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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탈출(3) : 상대적 박탈감으로 부터 (빌 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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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3) : 상대적 박탈감으로 부터 (빌 4:10-20)

사업에 실패하고 동네에서 오래도록 구두수선을 하시는 분이 계셨답니다. 아프면 같은 동네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고 살았답니다. 같은 나이 또래이고 같은 동네에 사는데 자기와 비교할 때 의사는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호화롭게 사는 데 가면 갈수록 병원은 환자가 많은데 자신은 가면 갈수록 손님이 적은 것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살았답니다. 자신도 배울 만큼 배웠는데 길거리에서 구두방을 하고 사니 상대적 박탈감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수선하는 것이야 자신은 구두 수선하고 의사는 사람 수선하고 별 차이가 없고 일하는 시간은 오히려 자신이 많은데 대우는 너무 차이가 난 것입니다. 

어느 날 의사가 자신의 구두방에 구두 수선을 하러 왔답니다. 역시 구두도 수준이 달랐답니다. 아주 값진 구두였답니다. 구둣방 주인이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더니 한 번도 보지 못한 구두인지라 의사에게 구두를 돌려주면서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5천원을 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의사가 “고쳐주지도 않고 무엇 때문에 돈을 받아요?”라고 항의하였답니다. 그 때 구둣방 주인이 “아니 선생님은 진찰만 하고 왜 돈 받아요. 내가 지난번 병원에 갔을 때 고쳐주지 않고 진찰만하고 1만원 받지 않았어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탈출 세 번째로 상대적 박탈감에 대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 삶을 살려면 상대적 박탈감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우리의 만족감을 좀먹고, 우리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1. 소극적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들을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박탈되었다는 것은 기대되거나 필요한 가치가 현재 결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박탈감입니다. 이런 박탈감은 크게 상대적 박탈과 절대적 박탈감이 있습니다. 절대적 박탈이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최소 수준의 가치충족이 결핍된 상태를 말합니다. 똑같이 학교를 나왔는데 다른 사람은 월급을 5백만원 받는데 자신은 50만원 받는 것입니다. 수치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절대빈곤의 상태입니다. 느낌(feeling)이 아닌 상태(condition)입니다. 

상대적 박탈은 기대와 충족간의 주관적으로 인지된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박탈의 상태입니다. 모두 가치 결핍에서 발생하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절대적 박탈감은 객관적인 상태에, 상대적 박탈감은 주관적인 느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하는 준거기준이 중요합니다. 월급 1천만원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비교기준을 1억받는 사람을 잡으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1천만원 월급받으면서도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하고 돈 때문에 부부가 싸우며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준거집단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50만원을 받아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5년 동안 취업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준거집단에 기준을 두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해방되려면 준거 집단이 중요합니다. 

잘 나가는 이웃집 아저씨를 늘 기준으로 삼으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옆집 남편은 돈도 잘 벌어오고 인간성도 좋고, 게다가 아이들 교육에다 처가 일도 꼼꼼히 챙겨주지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동창회 갔다오면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은 보지 않고 꼭 남편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만 이야기하며 남편을 상대적 박탈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제 아내도 처음으로 얼마 전 동창들을 만난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지 주부가 12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늦게 왔으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지 그 다음날 잘 나가는 사람들 이야기만 저에게 하더라고요. 지난번에 심방하고 오는데 어느 집사님이 우리 둘째 딸 이야기를 하면서 상냥하고 예쁘고 그런 딸 있으면 좋겠다고 하여 제가 그랬습니다. “살아 보라고, 그 아이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몰라서 그렇지 살아 보면 별 차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방법은 100평에 사나 10평에 사나 비슷합니다. 다 세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음식 먹어도 다 똥 됩니다. 동창회 나와 이야기 하니까 그럴듯하게 보이지 그래도 내 아내 내 남편 내 딸 내 아들이 최고라고 살아야 합니다. 준거 기준이 중요합니다. 개하고 달리기 하면서 개한테 지면은 개보다 못한 놈이 되는 것이고, 개한테 비기면 개같은 놈이 되는 것이고, 개를 이겨도 개보다 더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준거 기준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십시오. 준거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상대적 박탈감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며 일부 귀족들은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노예를 거느리며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하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노예로 살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요즈음 말하며 명문대 생입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고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학문에 능한 사람입니다. 인기 있는 종교인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돈을 번다면 경제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년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도, 가족도, 따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한 4년이 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심각했을 것입니다. 상대적 빈곤감,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울해 하지 않습니다. 크게 기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그 환경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같이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준이 누구에게 있기 때문입니까?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환경을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13절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즉 예수님 안에서 풍부해 처하는 것이나 비천에 처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을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끝없이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조금 고상한 방법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욕심을 물리치고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인생은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상대적 박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 3의 방법이 있습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로,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 머리를 깍지도 않고 일상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만족한 삶을 누리 수 있는 비법은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준이 주님입니다. 돈 많은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1) 욕구 충족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주님 안에서 만족을 누림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한 것입니다(10).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만족한 삶을 살만한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어도 기뻐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 우리가 만족을 얻느냐가 중요합니다. 욕구 충족을 통해 만족을 얻으면 결국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대상이나 물건, 소유가 있을 때는 만족하면 즐거워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쌓이게 됩니다. 건강이 만족을 준다면 건강할 때는 만족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돈이, 명예가, 이성이, 학식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면 그것들이 있으면 만족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불만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만족의 대상을 바꾸면 간단합니다. 주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주어지든 주어지지 아니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소유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의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신 분이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만족한 삶을 살도록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1:7,13). 

