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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죽음의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까? (히 2:5-18,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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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죽음의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까? (히 2:5-18,14-18)

이번 주일 설교는 좀 무거운 주제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신학생 때, 어느 목사님의 죽음에 대하여 듣고 감동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위암 말기였는데, 혼수상태에 들어가 장로님들이 병원 중환자실에 모셨는데 목사님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깨어나서 보니, 수혈하는 붉은 피를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바짝 야윈 얼굴이지만 빙그레 웃으시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노? 나는 어차피 가야할 사람인데, 저 피가 없어서 젊은 사람도 죽어가는데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해." 라면서  다 뽑게 하셨답니다. 그리고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 위하여 숨이 차지만 기도하고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장례식 때 광고하던 장로님이“우리 목사님은 명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교를 하고 가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지만 당시는 그 목사님의 심정과 믿음을 다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본문은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14-15절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최고입니까?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교인들이 정치적 핍박과 유대교의 종교적 핍박 아래서 죽음에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선 성도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절 ...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가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의 공포가 마귀 때문에 생긴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4절에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말로만 했다면 우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14절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려면 우리와 같아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17절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니,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8절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만큼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탄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죽는 것이 두려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18절 ...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이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야생 다람쥐나 새나 토끼를 보고 사랑스러워하여도 그들이 우리를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 고난을 당하게 하고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게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죄가 씻어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이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교인들을 종종 봅니다. 마귀는 여전히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죽인다.” 하면서 두려움을 주어 성도들 조차 영원한 구원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구원을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 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음의 공포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도 이길 수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이런 믿음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체험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믿을 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속죄함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이 자녀되는 복을 받으셨습니까? 믿음으로 그리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게 되고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가 아무 공로없이 천국에 가게 된다! 이것은 믿으면서 왜 죽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니까?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해주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장로 부부 수련회 때, 상해의 동방명주라는 타워에 올랐습니다. 468m 높이의 대단한 타워였습니다. 거기에 바닥이 유리로 된 층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정말 아찔하였습니다. 그 위를 한참 걸었습니다. 다들 두렵지 않으냐고 했습니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았으니 관광객들에게  올라가 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위험하면 왜 올라가 보라고 했겠습니까? 

그곳은 믿음을 체험하기 딱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두려움보다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는 믿음으로 걸어 보았습니다. 
저는 매주 이런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동방명주도 이만큼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우리가 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9절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린 자를 말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자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여도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보게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 성육신하신 것과 십자가 고난, 부활 승천하신 그 모든 것을 다 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아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삶이 변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며 죄를 이기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누가복음 21장 말씀으로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징조, 전쟁과 자연재해와 무서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박해를 당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무슨 말할지 알려 주리라!는 것입니다.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능히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우리의 몸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장로 부부 수련회 때 유용희장로님께서 주기철산정현교회에서의 설교 제목은 [오 종목(五 種目) 나의 기원] [나의 다섯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주목사님 설교의 첫째 대지가“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이었습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니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 그러나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가치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대지로‘긴 기간 당하는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세 번째 대지로‘노모(老母)와 처자(妻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대지는‘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사님은 한탄하셨습니다.  
...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平壤)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나의 사랑의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그리고 끝으로“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처럼 이렇게 순교하실 수 있습니까?” 누가 묻는다면 저는 결코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장애인이 될 처지에서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제가 어찌 당당히 순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뿐입니다.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은 사람이 통이 크고 결단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제자들도 두려워서 감히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가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난 다음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찬송하며 갔습니다.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도 두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과 또 다른 고백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였던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죽는 것이 두려운 분은 아직 예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친밀하지 못한 채, 여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찌 계속 이렇게 살 것입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구나!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군목 제대를 할 때 부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위병소에서 한 형제가 제 차를 알아보고 웃으며 나와 인사를 하였습니다.“목사님, 제대하신다지요, 저도 10월이면 제대합니다.”저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형제를 꽉 끌어 안아 주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등병 때, 자살을 시도하여 오랫동안 상담을 하던 형제였습니다. 대대장으로부터 그 형제의 마음을 바로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담하면서 얼마나 낙심스런 순간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제대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차를 타고 부대를 빠져 나오면서, 그 형제가 무사히 제대하게 된 것도 감사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형제에 대하여 쉽게 낙심하고, 포기할 뻔 하였던 제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안된다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할 뻔 하였나?’여러분만 포기하지 않으시면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 아내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고3 때 장인 어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그 후 겪었던 많은 고생이 제 아내 마음에 죽음의 두려움을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결혼하고서 늘 저도 일찍 죽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과로하다가 죽을까봐, 열심히 안하면 하나님께 벌받아서 죽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제 아내에게 암이 생겼습니다.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고 제게 전화를 하던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보, 나, 암이래요.‘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아내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시려는 주님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아내도 저도 기도하면서 두려움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수술을 앞둔 어느 날 제 아내는 더 이상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더 이상 살려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죽어도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때 살려달라고 할 때는 누릴 수 없었던 평안이 밀려왔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붙잡으니 사탄이 역사한 것이었는데, 두려움을 놓으니까 사탄이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샘물교회 사태가 일어나기 전, 제 아내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선교여행 중 폭도들에게 납치되고 저에 대한 보상금을 논의되더랍니다. 그 때, 제 아내는 장로님들에게 가서‘남편이 죽는다 하더라도 교인들의 헌금을 이교도들에게 줄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그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 아내의 두려움이 떠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 뿐 아닙니다.
인생의 의미, 진정한 축복의 길이 다 깨달아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을 이길 방법이 생깁니다. 능력이 임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죽음도 죄도 마귀도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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