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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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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은사를 구하라 (고전 13:1-13)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사는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섬기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이나 긍휼을 베푸는 것도 은사에 해당합니다(롬12:6-8).

우리가 받은 직분도 은사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가르치고 치리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교사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남녀선교회의 임원들은 섬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저마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나는 아무 은사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은사를 활용해 하며, 조금이라도 은사로 인해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은사가 있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13장에서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찬가로 되어 있는 까닭이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도는 사랑이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크고 귀한 은사라고 하면서 사랑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아무리 탁월한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방언의 은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방언이란,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의 말이란, 천사들이 사용하는 신령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외국어 뿐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할 줄 안다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그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 탁월한 은사가 아무 소용이 없고, 다만 시끄럽게 우리의 고막을 울리는 구리나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아무 유익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를 소란하게 만들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은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잘 해석하고,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신령한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그의 예언이 사람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설교나 권면이 아니라면 듣는 이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다가서야 감화를 줄 수 있지 “당신, 믿지 않으면 지옥 가요”라고 겁을 주면 도리어 반발을 삽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줄 때 감동을 받고 주님께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식의 은사가 있어 모든 지식을 알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월감에 빠져 남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시험에 든 형제를 보고 따뜻하게 권면하지는 않고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면 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뿐 아니라, 구제의 은사가 있어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이 행한 것이라면 참된 구제라고 할 수 없고, 자기 만족을 위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자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고 분노와 미움만 가득하다면 그런 희생이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무익하고 가증스러운 것이어서 교회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며 형제들에게 유익을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행동은 어린아이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줄지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0:42).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걸인을 만났습니다. 걸인은 이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한 푼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 사람의 수중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걸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형제여, 지금 나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말하기를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값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속성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서 도리어 상대방을 괴롭히고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전에 파키스탄에서 한 청년이 자기와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처녀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실명을 하고 화상을 입어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러고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만족과 사랑을 혼동하고, 소유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1)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아주신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오래 참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2) 사랑은 온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온유란,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나 죄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3)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란 남을 시기하고 원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잘 사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시기하면 안 됩니다. 남이 가진 것을 보고 나는 왜 없느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상대방보다 자기를 높이는 행위이므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을 칭찬하고 높입니다.

5)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인도 선교사로서 헌신했던 윌리엄 케리가 어느 만찬회에 참석했는데, 거르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케리를 망신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케리씨,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러자 케리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각하. 구두 짓는 사람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케리 선교사가 자기를 낮추었을 때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교만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습니다.

6)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의가 올발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으시고 예의를 지키셨습니다. 그 여자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시면서도 진심으로 회개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무례한 언행은 사랑으로 행치 않는다는 표와 같습니다.

7)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곧 이기주의가 몸에 배여 있습니다.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도리어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8)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성내지 않습니다. 성을 낸다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실수가 실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9)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지난날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악행을 기억하지 않고 그가 돌아오자 잔치를 배설하며 환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과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10)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사악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11)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의 편에 섭니다. 

12)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면 어떤 무례함이나 모욕도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모든 모욕과 고초를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13)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사람을 믿어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의 말을 믿어 줍니다.

14)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이는 사람이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를 갖습니다. 아담 클라크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어려서 공부를 못했습니다. 하루는 저명한 인사가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담 클라크를 가리키면서 “이 애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머리가 나쁜 학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손님은 돌아가기 전에 아담 클라크에게 와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염려말아요. 너도 이 다음에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있거든.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해 보아라 계속해서 노력하면 잘 될 거야” 그 손님이 기대한 대로 후에 아담 클라크는 훌륭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15)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견딥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핍박을 견딥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들이 어려움을 견딥니다. 사랑의 힘은 이처럼 위대합니다.

영국문화협회가 창설 70주년 기념행사로 102개 비영어권 국가에서 4만여 명에게 70개의 단어를 제시하고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게 한 결과 ‘mother' 곧 어머니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비단 영어 단어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mother‘ 곧 어머니라는 단어는 아이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아니, 손자를 둔 노인들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남자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도 좋아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머니를 좋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father보다 mother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사랑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성애가 있지만, 그래도 모성애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mother이라는 단어를 1위로 뽑은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성경이 말씀하는 아가페 사랑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모성애 역시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면이 있습니다. 내 자식이니까 모성애를 발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모성애나 에로스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원래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쓴 것인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두 다 ‘아가페’를 썼습니다. 아가페는 본능적인 육친의 사랑이 아니고, 이성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아가페는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에도 아가페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가페 사랑을 하려면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가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이 목숨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죄인이었을 때에 일방적으로 그 같은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랑에 감격해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사랑에 목말라합니다. 나방이 불을 찾아 헤매듯이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서 헤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왜곡된 사랑을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실은 자기 위주의 사랑,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마음이 완악해서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은 원수조차 사랑하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한편, 이 같은 사랑을 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희생당할 때까지, 상처를 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에까지 이르셨습니다. 모든 병에는 치유책이 있습니다. 단, 치유될 수 없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일을 알아보고, 자신의 주위를 살펴보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심부름꾼이 아니던가요?”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언가 나의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성격을 잘 말해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다가 나의 언행을 비교해 보면 내가 사랑으로 행하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큰일을 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돈을 바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표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는 사랑할 줄 아는 성도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이르기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행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데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여름이 되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바닷가로 가서 놀았습니다. 그러나 수영을 할 줄 모르니까 영 재미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수영학원도 없고 해서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물속에 들어가서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짠물을 마셔가면서 열심히 연습합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헤엄 칠 수 있게 되고, 청소년 시절에는 상당히 먼 곳까지도 갔다 올 정도로 실력이 늘어납니다. 

알고 보면, 사람의 몸은 다 물에 뜨게끔 되어 있지만, 훈련을 통해서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가라앉고 맙니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사랑하는 연습을 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의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의 완전성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첫째로,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천국에 가면 더 이상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 땅에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예언이 성취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게 될 것이므로 이 땅에서 알고 있는 영적 세계의 지식은 더 이상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또 천국에서는 모두다 하늘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므로 방언의 은사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서 역사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을지라도 그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7장을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더니 그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는 한 여자가 이 사실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이 광경을 보고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르시기를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기를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하시고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인정 받을 것은 사랑으로 행한 것뿐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완전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은 온전하지 못하고 마치 구리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희미합니다. 우리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계시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영적 지식은 완전해 질 것입니다. 마치 환한 대낮에 밝은 태양빛 가운데서 보듯이 선명하게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제일 귀합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될 것이나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히 있을 것이나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믿음과 소망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믿음과 소망을 주실 리 만무합니다.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업적을 중요시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는 데 관심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사랑에 기갈을 만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인정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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