한 결과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인간 로봇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깬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책에도 고난에 대한 정답을 말하지 못하나 성경만은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죽음을 위시한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죄의 값입니다.  

그러나 고통만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짊어진 인생들이지만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보고 있지만 않으십니다. 그래서 고통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뿐 만 아니라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을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2. 회개의 기회를 놓쳤기에 찾아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로마서 6장2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찾아온 죄의 대가는 아주 혹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에게 곧바로 혹독한 심판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무서운 심판을 허시기 전에 반드시 돌이킬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9절부터 보세요.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왜 물어보실까요? 몰라서일까요? 알면서 왜 물어보실까요? 그것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기회를 책임전가로 놓쳐버립니다. 

12절을 보세요.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넘기나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입니다. 이말은 하나님도 책임이 있고 여자도 책임이 있단 것입니다. 여기서 가정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옆에 있던 하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말은 사실입니다. 하와가 유혹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먹으라고 준 것을 먹었던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당사자는 아담입니다. 그럼에도 하와에게 언약을 제대로 주지시키지 못한 탓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할 때는 하와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언약의 주체인 아담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하와에게 넘깁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어떤가요? 
하나님이 하와에게도 묻습니다. 13절을 보세요.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에게도 기회는 주어졌는데 그도 책임을 전가합니다. 누구에게요? 뱀에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왜 그랬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이 뱀에게는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심판을 선고합니다. 14절 이하를 보세요.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뱀에게는 기회를 안주고 아담과 하와에게만 질문을 하셨는가요? 
그것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회개할 기회, 그것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과 고통과 불행이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임신하는 고통과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고통이 따르고 그리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땅이 저주를 받고 평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게 되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땀을 흘려야 먹게 되는 형벌을 받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회개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그렇게 했느냐” 물으실 때 그 즉석에서 “내가 범죄했나이다.” 하면서 용서를 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분명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고 책임전가라는 惡手(악수)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애나 어른이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기보다는 “누구 때문입니다.” 하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아주 못된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제 막내 동생이 목사인데 12살 차이 납니다. 그 애가 2살 때 시골 집 안방에서 나오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앙앙” 하고 울어댑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한방에 그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문지방을 손으로 때리면서 “데끼 이놈 왜 우리 아들을 넘어트렸어”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그때 왜 그쳤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깊이 생각해 보니 이것도 책임전가입니다. “내가 넘어진 것은 내 탓이 아니고 저 문지방 탓이다. 그래서 재가 우리 엄마에게 맡았다. 그러니 울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전가는 문제 해결책이 아닙니다.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세요. 밧세바를 범하고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죄를 지적할 때 그때 다윗은 “내가 범죄했나이다.” 하면서 즉각 회개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내가 범죄했나이다” 회개하는 그를 그 즉석에서 그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할렐루야! 

만약에 “저 여자가 대낮에 옷을 벗고 목욕하며 나를 유혹했나이다”하고 책임을 전가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불행을 겪는 것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경고하시면 즉각 회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으로 경고하실 수 있습니다. 사건으로 경고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경고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죄를 깨닫고 즉각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만찬석상에서 주님이 경고하셨는데도 돌이키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리고는 예수를 배신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에서 나갑니다. 그러니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배신을 하지만 주께서 경고하신 음성이 생각나서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회개하면서 그대로 공동체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주님이 찾아와 주시고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오늘 이 설교가 누구에게 주시는 경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경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고통과 불행은 해결됩니다. 

왜 인간에게 불행과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3. 때로 우리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고난과 고통 불행과 슬픔은 우리를 무척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과 고통을 사랑의 하나님은 왜 구경만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구경만하고 계시질 않습니다. 

욥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고통 속에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혹독한 고통 속에서 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힘도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고통 속에서 행복도 유익한 일도 얻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119: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실 고통이 없으면 행복의 가치를 모릅니다. 사람은 아픔으로 인해 육신의 소중함을 확인하고 건강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을 맛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행복의 가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겪었습니다. 장애로 인한 차별을 당하고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당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워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늘 원망하고 가슴 아프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게 바뀌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살게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나를 부하게” 이 가사를 저는 실감합니다. 제게 그것을 체험케 하신 분이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고통이 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미국에 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폴 브랜트> 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은퇴할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 

“당신이 나환자에게 마지막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때 그의 대답은 “그것은 아픔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환자들은 나병의 초기 증세나 중증에서도 아픔이란 것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치료를 등한이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고통을 알게 되면 늦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느낀다는 자체가 행복임을 아십니까? 

암이 무서운 것은 상당히 진행되기 전 까지는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있으면 사람은 즉시 치료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통증이 없으면 문제가 커져서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몸이 피곤하고 무겁고 식욕이 떨어지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쉬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도 안 쉽니다. 왜요? 욕심이 우리를 그냥 쉬게 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피곤한데도 강행군을 합니다. 이러다간 몸살이 나야 그제서 쉽니다. 
왜 몸살이라는 것이 걸리는지 아시나요? 안 쉬니까 꼼짝 못하게 해서 쉬라고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그 이상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소년 목동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깎고 다듬어서 왕재로 키우십니까? 바로 ‘고난’이라는 학교에 입학시키시지 않던가요? 10여년 이상 고난의 학교에서 모진 훈련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세우십니다.   

요나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가려던 그였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풍랑 속에 던지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 입교시킵니다. 그는 그 속에서 회개케 되고 비로소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으로 가게 됩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겪을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고 너무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복된 인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록펠러 이야기 잘 아시지요?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습니다. 53세에는 세계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55세에 그는 불치병에 걸려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들어가는데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주변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 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리고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며 자선사업을 하다가 9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겪을 때 승화됩니다. 시련과 고통은 아프고 힘들지만 사람으로 강하게 합니다. 고난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어떤 분은 역설적인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고통당하면 하나님을 부인할 것 같고 멀리 할 것 같은 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도 믿음으로 받으면 복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죄인 된 인간들에게 내리는 징계요 심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고난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또한 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보살펴야 합니다. 고난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세요. 고통속에 있는 인간을 향해 주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이 가죽은 양의 가죽 옷입니다. 인간의 죄를 위해 양이 죽어서 죄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께 나오면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은 덮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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