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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여정에서 주목할 두가지 (벧전 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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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여정에서 주목할 두가지 (벧전 2:11-12)

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없고,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에 혼란이 옵니다. 정체성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특히 신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신자됨의 정체성을 이해할 때 신앙의 길이 보여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11절에서 신자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세상 속에서 신자의 신분과 위치를 확인시켜 줍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란 잠시 머물러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임시고, 진짜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지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목적지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순례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여기에서 살 것이 아니고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분명한 목적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혼란이 없습니다. 만약 목적지를 놓치거나 희미해지면 신앙은 길을 잃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땅에서 영구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최근에 집을 사신 분이 있나요? 진짜 내 집이 아닙니다. 진짜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민 간 분들은 영주권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주권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영주권이 없으면 신분이 불안전해서 삶이 곤고해집니다. 어떤 분은 너무나 애를 쓰다가 영주권을 받을 즈음에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마친 후에 영주권이 도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임시 거류증을 받고 사는 비영주권자와 같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가야 할 곳, 추구해야 할 나라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영원에 닿아있어서 영원을 추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외면하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직면해야 하는 인간에게 영원은 거부할 수 없는 실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을 추구하며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현실에서 어떤 것으로도 진정한 만족을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나라를 막연하게 꿈꾸고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툴툴 털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고 갈 수 없고,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 평 남짓한 흙침대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언젠가 끝이 올 것이라는 개인과 인류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순례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경유지를 목적지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더 나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만약 영원한 나라에 대한 기대감, 사모함을 놓치면 신앙은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늘 종말론적인 관점을 견지해야 합니다. 종말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에게는 두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1절의 소극적인 교훈과 12절의 적극적인 교훈입니다. 

1.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입니다. 영혼을 잃어버리면 삶은 실종됩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정욕은 나그네에게 목적지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스쳐 지나가야 할 곳을 목적지로 착각하게 만들어서 그곳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입니다. 영혼을 잃어버리면 영원을 놓치게 됩니다. 영혼을 놓치면 삶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례자의 영성을 흔드는 적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먼저 육체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당장의 만족에 눈독을 들이고 그곳에 몸과 마음과 모든 에너지를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당장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에 빠지면, 신자는 위험한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육체의 정욕이라는 덫을 놓아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려고 틈을 노립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욕구들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은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문제는 육체의 정욕은 기본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고, 탐욕의 불이 지펴져 선을 넘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적당히 먹고 만족해야 하는데 먹고 또 먹습니다.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쌓고 또 쌓아 놓고 먹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것까지 빼앗아서 쌓아놓습니다.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과 연결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먹는 것은 알아줍니다. 먹는 것을 좋아해서 겁을 먹고, 뇌물을 먹고, 욕을 먹고, 애를 먹고, 더위를 먹고, 심하면 남의 등을 쳐 먹는다고도 표현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부족함 때문에 먹은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부채질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빠지면 인간의 눈이 멀어지고 영혼을 빼앗깁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먹는 것 때문에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정글 속에서 사자나 맹수들은 사냥한 것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먹던 것을 그냥 두고 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뉴질랜드나 호주의 바닷가에 가면 전복이나 소라가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 사람들이 싹쓸이를 해가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고 또 먹었습니다. 

그러자 나라에서 가져가지 못하도록 벌금을 물게 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입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나 여자가 또 다른 남자와 여자를 탐냅니다. 이것이 육체의 정욕입니다. 정욕은 건강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육체적인 욕망과 쾌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 정도면 족할 것 같은데 더 채우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육체의 정욕에 빠지면 그 순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쾌락만 눈에 들어옵니다. 죄도 인식이 안 되고, 죄가 끊임없이 미화됩니다. 베드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영혼의 탐색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감추어진 은밀한 육체의 욕망과 우리를 속이고 파멸하게 하는 것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시들지 않는 정욕을 다루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욕심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작은 욕심이라도 그대로 두면 자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고 했습니다. 작은 욕심이 잉태하는 순간 죄가 자랍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갈 데까지 가려고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루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그냥 버려두면 추한 인간이 됩니다. 비참해지고 갈수록 자신의 인생을 더 파괴하고 불행해집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육체의 정욕을 말씀 안에서 다루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삶의 스타일을 내 영혼의 부와 만족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영혼이 빈사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밀고 들어오는 육체의 요구는 강해지고 그 앞에서 버틸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유혹 앞에 무기력한 존재가 됩니다. 죄가 죄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말초적입니까?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거짓된 속삭임들로 가득합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채워주겠다고 하는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영혼을 돌보지 않고 방치해 놓으면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부도가 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욕망을 그대로 두면 나를 삼킵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욕망을 다루는 방법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순간, 더 가지려고 하기보다 반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눌 때, 내가 가진 것이 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것을 계속적으로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훈련의 초점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입니다. 획득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포기의 기쁨을 누리며 만족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훈련입니다. 

