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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하는 사람들 (출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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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사람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지렁이가 땅속을 기도록 지어졌듯이,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오르도록 지어졌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 애굽 노예생활에서 불러내셨습니까? 단지 그들의 처지가 불쌍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습니까? 단지 너무 고생하니까 이제는 좀더 편안하게 살라고 광야로 불러내신 겁니까? 먹고 살기 힘드니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까?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애굽기 8장 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百姓)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8:1) 

9장 13절에도 또 말씀합니다. 

“내 백성(百姓)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9:13) 

섬긴다는 말이 뭡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5장 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曠野)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犧牲)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許諾)하소서”(출 5: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예배하는 백성 삼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읽어 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여기 시내산 아래까지 인도해 오셨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애굽 정부를 뒤집어엎고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430년 동안이나 당대 최고의 강대국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럴만한 힘도 없고 지혜도 없고 꿈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날개에 얹혀서 여기가지 오게 된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이 시내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5-6절에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1)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기 위해
2)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3)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소중한 보물, 내 것, 내 새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구별하여 택한 백성이란 말입니다.

거룩이란 히브리어로 카도시, 잘라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소중한 자식들이 되어, 구별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예배자로 부르셨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차 망할 세상에서 구원해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이유, 건강과 지혜와 명예의 복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로 온전한 예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지렁이가 땅속을 기도록 지어졌듯이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오르도록 지어졌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명을 가장 소중한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제1 계명부터 제3 계명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라는 명령입니다. 민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는 법을 보십시오. 12 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고, 그 한 복판에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계시록 4장에 보니까 천국은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에서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주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예배를 말합니다.

챨스 스텐리는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누구이신지 앎으로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사랑으로 온전한 예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주변적인 일이 아니라,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봉사자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개혁자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식당봉사자, 주차 안내원, 성가대원, 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 심지어는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경건한 독수리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창공을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믿음의 날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날개에 힘을 얻기 위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독수리의 시력, 독수리의 시각을 회복하십시오. 독수리는 한번 뜨면 100리를 내다 본다고 합니다. 그 높은 꼭대기에서도 땅 위의 조그만 생쥐를 볼만큼 시력이 좋습니다. 한번 본 먹이를 잡기 위해서 내리 꽂힐 때에는 180km의 속도로 내려 온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시력이 독수리처럼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남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1. 중요성의 욕구 (need of significance)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를 인정받고 싶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싶어합니다.

2. 안전의 욕구 (need of security)
    세상 어느 누구도 불안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안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3. 소속의 욕구 (need of belong)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속하기를 원합니다.


1. 중요성의 욕구(need of significance)입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의미와 목적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뜻의 문제요, 존재의 문제요, 보람의 문제요,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둘째 아이를 낳으면 첫째 아이가 사고를 칩니다. 일부러 거울도 깨고, 전에는 가리던 오줌도 가리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요? 내가 이 집에서 얼마나 소중한 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나의 존재의 의미를 알고 깨닫고 인정받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성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가려고 합니까? 보통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보면, 돈, 권력, 지식, 명예, 인기가 있으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나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기 퇴직자들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좋은 직장을 가졌습니다. 돈도 벌어서 가족을 기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잃는 순간 ‘돈도 못 버는 나는 이 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돈만이 자기 존재의 가치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권력, 인기, 미모,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적인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젊음도, 권력도 인기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내 살 이유와 가치를 두면, 앞으로 죽어야 할 순간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까? 예배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첫째 존재 이유는 예배입니다. 예배 받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단 돈 한 푼 드릴 수 없을만큼 그렇게 가난한 사람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하기에 충분한 가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는 너무 늙어서 교회에서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하는 노인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그 자체가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100 살이 넘었던 안나 여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시므온 할아버지는 또 어떻습니까? 이제는 너무 늙어서 찬송 한 곡 제대로 못 불러도, 팔 다리 다 없어진 장애인이라 해도, 주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왜 비참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가 없는 것 같거든요.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난 귀찮은 존재 같아요. 여러 사람에게 불편만 끼치고 있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만일 일 자체에 당신의 존재의 의미를 둔다면, 일 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직함이나 명예에 존재의미를 둔다면, 직함이나 명예가 사라질 때,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에 의미를 둔다면, 당신은 마지막 숨결 속에서도 존재할 이유가 있습니다.


2. 안정의 욕구(Need of Security)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다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보안경비업체에 집을 맡깁니다. 수많은 첨단 장비로 집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보도에 들으니, 경비업체 직원이 훔칩디다. 도둑놈에게 물건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오늘은 주가가 올랐지만, 내일을 떨어질까 두렵고, 사업이 잘 되어도 내일 혹시 부도나 나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배신당할까 두렵고, 조기 퇴직 당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마음에 평안을 찾고, 도박을 하며 잊으려 합니다. 밤마다 댄스홀에서 발광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 불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술을 마시지만, 술을 깰 때 가서는 더 비참합니다. 

지렁이가 땅을 기는 것,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오르는 것, 생태적 본질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아주 본성적인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 일을 할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참 평안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고백했습니다. “주님, 당신 앞에 엎드리기 전에 제게는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

예배 때마다 온전한 평안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소속의 욕구(Need of Belong)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이후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은 존재적으로 고독합니다.
그 고독을 치료해 보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고, 이 모임 저 모임을 기웃 거리지만,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소속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동창회를 참석해 보십시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씁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소속감을 느끼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고, 그 분 안에 온전히 안기기 전까지는, 내게는 온전한 소속감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인 그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참된 소속감은 얻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세상에 날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은혜 가운데 살았고, 그의 은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사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 소속을, 본질적 소속을 분명히 하는 순간, 삶의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올시다. 예배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예배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예배를 귀중히 여기십시오.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6·25때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43년을 북한에서 지낸 분이 있습니다. 13년은 감옥에서 보냈고 나머지 기간은 탄광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핵에 걸렸습니다. 광부생활을 하면서 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규폐증 2기에 걸렸고, 왼쪽 눈을 실명했고, 왼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이기고 소망을 버리지 않고 지내다가, 1994년에 탈북하여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분이 수기를 썼는데, 「돌아온 사자: 조창호의 북한생활 사십삼 년」이라는 책의 166쪽과 167쪽에서 직접 읽어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1천 명 가운데서 한 명 살아남을까말까 한 그 지옥 같은 교화소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 나왔을까 신기하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않은 희망이 내 삶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화소에 들어오면 자포자기하고 모든 희망을 버렸지만, 나는 도리어 자포자기 하던 생활을 한 단락 지으며 거꾸로 희망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힘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교화소뿐만 아니라 북한 어디에도 신앙의 자유란 없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어도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간구했다. 물론 찬송도 부를 수 없었지만 입 속으로 늘 불렀다. 나 혼자 이겨내지 못할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은 내게 늘 편안함과 새로운 의욕을 주었다. 또 내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주님을 수없이 원망하더라도 종국에는 평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도하실까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만은 어머니와 나는 함께 있다고 믿어졌다. 늘 어머니께서 잘 부르시던 찬송을 생각했다. 그 찬송은 지금도 찬송가를 보지 않고서도 혼자 부를 수 있다. 43년의 질곡도 내게서 신앙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예수는 나의 힘이오 내 생명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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