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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운명의 골짜기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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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골짜기 (삼상 17:41-49)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 제가 머리를 자르러 어느 미용실에 갔습니다. 머리를 잘라주는 스타일리스트와 대화 내용이 당연히 월드컵으로 옮겨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여성 스타일리스트가 붉은 악마 멤버였습니다. 그래서 시청 앞에 가서 응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생겨 물었습니다. ‘시청 앞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였는데 화장실은 어떻게 가느냐?’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아예 물을 안 마신다.’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물을 안 마시면 화장실에 갈 일이 없지요. 

또 물었습니다.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는 게 아니고 시청 앞에서 하는 것인데 그 응원에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응원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기가 선수들에게 전달돼서 선수들이 더 잘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축구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응원의 효과를 신뢰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갈 때 이스라엘 군대가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를 응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응원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구경했을 것입니다. 응원을 하려면 정신이 같아야 됩니다. 같은 기를 가져야 됩니다. 

그 스타일리스트가 자기의 기가 선수들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응원을 하려면 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되는데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으로서 골리앗과 싸우러 내려간 것은 다른 병사들 중에 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싸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응원을 할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영적대결을 벌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모여서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들이 엘리야를 응원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냥 누가 이기나 지켜본 것뿐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기가 전달된다면 오히려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 군대에게 전달되었을지언정 그 반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응원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 모세를 응원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졌을 때 다니엘을 응원해 주는 사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응원하느냐, 찬성하느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성령께서 응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내게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만인이 나를 응원한다고 해서 없었던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고 내게 믿음이 있다면 만인이 나를 반대한다고 해서 내 믿음이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이기느냐 골리앗이 이기느냐 이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더라도 골리앗과 같은 장사들은 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기느냐 블레셋이 이기느냐 이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전쟁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이기든 지든 블레셋과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이 전투가 왜 중요하냐.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의 결과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다윗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이 결과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승리나 실패가 중대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런 목사님 한 분이 계심으로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분 한 분의 삶과 신앙이 결코 한 사람의 삶과 신앙으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러 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이 자기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승패에 좌우된다는 얘기입니다. 다윗이 싸우러 내려갈 때 마치 하나님이 내려가시는 것과 같은 그런 사건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행위에 좌우될 수 있는 매우 드물고 거룩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소년에 불과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년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종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입고 이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본래 철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가급적 깊이 생각한 것을 성도님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여러분의 신앙을 정말로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일만 마디의 신학이 아닌,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과 같은 한 번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론에 이론을 거듭할 수 있지만 이론은 믿음을 낳지 못합니다. 오직 다윗 한 사람만이 물매를 손에 쥐고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그의 승리는 전설이 되고 영적인 선언이 되었습니다. spiritual statement. 46절에 그의 영적인 선언문이 담겨져 있습니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온 땅으로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의문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집에 함께 계시느냐, 하나님이 우리나라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함께 역사하시느냐, 개입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우리 집안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우리나라의, 민족의 역사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이것이 우리의 궁금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눈에 밝히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더라도 우리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개입하신다면 왜 세상에는 불의함이 존재할까?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신다면 왜 이단을 처단하지 않으실까? 왜 세상에는 부조리가 있을까? 왜? 왜? 생각은 생각을 낳고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머릿속의 개미와도 같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책으로 다 기록하면 세상에 둘 곳이 없으리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이론과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둘 곳이 없도록 채웠습니다. 

이천년의 신학, 이천년의 기독교 신학이 학문의 발전을 거듭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가 이천년 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신학은 발전하고 학문은 발전했지만 그것이 정작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주지 못했고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해준 것은 아닙니다. 신학박사 학위가 열 개가 있는 사람이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권사님보다도 믿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이 믿음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실천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단순해질 때 믿음이 분명해지고 내가 무엇을 믿는지를 알게 되고 내가 이 믿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단순하게 해야 됩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저희 교회 창립기념음악회를 했는데 많은 기자재와 음향장비를 동원하고 조명시설을 동원하다보니까 그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시설이 많을수록 고장 날 확률이 그만큼 많아집니다. 그래서 저희 주일예배는 가급적이면 아주 심플하게 드립니다. 

주일에 저희가 사용하는 것은 이 마이크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이크가 만약 고장 나면 육성으로 하면 됩니다. 가급적이면 심플하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 가급적이면 단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려고 하는데 다윗이 이것저것을 복잡하게 생각해서 골리앗과 싸우러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싸우러 여기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님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자기가 싸우겠다고 평소에 사용하던 물매를 손에 들고 이 골짜기에 내려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 단순한 논리에서 엄청난 담대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아마 사울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는 놀랐을 것입니다. 믿음이 저렇게 역사할 수 있구나! 믿음이 저렇게 역사하는구나! 저렇게도 하면 되는구나! 저렇게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구나!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아, 저렇게 하는구나! 이것이 진짜 배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번민을 주는 많은 것을 좇아가기 보다는 정말로 중요한 믿음에 대하여 배워야 됩니다. 믿음을 배워야 되고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되고 그리고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을 보고 배워야 됩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과정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옳은 명분이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려간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는 올바른 명분이 있었어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충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사람과는 싸워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을 움켜쥐려고 하면 자기가 가서 양을 건져내고 그리고 만일 사자나 곰이 그를 위협하면 수염을 잡고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타잔이 따로 없습니다. 다윗에게는 충분한 경험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 것을 충분히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세 번째는 확실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만 있으면 계획이 없어도 될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충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고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충분한 계획이 없는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충분한, 확실한 계획. 그래서 사울왕의 갑옷과 투구와 무기는 너무 무거워서 안 되기 때문에 다윗의 손에 익은 물매와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간 것입니다. 골리앗은 한 명인데 왜 물맷돌을 다섯 개나 들고 나갔느냐? 골리앗의 형제들이 덤빌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음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먼저 마음속에 우러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우러나는 이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호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고 사람들의 응원으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고 자신의 혈기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우러나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이 골리앗을 내 손에 붙이셔서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실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믿었어요.

다섯 번째는 입술로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입으로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 불신을 고백하는 데 익숙합니다. 입으로 불가능을 고백하고, 입으로 원망을 고백하고, 입으로 불평을 고백하고, 입으로 미움을 고백하고, 입으로 우울한 감정을 고백하지만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자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건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함도 아니고 예절도 아니고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친구의 인기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평소에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요.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아요. 불필요한 말의 양을 줄이고 그리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믿음을 고백하는 훈련을 할 때 성경말씀에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내가 행하여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여러 번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이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왜 그것을 물으셨겠습니까. 사람들의 입으로 믿음 고백하는 것을 듣기 원하신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데에서 끝나면 입만 산 그리스도인이고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야 됩니다. 돌을 물매에 던지는 것, 그것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물맷돌로 하여금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셨어요.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스마트 폭탄이에요. 레이저로 쏜 게 아니고 레이다를 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이 돌멩이를 유도하셔서 골리앗의 이마를 향하여 날아가게 하셨어요. 

이 일로 다윗은 영웅이 되지요. 그건 부차적인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높이십니다. 다윗이 높아지기 위하여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에요. 다윗이 사람들 보는 앞에 하나님을 높였더니 하나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반대로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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