그런데도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은 만족의 표현입니다. 만족한 사람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내도 없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재물도 없습니다. 건강치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끝없는 복음 증거로 육체는 피곤한 상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도 배신을 당하는 정신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 사도로 가짜 자칭 사도로 오해받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배척당했고 말에는 볼 것이 없다고 비난당했으며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범법자라고 난동자, 반란 선동자, 삯꾼, 위선자라고 비난 받았습니다. 노년에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보며 만족해합니까?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을 생각하면서입니다. 그를 비난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그들을 본 것이 아닙니다. 
①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생각하여 선물을 보낸데 대해 그는 감사했습니다. 
②그러나 그의 관심은 선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보내게 하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③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④ 초점이 주님에게 있을 때에는 선물을 받아도 기뻐하지만 선물을 받지 못해도 기뻐할 수 있고, 환경이 순탄해도 기뻐할 수 있지만, 순탄하지 못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참된 능력이 있음을 믿고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한 것입니다(11-13). 

자아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자아를 주님께서 지배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제대로 대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찾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제한적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더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능력은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만족할 만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의 경우에도 다빈치가 그 몸 속에 들어와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면 제2의 "최후의 만찬"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에 전혀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차이코프스키가 그 몸속에 들어와서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면 또 다른 "비창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고 능력주시면 그가 원하시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신 것을 믿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만족하지 못하는 불가능한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도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지만 전능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힘주시고, 불가능한 환경도 극복케 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 삶은 만족한 삶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심으로 안 됩니다. 의지로 안 됩니다. 능력으로 안 됩니다. 노력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으로는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2.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은 서로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왜 사람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까?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불평등한 가치분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1시간 일하는데 저 사람은 1백만 원을 받는데 나는 1만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도 정당하게 가질 자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분배되는, 기대되는 성과물이 없으면 박탈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가 좋아지고 나라가 좋아지면 자신에게도 마땅히 혜택이 와야 하는데 사장 아들만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공부하였고, 오히려 자신이 더 성실하고 열심이었는데 대형 교회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세습받아 후계자가 되면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분배로 발생되는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적 박탈감과 집단적 박탈감으로 나타납니다. 개인박탈은 구성원끼리 느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사장은 1억을 가져가고 부장은 5천만원을 가지고 가는데 자신은 50만원을 받으면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과가 주관적 기준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집단적 박탈은 경제가 발전했는데 사업주에 비해 노동자에게는 이익이 적게 분배되면 나타납니다. 계층간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라 경제가 60년대에 비해 300 좋아졌는데 농민은 2배 좋아지거나 더 심각하게 어려워지면 집단적 박탈감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지역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과 자본이 골고루 분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의 구도는 PK(부산·경남)와 TK(대구·경북) 구도가 되고 박정희(TK, 구미), 전두환(PK, 합천), 노태우(TK, 대구), 김영삼(PK, 부산), 김대중, 노무현(PK), 이명박(TK)가 집권하였다는 것입니다. 영남 시대의 맥이 끊긴 건 호남이 충청과 연합한 김대중 정부 5년뿐이라는 것입니다. 올해도 TK와 PK 구도라는 것입니다. 어느 지역 권력이냐에 따라 부도 어느 지역 사람에게 쏠림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 집단 박탈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부당성으로 나타나는 박탈감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 삶 속에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세상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불평등한 가치분배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도 그랬고 예수님 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부의 분배"를 쓴 에단 B. 캡스타인에 의하면 1979년과 1994년 사이에 미국 가정의 상류층 5%가 전체 가정 소득에서 국가의 일인당 소득의 99%를 포획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호주, 캐나다, 스웨덴,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고 많은 개발국과 과도 경제국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점점 빈곤층이 늘어나 서구 유럽인의 약 17%가 소득이 빈곤선 이하라는 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며 오랜 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80년 경 프랑스 인구는 2500만이었는데 1%도 되지 않은 성직자와 귀족이 나라의 중요한 기관과 자리를 독차지했습니다. 1%가 가진 땅이 프랑스 전 국토의 40%가 되었습니다. 권력과 소유의 편중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균형을 잃으면 아무리 호화스러운 배도 침몰하게 되고 좋은 음식도 과식하면 탈이 나게 됩니다. 귀족들은 이 혁명으로 80% 이상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배의 불균형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회 제도의 산물입니다. 분배의 불평등은 권력과 부의 세습으로 인간만이 독특한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권력의 세습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부의 세습은 아직도 활화산이 되어 타오르고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며 눈덩이처럼 굴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더욱 심각합니다. 남아프리카의 경우 소수의 백인들이 그 지역의 천연자원과 인력을 착취하고 엄청난 부로 자신들만의 제한 구역들을 만들고 1%의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화려한 직업으로 꼽히는 연예인 중 1년에 500만 원도 못 버는 '극빈곤층 연예인'이 최대 1만 8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국민 중 560만 명이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 720만 명 중 414만 명은 월 100만원도 못 번다고 합니다. 창업한 뒤 3년을 버틴 자영업자는 46.4%에 그치고 있다고 합니다. OECD 내부 빈부격차는 30년 만에 최대로 벌어졌습니다. 

