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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의 말씀 (사 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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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말씀 (사 50:4-10)


이사야서에는 ‘종의 노래’라고 이름 붙여진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42:1~14, 이사야 49:1~6, 이사야 52:13~53:12,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50:4~10입니다. 이 본문들이 ‘종의 노래’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첫 번째 이 본문들이 찬양을 위한 시적인 표현의 양식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본문들의 내용이 ‘나의 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본문들이 표현하는 종들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고난당하고 있는 종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의 종’ 또는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고난당하고 있는 종의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의 고난 받는 종은 자신의 고난을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특별히 받은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0장 4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종은 하나님께 ‘학자의 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4절 말씀입니다.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6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아 어떠한 일들을 하게 되었는지, 자신에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에게 학자의 혀를 주시고 그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에게 주신 이런 은혜로 종은 곤고한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와 줄 수 있게 되었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참되고 충성된 종이 되었습니다. ‘학자’의 의미는 일정한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학자의 혀’라고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전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종’이나 ‘학자의 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목회자 또는 목회자의 설교일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에게 목회자는 하나님께 ‘학자의 혀’를 받아 말씀으로 성도들을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인지 성도들은 목회자가 설교를 잘하길 원합니다. 

성도들은 소위 ‘능력의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데 ‘능력의 말씀’이란 결국 설교를 잘하는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또한 ‘능력의 설교’ 뒤에는 반드시 부흥과 교회 성장이 뒤따라 온다고 믿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를 잘 한다고 하는 몇몇 목사님들이 그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는 곧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되었습니다. ‘능력의 말씀’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구름 떼 같이 모여듭니다. 

성도들은 교회로 기도원으로 ‘능력의 말씀’을 찾아 떠납니다. 또한 인터넷 검색창에 ‘능력의 말씀’이라고 검색해보면 ‘능력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목회자들이 화면 가득히 나옵니다. 그 교회들의 특성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목회자의 이름이나 교회 이름만 보더라도 그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형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컴퓨터 화면만 클릭하면 ‘능력의 말씀’을 장소를 불문하고 들을 수 있습니다. 

‘능력’을 헬라어로 '두나미스'라고 합니다. 한 때 어떤 분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 ‘두나미스’의 어원을 밝히면서 ‘다이나마이트’가 이 어원에서 나왔으므로 ‘두나미스’를 현대의 다이나마이트(폭탄)의 힘과 같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폭발, 뜨거움, 그리고 빛, 연기를 만들어내는 폭탄의 능력이 ‘두나미스(능력)’라고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폭발적인 부흥과 급속한 교회 성장 등등.. 무엇인가 화려하고 가시적이고 급속한 감각적 변화들이 능력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엄밀히 따져보면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도 바울이 ‘두나미스(능력)’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다이나마이트(폭탄)’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가 품고 있던 뜻은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탄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한 ‘능력’이란 즉 ‘빈 무덤’의 능력이었습니다. ‘빈 무덤’의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이 폭발적이지 않습니다.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가시적이거나 감각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빈 무덤’이야말로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가장 큰 증거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능력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또한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시 정의(definition)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이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에 자신의 삶을 동참시키는 사람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이끌 수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빈 무덤’의 능력보다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이고 즉각적이며 화려하기까지 한 능력을 더 좋아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목회자를 더욱 좋아합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내어놓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능력, 그런 능력이 있는 말씀, 그런 능력을 가진 목회자, 이런 능력의 말씀과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좋아하는 성도... 이런 경향들이 한국 교회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들이 복음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며 더 나아가 성도들의 신앙의 삶도 파괴해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도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학자의 혀’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깨우치는 능력을 받았고 말씀을 학자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종은 이 능력으로 곤고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참으로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종은 자신의 삶을 여호와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고난의 삶에 기꺼이 동참시켰습니다. 그는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50장 6절 말씀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모욕을 주는 자들에게 종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종은 50장 7절 말씀에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라고 하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폭력과 모욕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도와 주시기 때문이며 8절 이하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계시기)~” 때문입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도와 주시고 여호와께서 자신을 의롭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수치로 여기지도 않으며 달게 받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종의 다짐은 훗날 십자가 앞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짐 이었고 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다짐이었습니다. 또한 이 다짐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능력’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함께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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