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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당한 주님의 사랑 (마 23: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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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한 주님의 사랑 (마 23:37-39)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김형석 교수가 쓴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960년대의 너무나 유명한 베스트셀러인데, 제가 청소년 시절 그 책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모릅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푸른 창공을 바라보며 영원한 세계를 동경해보고,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함을 절감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거절당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사랑이란 주제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인터넷에 ‘거절당한 사랑’이라는 문구를 쳐보았더니, 이런 유머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었지만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아직 잠이 덜 깬 남편의 등을 파고들며 난 사랑고백을 했다. “자갸, 난 자갸 한나빡에 읍써” 아! 슬픈 내 사랑, 난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 누군 둘여? 졸려 죽겠고만....” 그리고 거절당한 사랑에 맘 아프기는커녕 한바탕 웃어젖힌 후 일어났다. 실은 어제 아침에도 “자갸, 난 자갸 한나빡에 읍써” 했다가 “아! 누군 둘여? 바빠 죽겠고만..” 하고 거절당했었다. 요즘 내 사랑은 자꾸만 거절을 당한다.> 사실 이것은 거절당한 사랑이 아니지요. 

사람들은 살면서 수없이 많이 거절을 당하며 삽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할 때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고, 회사에서 사업계획을 올렸지만 결제 자로부터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음 깊이 흠모하는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사랑은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역시 인터넷에 실린 거절당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취업준비로 정신이 없는 경영학과 4학년 K군, 학점도 괜찮은 편이고, 자격증도 많이 따놨는데, 번번이 형편없는 토익 점수 때문에 서류 심사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토익 스터디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혼자일 때는 막막하기만 하던 영어의 가닥이, 이제야 조금씩 보이는 듯싶기도 했다. 게다가 외롭고 쓸쓸한 취업의 길에 든든한 동지 한 명을 얻은 듯 했는데, 바로 영문과 3학년 S양이었다. 단아한 외모에, 사려 깊은 성격, 게다가 취향이나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서, 한쪽에서 한 마디를 꺼내면 한 쪽에서 바로 그 말을 이어 대화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잘 통하는 사이였다. 

그런 그녀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는데....그러던 어느 날 “어제 그거 봤어! 너무 재미있던데..” “아 오빠도? 맞아, 남자 주인공도 너무 멋있구, 너무 로맨틱하고” K군은 슬며시 S양을 떠보았다. “그래 상큼한 러브스토리던데, 아 가을도 오고...나도 어디 그런 러브스토리 없나? 참 너 남자 친구 있어?” “남자 친구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요새 좀 그래!” “아 그렇구나, 사이가 별로인가 봐?” “음 좀 그래, 캐나다로 어학연수 갔어. 그런데 요새 연락도 뜸하고, 소원해진 것 같아”

남자 친구가 있단 말에 처음엔 실망했던 K가 아니던가? 게다가 S양의 말을 들어봐서 어학연수 가서 연락도 안 하는 것 같고, 아마 거기서 딴 여자가 생겼겠지! 나쁜 놈, 아니지 고마운 놈인가? S양도 저렇게 말끝을 흐리는 거 보면, 그 애보다 나한테 마음이 더 있는 게 분명해. 그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내가 나쁜 놈이 되도 좋아. 하지만 그녀를 잡지 않는다면 후회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에 더더욱 S양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K군이었다. 

둘은 같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취업준비도 하면서, 조금씩 정을 키워나갔다. 주말이면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근처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S양은 바쁜 일상 속에서 누리는 작은 여유를 즐거워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건 K군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바래다주던 골목길 앞에서 K군은 S양에게 말했다. “나 너 너무 좋아해...내가 이러면 나쁜 놈인 줄 알지만, 내가 나쁜 놈이 되고서라도 널 잡고 싶다. 이런 내 맘 받아줄래?” S양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빠. 나도 물론 오빠가 너무 좋아. 

근데 내 남자 친구는 내가 힘들 때 함께 있어줬던 아이고, 그래서 마음이 복잡해, 걔를 만나기 전에 오빠를 먼저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미안해, 지금은 오빠 맘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그래 많이 어려울 거야.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것 아냐. 충분히 생각해보고, 니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미안해, 나 오늘 사실 오빠한테 마지막 인사하려고 나온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 친구가 며칠 전 입국했어. 어학연수하다 말고, 내가 그만 끝내자니까 갑자기 달려온 거야. 내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소중한 존재였는지 몰랐어. 

