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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시 88:14-18)

첨부 1


어찌하여…! (시 88:14-18)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4)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5)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6)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7)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8)
<시편 88편 14~18절>

할렐루야!
복된 자리에서 만남을 감사드립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저는 이 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그때 저는 중학생이었고, 저희 집에는 TV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달에 가는 모습을 TV로 중계한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으니 볼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TV가 있는 옆집에 
중계를 보러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저는 
여자들에게 조금 신경 쓸 나이가 되어서인지
우리 집에 TV가 없는 것은 이해되었지만 
그 여학생이 있는 집에 가서 보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가자고 하시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달 착륙 장면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 여학생이 저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달에 발을 디딘 최초의 사람은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었습니다.
이후 닐 암스트롱은 ‘최초’, ‘1등’의 대표격이 되었고
교수와 기업 회장까지 지냈습니다.
그러나 늘 정치권의 구애에 시달려야 했고
자기 사인이 거액에 팔리기 시작하면서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하는 것도 중단했습니다.
심지어는 단골 이발사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자 
소송을 낼 만큼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암스트롱보다 18분 늦게 달에 내렸던 
에드윈 올드린(Buzz Aldrin, 1930~현재)은 
최초가 될 기회를 놓쳐버린 탓에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 털고 일어나 전미 우주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로켓 설계 회사와 비영리 재단도 세웠습니다.
책도 여러 권 쓴 그는
지금도 세계를 돌며 우주 개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2012년 8월 28일, A34면, 참조>

누구나 1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이란
‘몇 등인가’보다‘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삶에도 맡겨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 째냐? 몇 등이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하나님 마음에 드는 
최고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최고의 예배로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 
행복한 동행을 이루며 사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실망했다면 …

1935년 헝가리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레죄 세레스(Rezso Seress, 1899~1968)가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제목의 연주곡을 발표했습니다.
음악 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세레스가
‘헬렌’이라는 여인과의 사랑에 실패한 후 작곡한 이 곡은
작곡가의 실연의 아픔을 담고 있는 곡입니다.

그 곡이 발표된 이후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곡이 발표된 지 8주 만에 
당시 정치적인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헝가리에서만 
그 음악을 들은 사람 중 187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 후 헝가리 정부에서는 그 곡을 방송 금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작곡가 세레스도 자살했습니다.
<국민일보 2000년 10월 19일, 한국일보 2002년 2월 2일, 
The New York Times 1968년 1월 13일 참조.>

심리학자들은 슬픔도 전이(轉移) 된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우울함이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우울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서울: 돋을새김, 2009). p.146. 참조.>

신앙생활 하는 우리도
슬픔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
감사와 찬양은 나오지 않고
세상에서 얻은 실망, 낙심, 배신, 
손해, 질병 … 같은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을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어려움 속에서 …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

보통 시편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나 찬양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실망과
하나님이 일부러 숨으신 것처럼 느껴지는 절망감만 느껴집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등장하는
고난(15절), 진노(16절), 두려움(16절), 흑암(17절) 등의 단어들도
고통스러운 시인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시편 2,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10), p.393. 참조.)>

눈물 흘리고, 한탄하며, 울부짖는 것들이
우리 삶의 한 모습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에게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응답을 미루시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실망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 자신이 잘못해서 내게 붙은 더러운 것 때문에
떼 내고 싶은 것 때문에 낙심하고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앞에 가던 사람이 
계속 기침을 하더니 가래를 뱉는 것이었습니다.
가래가 나오면 휴지로 잘 처리해야 할 텐데
그 사람은 그냥 뱉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래가 자기 어깨에 떨어졌나봅니다.
자기가 뱉은 가래였지만 옷에 묻으니 
화를 내면서 떼어내고 있더군요.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잘못해서
내게서 떼어 내고 싶은 것이 붙어 있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다른 사람이 때문에 더러운 것이/일이 내게 붙어 있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행복한 동행’을 외쳤지만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도 많았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찬 542장) 찬양하지만

여러분 예수 믿는 것 정말 심히 기쁘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살아도 
기쁜 일만 계속 되는 것은 아닌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슬픔도 … 실망도 … 살면서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슬퍼하고 …
그리스도인답게 실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실망 속에서 기도하라

실망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치명적인 현상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이런 일은 막아 주셨어야지”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진작 도와주셨어야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성경의 여러 가르침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슬픔과 분노만큼 기도 생활에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실망과 좌절만큼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했다면 오히려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실망하면 기도를 중단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한 번 더 고개 숙이고 한 번 더 고개 숙이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믿지 못한 연약함과 
믿음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리아, 마르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들 세 오누이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1:5)
나사로가 병이 들자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지만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문 후에 
나사로를 찾으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왜 빨리 오시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무관심에 답답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그러나 예수님께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큰 뜻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실망스러운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까?
침묵하시는 하나님 … 
보이지 않고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은 
하나님 때문에 답답하십니까?
그럴수록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 믿고
끝까지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실망 속에서 분노를 다스리라

믿음 안에서 실망하고 슬퍼하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과 함께 주의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자제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을 탓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탓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경험해야 하는 문제,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넘겨야 합니다.

