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5-22)

첨부 1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5-22)

(고후 1:15~22)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예수님의 별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임마누엘’(사7:14절, 마1:23)입니다. 이 별명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 36절)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로 나오는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를 대신해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이 유월절 희생양과 같기에 그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이 있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 (계 3:14절) 이라는 별명입니다.

계시록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고, 잘 들어보기 힘든 별명입니다. 그러나 이 별명에는 예수님의 면면을 잘 보여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닮아야 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별명은 단지 별명이 아니라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은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분의 뜻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곧 그 사람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 반응을 잃었을 때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합니다. 능력을 능력으로 알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의 지식과 능력만을 신뢰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교만하고 이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답게 반응할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기쁠 때는 웃음으로, 안타깝고 애통할 때는 눈물로,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로… 예수님의 웃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웃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 저에게 환상 중에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미소는 늘 따뜻했습니다. 결단을 하고 난 뒤에도 그러했고 죄악을 고백하고 난 후에도 늘 환한 미소로 저를 바라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아픈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무리들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통분히 여긴다’는 말은 원어로 ‘크게 분노하다’는 의미입니다.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슬픔을 아신 분이셨고, 슬픔에 참여하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일을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의 가장 극적인 면은 아버지 앞에서 ‘예’가 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 앞에서, 그분의 뜻에 대해 ‘아니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 주님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예’가 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예’의 삶, 이 삶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예’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1. 진실한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예’의 삶은 진실함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자 진실한 분이셨습니다. 
공동번역에서 보면 19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바노와 디모테오와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입니다. 원문에는 “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입니다. ‘아멘’이란 믿는다는 말입니다.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가 됩니다. ‘진실하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의 진실함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안에는 거짓이 없으십니다. 죄가 없으시기에 주님 안에는 거짓이 없고, 예수님 안에는 변덕부림이 없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진실을 배우고 이 진실함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예’하지 ‘아니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진실 안에서만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할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바로 진실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참 매력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같고 항상 꾸준한 모습을 보면 참 매력적입니다. 항상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무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바로 그 ‘진리의 허리띠’는 ‘진실의 허리띠’입니다. 진실한 사람을 거짓이 틈타지 못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은 진실 그 자체가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사탄이 쉽게 공략합니다.
언제든지 타협하고, 언제든지 속이고, 언제든지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견고한 성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매력을 가지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바로 진실한 사람, ‘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2. 반응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예’는 반응하는 신앙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온전히 ‘예’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이 신앙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반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행동의 반응입니다.

로마서 10:9~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입으로 시인되어야 합니다. 곧 구체적인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남녀 간에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짝사랑입니다. 짝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힘도 없습니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입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다.’라고 알고만 있으면 의미 없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감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반응입니다. 믿음도 반응입니다. 따라서 반응하는 신앙이 능력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반응하십시오. 기도와 말씀에 대해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아멘’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반응하십시오. 시대가 점점 악해질수록 사람들은 반응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들어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것에 대해 온전히 경고하셨습니다. 

(마 11:16~17)“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잔치 집에서 피리를 불지만 사람들은 시큰둥합니다. 장례식에서 상주들이 슬피 울지만 애통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 없이 역시 시큰둥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혹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리고 약속에 대해 ‘아멘’ 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이 부분에 대해 힘주어 말씀합니다. 
(20절)“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민수기 23:19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셨고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들었을 때, 누군가 기도할 때, 찬양하면서, 문득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이 떠오를 때… ‘아멘’하십시오. 그것이 능력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반응하는 사람의 신앙과 삶은 다릅니다. 교회도 다릅니다. 반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교회를 볼 때도 그 교회 안에 생기가 흐르고 은혜가 넘칩니다.

