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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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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18)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골라내라면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누구든지 암송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라도 이 구절 하나는 잊어버리지 않고 따로 외울 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구절은 기독교의 중심 되는 말씀이요 복음의 진수요 구원의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하나만 잘 안다고 하면 그분은 신학박사 자격이 충분히 있는 교인입니다. 

오늘 제 설교는 3절 밖에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 3절 속에는 무궁무진한 기독교의 진리가 다 함축되어 들어있는 구절들입니다. 이 말씀 전체에 뜻이 있다면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잘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하고 그 사랑한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악센트가 강한 부분이 “독생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뜻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소유를 독생자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 버클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그만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강도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학생의 장례식을 치룬 후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를 위로하러 심방을 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지방 도시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호텔도 가지고 계셔서 제가 있는 동안 그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잘 사셔서 다른 빌딩도 가지고 계시고 택시 회사도 하고 계셨습니다. 택시가 몇 대냐고 여쭤보니 100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주 성공한 분이셨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그 분 이름을 대면 누구도 다 아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제가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아들을 만나고자 하면 교회를 나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틀림없이 있는데 내가 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당신에게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번 믿어 보시고 교회에 출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훌륭한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물질적으로 한번 성공하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꿈을 다 이루었습니다. 나는 100세까지 살아도 이만한 재산만 가지고 평생 꿈을 이루었는데, 내가 평생을 통해서 이룬 꿈인 내 모든 소유를 다 가져가고 우리 집의 숟가락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몽땅 다 없어지고 그 대신 죽은 내 아들이 살아난다면 내가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분만 그러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저도 다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분은 그 아들 말고도 또 아들 둘이나 있고 딸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부모는 어떠하겠습니까? 다 똑같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 아들을 희생 시키는 값으로 대통령이 된다면 되실 분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 아들을 죽일 경우 대통령 시켜준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 안 드시길 다행이지 만약에 드셨다면 제가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내 아들이 죽고 그 값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된다.’ 허락하실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이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는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는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을 보내서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그 다음 또 다른 아들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면 차선의 길이 있는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3의 길이 없습니다. “이거 밖에 없다.” 이게 독생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이 소유를 주셨으니”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최고로 여기는 최고의 가치를 인간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주셨다. 이거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줄 때도 즐겁고 받을 때도 즐겁습니다. 그 선물을 보면 어떨 때는 컵을 하나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화장품을 줄 수도 있고 책을 한권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큰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여신도들을 만나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신도들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이 보석과 명품 가방인거 같습니다. 그것만 선물 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하나 선물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벤츠 자동차를 “이거 선물입니다.” 하고 주면 어떻겠습니까?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좋은 집을 한번 선물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은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들이 한명 있는데 옆집이 아들이 없다고 하니까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 아들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세상에는 수양아들이나 양자 문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고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을 남의 집에 주는 순간 그 아들은 그 집의 어떤 일을 위해서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이유가 있을 때 내 아들을 선물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이 독생자이다.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시켰으니” 

성경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희생시키는 문화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독자 이삭이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아들 하나가 생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습니다. 번제는 죽여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이 독자를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독자를,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번제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들은 죽었습니까? 마음만 봤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렙다 땅에 사는 어느 불쌍한 과부는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모두 다 굶어 죽는데 이 가정은 어디 가서 식량을 구할 데도 없고 한 끼 밖에 없어서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함께 나누고 이제 죽으려고 생각한 가정에 하나님의 종에게 가라고 하셔서 그 집을 또 갔습니다. 그랬을 때 이 여자는 한 끼 남은 그 식량을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대접하고 “내가 한 끼 더 먹고 죽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를 대접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에게 대접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집에 평생 동안 먹을 것이 있게 했다.” 그 하나를 드린,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린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헌금하는 사람을 구경하셨습니다. 어느 불쌍한 여인이 너무나도 구차한 중에 동전 두 개, 유대 나라에서 사용하는 돈의 최고의 낮은 단위인 렙돈, 가장 낮은 동전 두 개를 헌금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이유는 자기의 소유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을, 이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즘은 아주 좋은 신앙적 계획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갈보리교회도 많이 계셔서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흔하게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사업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틀림없이 교회도 짓고 고아원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선교 사업도 하겠습니다.” 아주 장황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제발 그렇게 되십시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렇게 성공한 다음에는 잘 행하지 않습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가 가까운데 휴가철이면 반드시 한두 명은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저는 휴가철에 라스베이거스 구경 갑니다.” “잘 갔다 오십시오.” “거기 가서 당첨되면 헌금하겠습니다.” 한 사람도 헌금하시는 분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뭐냐?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동전 두 개 밖에 없고, 한 끼 식량 밖에 없습니다. 아들 한명 밖에 없습니다. 이것 밖에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한사람의 한 끼 식량을 드렸더니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의 기적 역사는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다음을 이야기하지 마시고 오늘 내가 무엇을 참여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이나 사렙다 땅의 어떤 과부나 두 렙돈 헌금한 가난한 여인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화려한 미래만 자꾸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텍사스에서 목회할 때 거기 한국 어느 기업에서 직원들이 2~30명 나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외로우니까 교회 오면 주일날 밥을 해서 김치를 나눠 먹으니까 직원들이 다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때는 저도 젊었을 때니까 그 직원들과 지냈는데 우리나라 최고 재벌 총수가 그들이 잘하고 있는지 보려고 텍사스에 순회를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오늘은 주일이라 직원들이 모두 교회 갑니다.” 
“그래? 그러면 나도 가자.” 