국세청·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17.7%) 다음 입니다. 그만큼 '부의 쏠림' 현상이 심하단 뜻입니다. 한국조세연구원은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한 해 버는 돈이 38조 4,790억 원으로, 전체(231조 9,560억 원)의 6분의 1을 차지한다고 밝혔습니다. 

OECD 주요 19개국은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평균 9.7%를 차지했습니다. 19개국 중 우리나라보다 부의 쏠림이 심한 건 미국뿐입니다. 한국 경영진은 '직원의 18배' 가져가고 있습니다. 명문대생 30~40%는 소득상위 10% 자녀이고, 로스쿨 생 5명 중 1명은 강남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값이 높을수록 잘나가는 로스쿨에 진학한다고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사는 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60년 국민소득이 65$이었는데 지금은 2만불이 넘었는데도 만족은 300배는 고사하고 2배도 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미국 주간 포브스지는 전 세계 155개국 주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것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100명 가운데 72명이 불행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61명은 어려움 속에서 삶을 겨우 지탱하고 있으며, 11명은 삶의 기로에 놓일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100명중 28명에 불과했습니다. 

경제 발전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제1단계는 소위 '자본 형성기'이고, 제2단계는 '자본 축적기', 제3단계는 '자본 배분기'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자본 형성기'의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재벌과 오너와 그 친인척들이 회사의 주요 요직에 앉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천민적 자본주의의 허상을 끊는 법을 마련해 단호히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에 재투자하는 비율이 10퍼센트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90퍼센트로 부동산 매입을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부동산에 투자하면 본래의 기업 활동에 투자한 것 보다 3배 이상, 서울의 경우는 6.5배 이상의 이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4∼87년 기간 동안 총투자의 25%를 부동산 투기에 쏟은 기업은 6.4배 성장 한데 반해 50%를 쏟은 경우는 10배, 75%를 쏟은 경우는 15.6배 성장한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보편화된 복지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만 개의 기업체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우수한 기업체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부동산에 투기로 인한 불로 소득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압축경제의 실현으로 고도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물질문명의 허구만 좇다 보니 왜곡된 부의 편중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상대적 발탈감은 점점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박탈감에서 어떻게 우리가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런 박탈감에서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사회 구조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격어야 했을 바울의 괴로움에 누가 참여했습니까? 너희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입니다. 바울과 고통을 함께 나눈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입니까? 

