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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족 (전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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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 (전 6:1-6)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이게 인생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하게 반복된다고 느껴질 때, 어떤 프로젝트를 끝내고 기대한 만큼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때, 이뤄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이게 인생인가?’ 라고 다소 냉소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혜자 솔로몬은 두 가지 점에서 ‘이게 인생인가?’ 라고 회의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얻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 등을 누려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어떤 분이 장례식장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고인은 참 어렵게 살던 분이었습니다. 
자수성가해서 처음에 18평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악착같이 모아서 35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분당의 65평짜리 아파트에 당첨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사를 갔습니다. 
왕소금이란 말을 듣고 살던 사람이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3천만 원이나 들여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그리고 집들이를 한 뒤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이런 유의 얘기를 가끔씩 듣습니다. 
참 허무하지 않아요? 

‘기껏 이렇게 가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했는가?’ 
악착같이 벌은 돈을 한번 누려보지 못하고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도 허무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생 아파트 평수나 늘리다가 간다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게 인생인가?’ 하는 회의가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이렇게 사는 인생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2) 두 번째로, 솔로몬이 ‘이게 인생인가?’라고 회의한 것은 만복을 받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유대인들이 복으로 여기는 것 중에는 장수하는 것과 자손을 많이 두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가 변화됨에 따라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이 복으로 여겨지지 않은 때도 있지만 아무튼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자손을 많이 두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3절은 이런 복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만족함이 없어요.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주변에서 ‘참 복도 많으시네요?’ 라고 칭찬하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에 만족함이 없다면 그게 무슨 사는 게냐는 질문입니다.

전도서의 가르치는 방법이 그렇듯이, ‘그게 무슨 인생이냐?’ 라는 냉소적인 질문 뒤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인생살이지!’라는 강한 확신과 긍정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인정하고, 긍정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① 가진 것으로 감사하고 즐기는 삶, ② 마음에 만족함이 있는 삶입니다. 
이제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진 것으로 감사하고 즐기는 삶

이런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개역성경 번역이 참 어렵지요? 
저가 영어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Enjoy what you have rather than desiring what you don't have)” 쉽게 번역해 보면, “없는 것 가지고 껄.......껄....... 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으로 감사하고 즐기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가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의 의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부요의식입니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② 가난의식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더라도 없는 것에 집착하고 불평하는 태도입니다. 
본문에서 예를 들어 본다면, 7절 하반절에 보면,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but they never seem to have enough) 즉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져도 늘 부족함을 느껴요. 
늘 모자람을 느껴요. 
이런 의식을 가난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과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어떤 부모 밑에 자라는 자식이 행복할까요? 
물으나마나 부요의식을 가진 사람이지요. 

우리는 참 소중한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가졌잖아요? 
우리는 예배드릴 예배당을 가졌잖아요? 
우리는 휴식할 수 있는 집을 가졌잖아요? 
우리는 부자이신 하나님을 가졌잖아요? 
따져보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요. 
소중한 것을 많이 가졌어요.

오래 전에 인터넷 상에서 인천에서 한 어머니가 자식 세 명과 함께 11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보도를 봤습니다. 
딸이 8살인데, ‘엄마, 나 죽고 싶지 않아!’ 라고 매달려도 그 딸을 밀쳐 떨어뜨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4살짜리 작은 딸을 떨어뜨리고, 나중에 6살짜리 아들을 안고 엄마가 뛰어 내렸습니다. 
다 죽고 말았습니다. 
엄마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는데, ‘자식들아, 미안하다.’였습니다. 
나중에 경찰에서 조사한 바로는 남편은 가출했고, 이 엄마에겐 카드 빚 3,000만원이 있었습니다. 
3,000만원 빚 때문에 죽은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3,000만원 빚 때문에 죽는다면 어림잡아 우리 국민 1/4는 죽어야 할 것입니다. 
농가 평균 부채가 3,000만원이 넘는다고 하니까....... 
만일 그 엄마가 3,000만원의 빚에 눌려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진 것을 볼 줄 알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자기에게 건강이 있음을 알았다면, 자기에게 알토란같은 자식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았다면, 파출부를 해서라도 살아가지 않았겠어요? 
삶에 있어서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부요의식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서 갈라져요. 
부요의식을 가지십시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2. 마음에 만족함이 있는 삶

만족한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만족’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3절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5절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6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다 만족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편리와 평안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지요? 
편리라는 것은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키고, 돈으로 그 문명의 이기를 사서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여름철에 수박을 찬 우물에 담궜다가 먹는 것보다는 집안의 냉장고에 넣었다 먹으면 더 시원하고 편리합니다. 
옷을 숯불다리미로 다리는 것보다는 전기다리미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합니다. 
물질문명과 돈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줍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편리함은 우리에게 잠깐의 행복감을 줄 뿐이라는 점입니다.
영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여행을 가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그렇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외부적인 조건의 향상으로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참 만족은 마음이 평안해야 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어 죽지 못해 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예수님만이 나의 평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죄의식

죄 짓고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출 12: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릴 때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칠해져 있으면 그 집은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그 집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다면 구원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그 집에 강도가 있었다면 구원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그 집에 간음한 자가 있었다면 구원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그 집에 살인자가 있었다면 구원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그들이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구원 받은 것처럼 우리도 몽땅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할렐루야! 
용서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평안하십시오.

㉡ 미래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에게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내 직장생활에 별 어려움은 없을지…….
내 건강에는 별 문제가 없을지…….
자녀들은 세상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잘 자라갈지……. 
앞날이 불안합니다. 
장래가 걱정이 됩니다. 

왜 사람들이 돈을 모으려고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돈에 우리의 불안한 내일을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사회에서는 각자가 자기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데, 돈이라도 모아 놓아야 안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재물 또한 우리의 미래의 확실한 보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근한 예로, 한국에서도 아무리 많이 저축을 해 놓아도 해당 금융기관이 망하면 5,000만원 한도 내에서만 보상을 해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보장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내일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서가 그토록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울 서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얘기 하나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안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바로 그 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to move the rock)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to push against the rock)했을 뿐이 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졌습니다. 
매일 잠도 깊이 잘 잤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족한 인생살이는 외부 여건의 향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변화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변하면 세상만사가 다 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참 만족을 누리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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