그는 내가 힘들 때마다 내 곁에 있어줬는데...내가 나쁜 애였어. 오빠한텐 정말 미안한데.....난 도저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K군은 절망했다. 눈물이 왈칵 나서, 남자 자존심도 버리고 울며불며 사정도 해봤지만, 그녀는 이미 굳은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K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니 뒤엔 언제나 너만을 사랑하고, 또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잊지 말아줘. 언제든 힘들고 지치면 내게 와도 돼. 그땐 언제나 웃으면서 널 받아 줄 테니까” “오빠,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그럼 오빠가 너무 힘들잖아” “그럼 그냥 좋은 오빠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오빠 동생 사이라도 좋아. 그건 괜찮겠지?” 그런 일을 겪는 후 K군은 필자를 찾아와 울고 불며 하소연했다. 

이젠 그만 포기하라고 충고했으나, 그는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서는 괴로워하면서도 그녀 앞에서는 쿨한척, 태연한척 애쓰는 녀석이 안쓰러웠다. 가끔 그냥 남자 친구 몰래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는데 ,영화를 함께 보거나,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녀의 고민거리, 연애 상담마저 들어주며 좋은 오빠 노릇을 자처했다. 그렇게까지 그녀를 잡고 싶었던 것일까? 지켜보는 필자로써도 참 안타까웠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어떻든 거절당한 사랑은 안타깝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절당한 기도’도 있습니다. 다음은 김준곤 목사님의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라는 간증문의 일부분입니다.<신희의 여명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씰 박사에게서 선고받고, 나는 신희의 신앙을 준비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터라,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 “신희야, 너 주님 만날 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네 남편과 두 딸에게 남길 말도 녹음해둬야 하겠다. 네 딸들의 양육은 조금도 염려 마라.” “아빠, 고마워요. 사실은 진작부터 그 일을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미안해서 말씀 못 드렸어요. 내게는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다만 주님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는 것이 걱정일 뿐이에요. 그런데 고통이 무서워요.” 우리가 그날 기도회를 가질 때 신희는 성령충만 하여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 구구절절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주님 만일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어떤 잔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내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고통의 잔은 감당할 힘이 없사오니, 주님이 책임지고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신희의 최대의 공포는 참을 수 없는 극한 고통이었다. 진통제들이 잘 듣지 않아 모르핀을 써야 하는데, 말기 암환자에게는 모르핀도 잘 듣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의사들은 최후까지 모르핀 쓰는 일에 인색하여, 많은 암환자들이 죽기 전 일주일 정도는, 거의 광란 상태로 들어간다고 한다. 신희가 고통을 참는 것을 보면, 이마에 식은땀이 베고, 두 발과 두 손목을 비틀고 온 몸을 비틀며 주님을 부른다. 나중에는 신희는 누워서 기도하고, 나와 내 아내는 끊임없이 신희의 손목을 잡고 신음 같은 기도를 했다. 

신희가 기도할 때마다, 나는 내 죄를 창자까지 토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신희를 번갈아 부르며 숨 쉬듯 기도했으나, 내 생애의 가장 애절한 기도는 무참히 거절당했다.> 여기까지만 소개하면 거절당한 기도에 대하여 주님께 원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좀 더 들어보십시오. <신희는 내 딸이기 이전에 주님 딸이다. 내가 사랑하기보다 주님이 더 사랑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신희가 이 세상에서보다 천국에서 더 필요하셔서, 더 좋은 곳으로, 최선의 것을 예비하시고, 높이 쓰시려고, 특별 고통 코스로, 특별 연단을 시켜, 특별히 불러 가신 것이다. 그런 주님을 나는 죽을 만큼 진실 되고 순수하게 찬송한다. 