그래서 그분이 교회를 오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직원을 시켜서 제가 빌려서 드렸던 미국 예배당 건물이 너무 아름답고 좋았었습니다. “이 건물 뭐든지 안 가본 곳 없이 다 사진 찍어라.” 그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직원이 모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질문했습니다.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저는 재벌 총수를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이 건물을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나는 건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예배당을 하나 짓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벌 총수가 그런 일을 말해주니 저는 그때 좀 흥분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그때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으면 오늘 저 재벌 총수가 감동을 받아서 저런 말을 할까?’ 그런데 그분은 그 일을 안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건물을 말했는데 왜 안했을까?’ 간단합니다. 아까워서 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도 안 믿는데 예배당 지어서 뭐해?’ 그러니까 우리 목회학 교수가 그 전에 우리 학생들에게 “감동되었을 때 빨리 해!” 그러셨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수백 개의 교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까운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것 가운데 조금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 없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독생자를 주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의 혜택자는 누구나 다입니다. 많이 받을수록 주시는 자가 기뻐하는 진리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장애인이 한사람 있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돈 좀 달라고, 마침 베드로와 요한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갑니까? 돈은 없지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예배드리러 기도하러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나는 목사인데 있는 것이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으로 해석해서 전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해서 모든 영혼의 기쁨과 행복과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요 소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나는 평생을 통해서 이 한 가지를 온 세상에 나누어주면서 살자.” 그런데 있는 것도 사람들이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것을 못줍니다. 

서울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살던 서부 이촌동 난민촌 목회를 일평생 하다가 돌아가신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가 1인자이신 이현우 목사님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생 과장이셨습니다. 그분의 교인은 다 판잣집에 살았습니다. ‘이 교인들에게 내가 어떤 선물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시다가 그분은 미술가로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밀레처럼 사실적 화가이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십니다. 그래서 난민촌의 그림을 그리십니다. 그 판잣집에서 마당에다 통로 하나 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라든가 자기가 목회하는 난민촌의 모든 환경을 보는 것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는 교인들에게 그림 한 장씩 나눠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그러면 그 난민촌의 가난한 게 살던 사람들은 ‘차라리 라면 한 봉지를 사다 주는 것이 낫지 우리들이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도 구차하게 사는데 이렇게 구차한 그림을 받아서 뭐하나?’ 그러나 목사님이 주시는 거니까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지금 그 동네는 한국에서도 제일 부자들이 사는 한강변의 아주 경치 좋은 마을로 변해서 최고의 아파트 시설을 갖춘 동네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살면서 그래도 거기 살았기 때문에 오는 혜택으로 지금 산단 말입니다. 그들은 다 중산층 이상의 좋은 삶을 살고 있는데 지금 그 목사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시절 자기들의 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주신 그 그림이 집안의 가보입니다.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았지 않느냐? 그때 판잣집에서 살 때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그려준 이 그림!” 어떤 보물보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가치성에 의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겠다. 이것만 소유하면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영생을 너희에게 주노니 멸망치 않고 이것을 가져가라. 그러기 위해서 내 독생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받았습니다. 

옛날 6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서울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160명 호텔 투숙객들이 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TV로 현장 중계를 다 했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서 “저 아래 타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느냐?” 안타깝게 별 수단을 다 써도 160명이나 죽었습니다. 사람마다 창가에 나와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창가에서 탈출을 찾는 그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이 나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소.” 

그게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재벌이 와서 돈 수백억을 들고 와서 “이거 가지시오.” 어느 대학 총장이 와서 “내가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겠습니다.” 미스코리아가 와서 “나와 결혼해요.” 다 좋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두 평소에 소원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 준다 하여도 그 사람에게는 그 시간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것만 되면 다른 가치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셔서 모두가 멸망 받을 자리에서 모두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나는 희생하고 너희는 구원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은 자는 다소 이 세상에서 고난 부분이 있다 하여도 가장 귀한 소유가 있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호텔 꼭대기에서 살려달라는 사람에게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원받는 그 하나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크게 기뻐하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더욱 기뻐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기뻐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기쁠 게 있습니까? 우리 세상 기준으로 기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 받고 쫓겨 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독신입니다. 그러니 뭐가 기쁩니까? 우리 기준에 기쁠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뭐가 기쁜 것입니까?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되어서 영생할 수 있는 진리를 내가 얻고 그것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있는 것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로다.” 이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는 사람은 ‘아!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를 나에게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지금 최고로 여기고 있는 내 소유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나는 그것을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제일 목표로 되어 있는 진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런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모두 다 영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최고의 가치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오늘 말씀에서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나도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는 믿음의 결단이 생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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