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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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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 (요 15:1-11)
   
지난주간에는 “사랑에 항복하다- Surrender to Love”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심리영성연구소의 소장이며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신 ‘데이비드 베너’의 책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라” “자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찾아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의탁, 사랑, 영성에 대한 책입니다. 
    
이 교수님이 한 여성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여러 책을 통하여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는데, 최근에 쓴 책을 보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어서 교수님의 견해에 반박하는 글을 적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의탁할 것을 권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심리학자로서 누구보다도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의 위험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 여성은 계속해서 교수님이 영적 지도자로서 무책임하며, “인간관계에서 힘이 남용되는 것을 무분별하게 간과하는 전형적인 남성”이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이 여성의 메일을 보고는 느낀 것은 ‘의탁’이라는 개념이 어떤 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매우 두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성목사도 오늘 ‘의탁’이라는 주제를 선택하였는데, 의탁이라는 개념은 최근 들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의탁이라는 말이 ‘복종’과 비슷한 개념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종속’이라는 말이냐고 합니다. 어떤 이는 개인적인 ‘힘의 포기’를 말하느냐고 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의탁이라는 신앙보다는 순종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의탁과 순종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의탁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밑바탕이 되고 있으며, 순종이 자라나는 토양이 됩니다. 의탁이 먼저요, 의탁이 이루어져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맹종, 기계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의탁이라는 말은 마음을 드리고, 사랑을 드리고 의존하고 신뢰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지음 받을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바르게 살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인생을 멋지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탁하여야 자기 중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넉넉한 자유로움을 얻고, 나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서 승리할 수 비결이 바로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고 나의 사랑을 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의탁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보겠습니다. 단순한 질문이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들 모두가 스스로에게 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감찰하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 인정하시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각자 진솔하게 자기에게 말해보십시오. 이 질문에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실망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하고 허물 많은 죄악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면서 실망하시고 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역겨워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앉아 있기도 죄송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흐뭇하세 생각하실 것입니까?  그러면 아멘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 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지, 때로는 쥐구멍이라고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감정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생각 안에 하나님의 생각을 담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크신 생각에 나의 생각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의 크신 성품에 나의 성품을 적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이라고 하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8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혐오하고 아파하면서 버려야 합니다. 죄를 버린다고 회개하였는데, 그러면 완전히 버린 것입니까?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입니까? 죄라는 놈은 여전히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고,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문제, 우리의 영원한 난제를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하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이대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의롭다고 보아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없는데, 한 사람도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 그리고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연결, 하나의 생명, 생명의 존속이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신비한 관계를 하나의 생명체인 포도나무를 가지고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가지가 없는 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 기둥, 줄기가 없는 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원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습니다. 줄기는 뿌리에서 오는 진액을 받아서 가지에 공급하고 잎에서 만들어지는 진액을 온 가지와 줄기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가짜 포도나무도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만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참’이라는 말씀은 “알레디노스”라고 하는데, 참된, 실제의,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진짜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것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순종이며, 좋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넝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원래의 굵은 줄기를 나무라고 하였고, 가는 줄기를 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무라고 하면 땅에 꼿꼿하게 서 있는 식물을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나무라고 부르지만, 소나무나 삼나무 같은 그런 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넝쿨로 자라고 있습니다. 

열매는 항상 가지에서 열리기 때문에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바라면, 전지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약한 줄기에서는 충실한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 좋은 가지만 남기고 약한 가지는 잘라버려야 합니다. 유대나라에서도 좋은 열매를 얻으려고 전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2절입니다. “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가 다 잘라버리고 열매를 맺는 튼튼한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합니다.

가지가 생존하려면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생명체의 생존이라는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면 머리와 몸통이 붙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다른 보이는 지체들은 몸통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1mm 라도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나무라고 하면 땅에, 흙에 심겨져 있어야 하는데, 땅에서 나오는데, 1cm라고 떨어지고 벗어나면 그 순간 죽음입니다. 

4-5절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 오늘 이 자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죽음 초래하는 것처럼 , 우리들이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다면 열매는 고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한 것 같고,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지나놓고 보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죄악을 일삼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참 포도나무이신 우리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 안에 머무를 때에, 우리의 인생을 열매를 맺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업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는 일들이 성공한 적이 있는지 말씀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에, 우리 사람들은 의존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가 우선이 아니라, 내가 먼저 예수님 안에 머물고,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탁이요 의존이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이 앞장서시고 인도하시고, 싸워달라고 맡기고 그리고 나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루에 몇 번이나 생각하고, 말하고,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을 의지하십니까? 예수님이 없는 가정, 예수님이 없는 사업, 예수님이 없는 직장,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지식, 예수님이 없는 출세, 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제외하고, 열외로 하고, 그냥 손님으로 모시고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승리한 것 같으나, 그것은 타락으로 이끌어 들이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사람이라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존귀하여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후에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식이 있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줄기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받고,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살다보니 성공적인 인생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줄기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야 가지는 살아나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명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 연합”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엔 크리스토- in Christ"라고 합니다. 바울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을 할 때에 롬6장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 5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추한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나의 삶을 사는데, 내 안에 주님이 사시면서 주님이 드러나고 나타나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항상 들려져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로 나누는 대화에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사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상호간의 대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려면 기도하지 않고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었어도 읽은 것으로 그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고,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나오시는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타나 선물을 주는 것처럼, 요술램프에서 요정이 나와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기도의 목표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과 데이트하는 것처럼 사귐을 가집니다. 요즈음 향심기도니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주님과 깊은 만남으로 사귐을 가지는 기도입니다. 

케에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 안에는 주님의 말씀이 거하고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 안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간구하게 되고, 소원하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안에 있고, 주님에게 우리의 인생을 의존하고 맡길 때에 주님의 말씀과 계명이 머물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고, 타락하여 죄를 범하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바른 삶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착한 체 하였지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의탁하여야겠습니다. 

한번은 중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곤명에 교회를 지어주려고 후보지를 돌아보느라고 다녀오는데, 귀국하면서 우리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였는데, 아이들을 위해서 선물을 사는데, 고심하게 됩니다. 무엇을 선물해야 좋은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손자들이 4명인데, 여자 아이들은 인형 선물이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자에게 알록달록하게 생긴 손목시계를 샀는데, 이것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형보다 비싼 시계인데, 손자 녀석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속이 상해서 자기 취향이 아니라니, 여자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좋아하니 심통이 나서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립니다. 그 녀석을 달래기 위해 장난감 상점에 가서 로버트를 사주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지 못하였습니다. 살 것도 없지만 사지 말라는 강력한 명령도 받았기에 그냥 왔습니다. 아내에게 내밀 것이 없었습니다. 선물도 못 사왔다고 하니, “잘 돌아온 게 선물이예요.” 

다른 선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안전하게 돌아왔으니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손자들은 선물이면 그만이지만, 아내는 남편이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분,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다, 나에게 주님이 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항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주님의 사랑만이 살 길이라고 투항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의존하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인생의 자유는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찾아옵니다. 주님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모든 것을 의탁하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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