예수님은 생명이다. 진리다. 사랑이다. 용서다. 복음이다. 구원이다. 천국이다. 자유다. 해방이다. 예수님이란 캡슐 속에는 우리가 열망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내게는 숨이다. 목숨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물과 물고기, 공기와 생물, 숨과 생명의 관계다. 숨이 끝나면 죽음이듯이, 예수님 없는 내 의식은 숨이 끊어져 죽은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거절당한 애절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도 거절당하신 기도가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고통에 가득 찬 아들의 신음 소리를 못들은 체 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까?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죄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죄를 걸머지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은 그 때 자신의 아들로 보시지 않고, 죄인 중의 괴수로 보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행동을 개시하셨더라면 어찌될 뻔 했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거절당한 주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선민이면서도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유대인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임을 내다보시고 깊은 탄식에 젖으신 것입니다. 물론 이는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멸망의 예고인 동시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된 유대 종교의 파멸을 선언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상대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록 슬픔의 심도도 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탄식은 차라리 오열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목메어 울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멸망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을, 주님께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 자녀를 모으려고 수도 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을 내다보시고 주님께서 오열하는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탄식입니다. 그들의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아파하는 탄식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개나 천둥이 치며 비가 내릴 때에, 혹은 독수리나 매와 같은 맹금류들이 먹이를 찾고자 날 때에, 암탉이 그 새끼를 부르며 자기 날개 아래 품어 보호하려는 것과 같이, 심판 아래 놓인 예루살렘 거민들을 품고자 사랑으로 외쳤던 주님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계속적인 반항의 역사였습니다. 렘 2:30절에 보면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고 했고, 렘 7:13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으며, 렘11:7-8에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 집은 결국 폐허로 변하고 오래지 않아 무너집니다. 주인이 버린 집은 음산하며 곧 무너집니다. 성전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성전은 결국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표현인 동시에, 오늘날도 죄악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집에 빠져 있거나, 세상의 멸망과 함께 파괴되고 사라질 것들에 연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러브레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나를 잘 모르지만, 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시 139:1) 너의 앉고 일어서는 모든 움직임과(시 139:2) 너의 머리털까지도 다 셀 수 있을 정도지(마 10:29-31) 나는 너를 내 형상대로 존귀하게 만들었단다.(창 1:27) 너를 복중에 짓기 전부터 나는 너를 알았고(렘 1:4-5) 창세전부터 너를 택하였으니(엡1:11-12) 너는 우연이 아닌 나의 계획가운데 지어졌단다.(시 139:15-16) 네가 태어날 정확한 때와 살 곳을 미리 정하였으며(행 17:26) 너를 어머니의 모태에서 신묘막측 하게 만들어 세상에 태어나게 하였다.

(시 139:13) 나는 너의 진실한 아비이며(요 8:41-44) 너와 늘 함께 하고 있는 완전한 사랑이니라.(요일 4:18) 이 사랑을 아낌없이 주련다.(요일 3:1) 너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의 아비이기 때문이란다.(마 5:48)) 나는 너에게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리니(마 7:11) 나는 온전한 아비이며 어미니라.(마 6:31-33) 모든 좋은 선물이 다 내 손에서 나오기에(약 1:17) 나는 너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든든한 아비니라.(마 6:31-33)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렘 29:11) 항상 너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것은(렘 29:11)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렘 31:3)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은, 바다의 모래 같아서 일일이 셀 수 없구나!(시 139:17-18) 나는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며(습 3:17-18) 너에게 복주기를 그치지 아니하리니(렘 32:40) 너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란다.(출 19:5) 네가 마음을 다하여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되리니(신 4:29) 보아라. 나는 너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며(렘 33:3) 나를 기뻐할 때에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시37:40) 내 딸아! 너의 모든 환난 중에서 너를 위로하며(고후 1:3-4) 너의 마음이 상하여 낙심할 때 너를 더욱 가까이 하리니( 시34:18) 나는 너의 위로자니라.

(살후 2:16-17) 내가 목자 같이 내가 너를 품에 안아 인도하며(사 40:11) 언젠가 네 눈의 모든 눈물을 씻기고(요 21:3-4) 이 땅에서 겪은 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다 사라지게 하리니(계 21:3-4) 내가 예수를 사랑한 것 같이, 너를 사랑 함이니라.(요 17:23) 내가 예수를 통해 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나니(요 17:26) 예수는 나의 형상이니라.(히 1:3) 그를 통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주고(롬 8:31) 너희 죄를 묻지 않았으며(고후 5:18-19) 너와 화목하려고 나의 아들을 죽게 하였다.(고 5:18-19) 그의 죽음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니라.(요일 4:10)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는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었다.(롬 8:31-32) 그렇기에 내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니라.

(요일 2:23) 내 딸아! 너를 항한 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롬 8:38-39) 네가 돌아오는 날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를 베풀리라.(눅 15:7) 나는 언제나 너의 아비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엡 3:14-15) 어서 나에게 돌아오렴. 지금도 두 팔을 벌려서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단다.(눅 15:11-32) 너를 사랑하는 아비로부터...>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지 마시고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세세무궁토력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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