화가 날 때에는 ‘계기’와 ‘원인’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여러분을 화나게 합니까?
그런데 그 분노가 정말 자녀들 때문입니까? 
자녀들의 행동이 화나게 하는‘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화나게 만든 원인은 자녀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쌓인 분노가 가슴 속에 있었는데
자기가 이미 품고 있는 화를 아이들에게 풀 때가 있습니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일들을 없애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화(분노)를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 적개심이 끓어오르게 됩니다.
여러분 분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입으로 나오는 소리가 분이/화가 섞여 나옵니다.

분을 마음에 품으면 행동에 분을/화를 표현합니다.
분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입으로 분이 나오고 몸으로 분이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도 어렵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분노를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 보건 기구(WHO)와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2020년이 되면 
사람들의 사망 원인으로는 심장병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우울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종합해 보면 
우울증은 ‘무엇인가 의존할 만한 대상을 상실했을 때’
그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통제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크리스천 투데이 2012년 5월 6일 및 남정자 외,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접근책 : 
우울증 실태 분석을 중심으로』 (1997) pp. 59~66. 참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분노를 가슴 속에 품고 살면
정신적 어려움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질병을 얻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 ”(잠 14:17) 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고도 했습니다.

마음에 슬픔이 더해질 때 …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어 낙심될 때 …
우리를 더 심하게 무너뜨리려 하는 
사탄의 계략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끈을 놓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더 기도하고 자신을 조절하고 
사탄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망 속에서도 어울려라

슬픔과 실망은 흔히 고립으로 이어집니다.
절망을 경험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이게 되는 행동이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는 풍랑을 만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니느웨는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돌이키셨습니다. (욘 3:5~10)

그런데 요나는 그 모든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용서하실 거면 …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 고생을 했던 것인지
지금까지 자기가 한 일이 헛수고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한 니느웨는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성경은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고 했습니다. (욘 4:1)
<찰스 스탠리, 『지뢰』(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p. 180. 참조.>

하나님을 싫어했습니다. 성을 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욘 4:5)

화가 난 요나는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과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머물렀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 교인들 중에도 요나같은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속회, 선교회, 교회 일을 하면서 상처받고 삐지면
제일 먼저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속회, 선교회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등 돌리고 문 닫고 전화를 안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거북이는 딱딱한 등껍질 속에 목을 넣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빼기도 합니다.
무슨 일엔가 깜짝 놀라게 되면
거북이는 목을 껍질 속으로 집어넣는데
일단 한 번 목을 집어넣은 거북이는 그 힘이 굉장히 세서
사람이 손을 사용해 강제적으로 목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등껍질 속에 들어가 있는 거북이의 목을 나오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를 불 가까이에 두는 것입니다. 
온 몸에 따뜻함을 느끼면 
거북이는 스스로 머리를 내놓기 때문입니다. 
<신정석, 『자기주도적 성장하는 구역』 
(서울: 예수사랑, 2010), p. 13 참조.>

서로 어울리며 사랑을 나누고 따뜻함을 느껴야 
딱딱하고 어두운 껍질에서 자기 목을 내밀어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도 
거북이처럼 마음의 목이 들어가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 마치면 목을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요 15:4)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요 15:9)
나무에 붙어야만 열매를 맺는 가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해야 하고,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따뜻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요즘은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
전자 제품이 없으면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웬만한 전자 제품들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계라는 게 사용하다 보면 고장이 날 때가 있습니다.
사용하던 전자 제품이 고장 나면 AS센터에 가져갑니다.
전문 기술과 지식이 있는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어지간한 고장은 그곳에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특별한 부품이 고장 났다던가
제품의 고장 상태가 심각한 경우라면
AS센터 직원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거 본사로 보내봐야 하겠습니다.”
“이 제품을 고치려면 공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만든 사람이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 아플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의지해서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통해 위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본사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은
이렇게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시 88:14)

그러나 그 모든 슬픔과 
실망의 고백을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지
시인은 명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 ”(시 88:1)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 두려움 가운데에도 … 흑암 중에서도 …
가정에서 … 일터에서 … 
실망스런 일이 이어질지라도
슬픔을 벗어나기 어려울 지라도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께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려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성도들과 연합하고 어울리며 
하나님이 허락하실 소망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고
끝까지 구원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동행의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했지만
때로 실망하고 넘어질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산다고 하지만
심히 기쁜 일이 아님을 고백해야 할 때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이’ 심히 기쁜 일이 되도록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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