영혼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계를 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키고자 애를 쓴 사람과 육체를 만족시켜주는 쪽으로 기운 삶은 가는 길이 전혀 다릅니다. 영혼 관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혼은 한꺼번에 자라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주변으로부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영혼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서 그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이 영적 권위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넘어뜨릴 때만 해도 그의 영혼의 상태는 최상이었습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 기죽지 않고 공격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인가 다윗은 작은 유혹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면서 내면에 찾아오는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웅이 작은 유혹 앞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그의 인생이 곤두박질칩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한순간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풍성함을 누리며 영혼의 풍성함을 누릴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왔을 때 무엇인가 마음이 풀리면서 게을러지고, 하나님과 교제가 멀어지고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을 때 서서히 무너지던 영혼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영혼이 깊은 밤을 맞이할 때는 육체의 정욕 앞에 무기력해져 푹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작은 유혹도 내 인생을 무너뜨릴 결정적인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아무리 거대한 환란과 유혹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정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우리 영혼에 충만함이 없으면 우리는 죄의 유혹 앞에 질식되고 맙니다. 우리의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잊으면 안 됩니다. 육체가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영혼이 떠나가면 육체는 송장에 불과합니다. 

영혼이 없는 생명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아름다워야 인생이 아름다워집니다. 영혼이 부요해야 인생이 부요해집니다. 영혼이 만족해야 육체도 만족을 느낍니다. 아무리 모든 것으로 다 채워도 영혼의 만족이 없으면 욕구불만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즐겁습니다. 영혼이 자라야 인생이 자랍니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영혼이 초라하면 천하를 가졌어도 불쌍한 영혼입니다.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어서 날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면 거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십니다. 영혼이 깨끗하게 보존된 사람을 축복하기 원하십니다. 영혼이 더럽혀지면 육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혼의 그릇이 더러워지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이 없어집니다. 영혼의 정결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진리의 빛으로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 있는 육체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다루는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할 길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육체의 정욕은 줄어들고 영혼의 기쁨을 맛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순례자로서 목적지를 향해 길을 잃지 않으며 쓸데없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 영혼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은혜를 받아도 영적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 빈 공간에 육체의 정욕이 밀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되 충분히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고 갈증이 없습니다. 


2.행위의 문제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욕을 먹는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비방했을까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당시 그리스도인들 간의 악독, 기만, 외식, 비방으로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부정적인 모습, 신자들의 이중성들을 본 것이라고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비방 받는 일을 하지 말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순례자인 우리의 행실이 바르게 되어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핍박과 환란으로 흩어져 살면서, 당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이방 문화권의 고립된 사회에서 좁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 함께 모여 살다 보면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깥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이방인들이 비방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안 보는 것 같은데 사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교패를 붙여놓는 순간, 여러분의 모습은 노출됩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달랐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정직하면, 애국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세상의 지도자로 연결되었습니다. 민족이 술 담배로 망가질 때 농촌운동, 금주금연, 축첩금지운동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말은 보증수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적었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권위가 세상 속에서도 통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속에 보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업상 거래할 때 거래처 사람들이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압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는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직장 안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대표 선수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좁게는 교회와 연관이 될 수밖에 없고 확장하면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서 뛰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내가 드러난 이상 책임을 지는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정말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있었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사도행전의 마지막에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감동을 받았을까요? 방언 받는 것 때문일까요? 그것으로는 세상이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서 그들 가운데 핍절한 자들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의식이 해체되며 샬롬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본 적이 없고,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거류민과 나그네,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재산을 모으고 소유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세상을 투쟁하듯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순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짐이 무거우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나그네들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신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이해할 때 이 세상의 삶에 집착하거나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속에 거룩한 영향력을 미쳐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할 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자신의 영혼을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지키고 믿음 안에 살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행실이 드러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길을 걷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안티 기독교가 많은 이때에 우리의 행실로 세상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오래전에 작가 이청준 씨가 쓴 <당신들의 천국>은 기독교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소설입니다. 우리끼리 좋아하다가,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된다면 이곳이 사직 야구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라면 이 건물도 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세상이 우리로 인해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끼리의 천국, 세상과 격리된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살을 깎아서 세상을 감동시키는 일에 우리 삶을 드려서 세상 사람들이 “와, 정말 우리와 다르다”하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높여 드리는 그날을 꿈꾸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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