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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려거든 (사 2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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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려거든 (사 29:13,14)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돈도 없고, 글재주도 없는 어느 선비가 벼슬을 하고 싶었답니다. 가진 것이라곤 시원찮은 아부술 뿐이었습니다. 그것만 믿고 '한번 부딪쳐 보는 거다'며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당대의 실력자인 대원군을 찾아갔습니다. 전주 이씨란 빌미로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을 드나들었습니다.  아부를 하려고 하면 잽싸게 서울 선비들이 아부를 하여 늘 한 발 늦었답니다. 

어느날 대원군이 화선지를 펴놓고 붓을 들어 난초를 치려는 순간, "대원위 대감, 난초가 썩 잘 되었습니다"고 얼른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대원군은 아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자네는 아직 붓도 가지 않았는데 잘 되었다고 하는가? 어느 곳의 뉘신가?" 영걸스럽다던 대원군도 아부에 맥을 못 추고 그에게 수령자리 하나를 주었답니다.   
  
리처드 스텐걸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는 인간관계를 최적화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아부도 능력이며 아부하는 자가 출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마키아벨리, 저술가 데일 카네기, 지그문트 프로이트,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과 같은 유명인의 공통점은 '아부의 달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부는 사전에서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현대에서 아부는 인생살이를 더욱 부드럽게 하고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전략적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전략적 아부는 유쾌한 직장생활을 보장하고, 이성을 향한 아부는 마음의 문을 여는 특급 전략이며, 전략적 찬사는 무조건 남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유권자에게 아부를 잘하는 자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사장에게 아부를 잘 하는 자가 승진할 수 있으며, 소비자에게 아부를 잘 하는 기업이 살아 남고, 청중에게 아부 잘 하는 설교자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아부가 오히려 삶의 귀중한 처세술로 등장하고 있고 개인의 생존기회를 최대화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고, 자신을 띄워주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실을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진실만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며  기분을 상하게 하는 진실보다는 듣고 싶은 기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카네기는  "인간은 존경에 굶주려 있고, 자신의 가치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몹시 갈망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간단한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쉽게 내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부를 받고 싶어합니다. 아부를 받으면 혈액 속의 세로토닌 수치가 높아져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 
  
이사야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의 신앙상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주님에게서 아주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제자들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식사할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게서는 바로 이사야 29장의 본문의 말슴으로 응수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는데 고르반 하고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핑계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말슴을 폐하는 것이냐?"고 책망하셧습니다. 

당시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중에서 부모님께 물질로 공경하기를 싫어하여 부모님이 찾아오실때가 되면 얼른 하나님께 헌금을 합니다. 부모님께는 '이미  하나님께 다 드려서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고르반'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면 성전에 가서 '헌금을 잘못드렸습니다. 돌려주세요.' 하고 되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모님께도 효도하지 않고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이런 얌체같은 방식으로 삽니까?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까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웃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신앙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표현하여야 합니다. 입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남녀간에도 마음으로 아무리 좋아해도 입으로 사랑을 고백하여야 상대방이 그 마음을 알고 반응하지 속으로만 사랑하는 감정을 넣어두고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잇으니까 나의 의무는 다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사랑한다고 자주 고백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지만 입술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없으면서도 입으로만 사랑을 고백하는것은 거짓입니다. 사기입니다. 들통 나게 마련입니다. 연인간에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바람을 피우면서도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거짓 사랑 고백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큰 배신감을 가져오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향하여서 거짓 사랑 고백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위선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합니다. 입술뿐 아니라 행동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같은 절기를 거르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안식일도 철저히 지켰고 성전에 나와 제사를 꼬박꼬박 잘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진노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율법도 잘 알고 기도도 많이 하고 종교적인 열심도 잇었지만 예수님께 준엄한 책망을 들었습니까?  "회칠 한 무덤이여!" 책망하였습니다.  겉은 회칠을 하여 멀쩡하게 단장하엿으나 속에는 썩어가는 시체로 가득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처럼 위선적인 신앙인이 없을까요?  예수님 당시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식어진체 사람에게 보이려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교회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쉽게 식별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직분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의 연도도 오래되었습니다.  교회의 용어도 잘 알고 기도도 그럴듯하게 잘 합니다. 열심도 있습니다.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마음은 식어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위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인 사람, 형식으로 가득찬 교인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식어집니다. 하나님을 마음 한복판에 모시고 날마다 매 순간마다 친밀하게 대화하지 않으면 사람의 교훈과 계명으로 포장하는 외식적인 교인으로 변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신앙을 가증하게 여기셔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14)' 

무슨 말씀입니까?  깨달음이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앞에만 나오면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는데 어느날부터 은혜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감동이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답답할까요?  무서운 일입니다. 분별력이 사라지면 마귀에게 쉽게 속아넘어갑니다. 위험한 지경으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싸구려로 넘겨주고 쓰레기를 안고 삽니다. 

오늘 한국 교회안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때 복음을 받고 온 세상을 얻은것보다 더 기뻐하며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던 사람들이 지헤가 없어지고 총명이 가려져서 어둠속에서 헤메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속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몇 년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 'THE   USA TODAY  지'의 The  National Topic  News로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열일곱살 먹은 소녀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미국 Colorado주 Denver의 남서쪽 리틀턴이라는  지역 인구 35,000명이 살고 있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 콜롬바인  High School 고등학교예요. 총기난사사고가 일어났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생 25명 용의자 2명이 함께 총기난사사고로 학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사건이 우리나라에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내 불량서클집단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학생 두 사람이 벌린 자기 친구들에 대한 복수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나온 소녀가 목격자로 증언한 사실입니다.  

두 명의 범인 중에 한 사람이  캐시버넬이라는 열일곱살 먹은 소녀에게 총을 겨누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Do you believe in God?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아마도 '하나님 안 믿어요' 이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었던 이 상황 속에서 이 소녀는 침착하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범인은 총뿌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 캐시는 침착하게 한번 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당신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해요."
  
범인의 총구는 불을 뿜기 시작했고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 생명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사건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옆의 생존자 입술을 통해서 증언되자 미국의 크리스챤 청소년들이 T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T셔츠에는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T셔츠를 입고 소년소녀들이 거리를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Florida의  한 도시에서는 2,500명의  크리스챤 teenager들이 모여서 Yes I believe in God  crusader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캐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고백의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 집회는 도시마다 불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는 잠들어 있던 크리스챤들의 믿음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청소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어른들이 부끄러워하고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THE   USA TODAY  지'의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캐시는 미국 교회에 불을 지르고 있다. 캐시는  미국 교회를 향한 충격과  감동을 던지고 있다.

입술의 고백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한 입술의 고백만이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사람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입술로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입술로는 자신있게 고백하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입술로도 늘 사랑을 고백하며 마음도 늘 하나님께 향하여 있고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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