집회를 인도하다보면 반응이 있는 교회와 반응이 없는 교회를 봅니다. 반응할 줄 아는 교회의 성도들의 얼굴은 밝습니다. 예배 후 감사의 인사뿐 아니라 서로서로 밝은 표정으로 교제하고 나누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차가운 반응의 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마치 썰물같이 다 빠져 나가버리고 교회가 썰렁합니다.
브라질에서 목회할 때 동양선교교회 ‘실버수련회’에 주강사로 부탁을 받았습니다. 3박 4일 동안 콘도에서 진행되는 행사인데 수련회 강의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오전, 오후 2시간 씩, 3일을 강의하게 되는 것이니 총 12시간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수련회 참석하시는 분들이 말 그대로 실버, 즉 백발의 노인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탁을 받고 난 후, 2주가량 기도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묵상하며 준비를 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듣는 이나 전하는 이나 피차  간에 은혜 받게 하옵소서.” 

솔직히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 7, 80대의 어르신들이 두 시간동안 앉아서 설교를 들으실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확신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수련회 첫날, 이제껏 목회하는 19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집회와 예배를 인도해 봤지만 정말이지 기억에 남을 만큼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간의 수련회동안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결단하게 하셨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회의 참석차 한국에 방문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선배 목사님들의 부탁을 받고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인천에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회중을 둘러보는데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30분 동안 ‘아멘’ 소리 한번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배 목사님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부임해 오신지 얼마 안 된 때였고, 부임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많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는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닫힌 교회에는 아멘 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반응은 믿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삶입니다. 그리고 복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기도에 반응하십시오. 피리를 부는데 춤을 추지 않는 사람, 곡을 하는데 슬퍼하지 않는 우리는 아닌지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서 반응할 줄 아는 복이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아멘은 순종의 신앙입니다.

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 이것이 ‘예’가 됩니다.
순종이 빠지면 신앙은 무너집니다. 자유와 생명은 순종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자유와 참 생명은 주어집니다. 순종할 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못할 때 자유는 빼앗깁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는 맛은 있을지 모르지만 에덴을 잃고 맙니다. 생명을 잃고 맙니다. 자유를 잃고 맙니다.
순종 안에 자유가 있고, 순종할 때 생명이 있습니다. 이 순종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100퍼센트 깨끗하게 순종하셨습니다.

(빌 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에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곧 ‘예’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역행한다면, 그것은 ‘아니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고 행하는 자로서 ‘예’만 있을 따름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하면서 가진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임의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갑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갔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여행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드로아에서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모습을 보고 마게도냐고 가게 됩니다. (행 16:9~10절)

그는 로마도 가고 싶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의 중심지인 로마를 복음화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기를 사모했지만,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보내실 때 비로소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님의 뜻에만 순종할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획했지만, 성령께서 길을 열어주지 않자,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예’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17절)“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하고, 사람에 대하여는 ‘아니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지 사람을 따라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가운데 리챠드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토인들에게 누가복음을 그들의 말로 번역하여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매일 10절씩 번역하여 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눅 6:30절에 있는 말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번역하지 않고 뒤로 가서 다른 말씀을 번역하여 강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것을 번역하여 가르치면 토인들이 선교사의 소유를 다 달라고 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번역하여 가르치자마자 예상대로 토인들이 선교사의 것을 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토인들이 선교사의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가져갔던 것을 도로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토인들은 마침내 리차드 선교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샘 슈메이커 목사라는 분이 ‘평범한 인간을 위한 특별한 생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생활’ 호감이 가지 않습니까?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생활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생활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달렸다고 합니다.
“10퍼센트만 순종하는 사람은 10퍼센트의 행복을 누릴 것이요, 절반쯤의  생활만 순종하는 사람은 절반만의 행복만 발견할 것이고, 생활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100퍼센트의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하십니까? 자기의 의지를 따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일까?’
그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순종은 긍정의 삶입니다. ‘예’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니오’하는 것이 많습니까, ‘예’하는 것이 많습니까?
생각을 ‘아멘’으로, 말을 ‘아멘’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과 환경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하십시오. ‘예’하는 삶과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삶의 질은 다릅니다. 같은 풀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내지만, 뱀은 독을 냅니다.

같은 환경 같은 신앙, 같은 일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예의 삶이 될 때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답고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의 삶은 능력입니다. ‘예’의 삶은 지혜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길입니다. 이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고 저와 여러분의 삶이 더욱 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