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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교회(1) (고후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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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교회(1) (고후 13:11-13)

지금까지 주일 낮 예배를 통하여 고린도 전후서를 강해하였습니다. 고린도서를 강해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올바른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바로 오늘 현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통해 우리는 현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설립한 후 은혜롭게 성장하다가 여러 가지 교회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뿐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여 교회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눈물로 기도하면서 거짓 교사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에서 돌아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간곡하게 권면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첫째,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권면들 가운데서도 먼저 기뻐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기쁨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을 혼돈케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한 사도 바울과는 다르게 유대 율법주의자들인 거짓교사들은 구약의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복음을 떠나 옛 율법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복음 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참된 기쁨을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민하는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다시 복음에로 돌아서서 복음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됨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삶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 전도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반대와 비난과 핍박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으로 늘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는 많은 성도들에게도 기뻐할 것을 늘 권면했습니다. 

빌 3: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고, 4: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살전 5: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요,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전달되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깊은 정이 든 곳은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주변에 식당이 많지만 좀 멀어도 그 집을 찾아가는 것은 맛이 있고,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도 많은 성도들이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들리고 싶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정상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오고 싶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맛있는 음식점 같이 교회에 왔을 때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에 기쁨과 감격이 넘쳐야 하고,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신앙생활이 즐겁고 기쁨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험담이나 하고, 흉이나 보고, 트집이나 잡고, 뒤에서 숙덕거리면 현재 다니는 성도들도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아프게, 슬프게 만드는 교회는 성도들이 오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누구든지 오고 싶은 교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는 온전해져 가는 교회입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어떤 청년이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스펄전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완전한 교회를 하나 소개하여 주십시오.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그때, 스펄전 목사님는 "그런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제게도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목회를 하지 않고 그 교회에 가서 성도가 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런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거든, 당신은 제발 절대로 당신은 그 교회에 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의 성도가 되면 아마 당신 때문에 그 교회의 완전함이 깨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지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권면한 “온전하게 되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감당하기가 어렵고 부담스러운 권면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문제가 참 많고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런 부족함은 점점 더 많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현상만 유지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요구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의욕마저도 꺾이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온전하게 되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온전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정확한 의미로는 "잘못을 고치고 온전하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패를 다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했던 새 시대의 복음의 질서에서 벗어났습니다. 대적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잘못된 모습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어서 빨리 실패를 극복하고, 온전하고 거룩한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되어 갈 수 있습니까? 

시 19:7-8절 말씀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화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앙과 인격적인 미성숙으로 교회가 분열되고,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권면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온전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만 살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딤후 3: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면 얼마나 큰 능력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말씀을 따라 그대로 순종하여 살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대로 생활에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한 말씀이라도 생활에 실천할 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말씀을 듣고 실천하므로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는 위로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회적인 문제로 인해 성도들에게 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당파와 분쟁과 상대방에 대한 시기와 질투, 미움으로 성도들 간에 상처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로”라는 단어는 두 가지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의 히브리어의 뜻은 “불쌍히 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로’의 헬라어의 뜻은 “유쾌함을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 위로하라”고 말하지 않고 “위로를 받으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들이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로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일로 유쾌해 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유쾌해 지는 삶, 즉 하나님께로부터 즐거움을 얻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3-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 51:3절에서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면 광야와 사막과 같은 상황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감사와 찬송소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슬플 때에 그 슬픔을 달래 보려고 어떤 사람은 오락, 스포츠, 등산, 서예, 음악 감상 등 취미생활을 해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여행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 유쾌함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잊어질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갈수록 더 큰 괴로움이 파도처럼 엄습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유쾌함은 어느 한 순간 빛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슬픔과 괴로움이 사라지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5:4절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를 인하여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의롭고, 나는 저 사람보다 깨끗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진실하고 착하다.’라며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위로해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평안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희망찬 소식을 듣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슬프고 분노하고 힘이 빠지는 소식만 들립니다. 살기 힘든 세상에 자살, 살인, 폭력 등 인간 밑바닥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사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때에 누가 이 사람들을 진정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사 40:1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우리에게 그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얻고, 그 위로를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 교회가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위로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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