15, 16절을 보십시오. 마게도냐를 떠날 때 사도바울을 헌금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쓸 것을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① 주님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10) 
②그들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도하였습니다.(17)
③ 바울이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8) ④하나님이 기쁘시게 받는 제물이 되었습니다.(18)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은 서로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만족하는 삶의 규범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리를 가고자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고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까지 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쌓아 놓는 다고 참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 없는 사람에 비해 모든 것 놓고 가려면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서도 너무나 인색하게 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참 만족한 삶을 살고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 보면 매주 마다 계란을 가져옵니다. 행사 때가 되면 몇 천만 원씩 선물을 10여 년 동안 교인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욕심꾸러기인 의류 제조업자인 장로님이 있었답니다. 돈이 많아 어떻게 장로가 되었는데 겨우 하는 것은 교회에서 체면상 할 수 밖에 없는 의무만 했답니다. 어느 날 죽었답니다. 천사 앞에 섰답니다. "어째서 너는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답니다. "나는 길거리의 불쌍한 장님에게 백 원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뿐인가?" "아뇨, 물론 또 있어요. 지난주에 산책 나갔다가 구두닦이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얼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또 백 원을 주었습니다!" 천사는 옆에 있는 기록 담당자에게 물었답니다. "기록되어 있나?" 기록 담당자는 장부를 뒤적여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었답니다. 

천사는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 밖에는?" 
"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만..." 

천사가 기록담당자에게 물었답니다. 
"이 사나이를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기록 담당자가 대답하였답니다. 
"이 백 원을 돌려주고, '지옥으로 가라!' 고 말씀하십시오!" 

남으로부터 도움만 받고 사는 것 같고 자신에게는 남을 도울 만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남을 도울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주는 삶은 자신과 이웃을 함께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주고 가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시켜 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많지 않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는 조그마한 것부터 나누는 삶이 참 만족을 누리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3. 항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까? 기대가치와 성취능력의 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대와 현실의 차이 때문입니다. 내 책임 때문에 기대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현실은 기대한 만큼 좋은 결과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은 박사를 받았는데 받는 임금은 고졸자들이 받는 200만원을 받으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힙니다.

교육수준에 맞게 소득수준이 올라가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질 가치가 있다고 믿는 가치에 대해 현실적인 수단을 통해 접근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박탈감입니다. 이럴 때는 기대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박탈감도 커지게 됩니다. 과거 잘 살다가 못살게 되면 박탈감은 더욱 심하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만사가 귀찮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인생이 재미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대적 박탈의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체감적 박탈(decremental eprivation)입니다. 

가치기대는 예전에 잘 살 때와 같이 일정한데 가치능력이 하강하므로서 기대와 능력의 격차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오는 박탈감입니다. 둘 째 열망적 박탈(asporational deprivation)입니다. 체감적 발탈과 정반대로 가치능력은 일정한데 가치기대만이 상승하므로 기대와 능력간의 격차가 증가해서 생기는 박탈감입니다. 셋째는 점진적 박탈(progressive deprivation)입니다. 가치능력의 상승이 가치기대의 상승을 일으킨 후, 갑작스러운 가치능력의 하강으로 기대와 능력간의 격차가 증대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박탈감을 갖게 될 때가 많이 발생합니다. 항상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 임원으로 일할 때 많은 월급을 받고 그에 따라 삶의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항상 임원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실직자가 됩니다. 항상 사장으로 돈을 잘 버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회사를 접어야 합니다. 항상 건강한 것 아닙니다. 다 병들고 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가치는 높고 능력은 없어지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인생의 맛을 잃어버리고,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나고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들이 사업이 잘 안되고 어려움이 오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bmw를 타고 다녔는데 티코 타고 어떻게 교회에 나가냐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 헌금 많이 했는데 헌금도 못하면서 교회에 어떻게 나가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상태입니다.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예전의 자신을 비교할 때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잘 나갈 때는 따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따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큰 교회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풍족하다고 고백합니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고백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풍요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풍성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였으며,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였고,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였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고후 6:10). 어떤 분이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백지수표"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풍성한 공급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①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②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히 채워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③ 풍성하신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④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받지 못함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었습니다.(요 14:12-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면 인간은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① 집을 세우는 일(1). 노력만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습니다(창11: 1-9). ②성을 지키는 일(1)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파수군이 밤새워 지키지만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시면 허사라고 말씀합니다. 

③ 돈버는 일(2)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려고 남보다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워도 하나님이 부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④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합니다.(3-5) 내 힘과 노력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라고 살면 언제 어디서나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항구적인 만족을 누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는 신앙적인 방법은

1. 소극적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들을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2.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은 서로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3. 항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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