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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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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성 프랜시스는 이태리에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 중에 이런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은혜 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맹수도 그를 보면 온유해졌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습니다.
   
미국의 역사 속에는 서부 개척 시대라는 게 있습니다. 서부에 가면 금을 캘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부로 가는 길목에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었다고 합니다. 용감한 개척자들과 탐험가들이 서부로 가기 위해서 이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하게도 이 계곡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한 사람도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굽히지 않았고, 계곡을 향하여 말을 달렸습니다. 죽음의 계곡에 도달했을 때에 굽이지는 곳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쪽 길은 사람이 지나기에 넉넉하고 편한 길이었고, 다른 쪽 길은 가시넝쿨이 무성한 험한 길이었습니다.
   
조심성 있었던 젊은이는 무턱대고 편한 길로 말을 몰지 않고, 서서 돌멩이를 넓은 길의 끝, 강을 만나는 지점에 던져 보았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돌멩이는 푹 꺼지는 소리와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모래 수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사람들이 돌아올 수 없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그 길은 넓고 편한 길이었지만, 죽음으로 직통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칼을 꺼내어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가시넝쿨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서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죽음의 계곡을 살아서 건넜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비록 가시덤불이 엉켜 있는 좁고 험한 길이었지만,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넓은 길로 가면 멸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좁은 길이 주님이 인정하는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현재지향적인 삶이 있고, 미래지향적인 삶이 있습니다. 좁은 문은 길이 협착합니다. 하지만 그리로 가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넓은 문은 길이 크고 넓습니다. 하지만 그리로 가면 멸망입니다.
   
현재만 바라보는 사람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둘째, 고통이 있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좁다’, ‘협착하다’는 말은 고난과 어려움과 불편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넓다는 말의 헬라어 ‘유뤼코로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육체적으로 즐겁다, 혹은 편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편안하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은 평안해야 하지만 몸이 편안해서는 안 됩니다. 내면은 평안해야 하고 육체는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마 6장에 보면 기독교의 3대 덕목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나옵니다. 구제를 하를 하면 내면은 평안해집니다. 하지만 육체는 고통스럽게 됩니다. 왜냐하면 보통 구제를 힘쓰는 사람들을 보면 물질이 넘쳐나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쓰기에도 빠듯한데 자기가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주니 영은 평안하지만 육체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면 영혼은 평안합니다. 하지만 육체는 고통스럽습니다. 새벽에 일어날 때 기분 좋게 일어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좀 더 자고 싶지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일어납니다. 철야기도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철야기도를 하면 분명히 영은 평안합니다. 하지만 육체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몸은 자고 싶은데 잠을 참아가며 철야를 하니 몸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금식도 생각하면 똑 같습니다. 금식을 하면 영은 맑아집니다. 영은 평안합니다. 그런데 몸은 어때요? 몸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배가 아플 것 같은데 배는 아프지 않고 고프고 머리가 아픕니다. 먹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금식을 하니 몸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영이 평안하게 해야 하고 육체에는 약간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느라 수고하는 고통, 기도에 헌신하느라 격는 고통, 봉사하느라 격는 고통 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몸이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깊어질 수 있고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크리스천들이 편안하고 쉽게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것을 이용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우리교회는 십일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주일날 반드시 나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나오고 싶을 때 나오시면 됩니다. 우리교회는 봉사를 안 시킵니다.” 처음에는 이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교회 문을 닫기에 이르렀습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습니다. 고난이 있어야 영광이 있고 십자가가 있어야 면류관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신앙생활의 좁은 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들어가야 할 좁은 문 몇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1. 구원의 문이 좁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딤전 2:4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때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수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노아와 7식구 총 8명에 불과했습니다. 구원을 얻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롯이 살던 소돔성을 불로서 멸망시키셨습니다. 소돔성에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롯과 롯의 2명의 딸 외에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눅 17:26-29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이 멸망 할 때는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이 육체의 쾌락에 빠져 살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또 구원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약 70억 명 정도 됩니다. 그 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약 29%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를 모두 더한 것입니다. 그 29%가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도 70억 인구 중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약 20억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50억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믿음입니다. 제가 과거에 읽었던 어떤 글에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약 5%만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서 5%라면 70억 인구 중에 약 1억 정도가 구원을 얻고 나머지 약 69억은 멸망을 받아 지옥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문이 좁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적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구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육체의 쾌락을 위하여 사는데 바빠서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잘못된 구원에 관한 지식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서울만 가면된다는 식으로 구원의 길이 다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구원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작이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영생이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불행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으시고 구원의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순종의 문이 좁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 보면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거짓선지자인지 참선지자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반석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집이 무너지게 됩니다.
   
순종의 문이 좁은 것은 이스라엘의 왕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왕만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왕들이 불순종했습니다.
   
통일 왕국이었던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 시대를 빼고 분열왕국의 왕들을 살펴봅시다. 남유다의 왕은 르호보암부터 시드기야가지 20명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선한 왕이 8명 악한 왕이 12명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부터 호세아까지 19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선한 왕은 단 한 사람도 없고 19명 모두가 악하거나 극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만큼 순종의 문이 좁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삼상 15:22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 첫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햇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오후, 개구리 세 마리가 나뭇잎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뭇잎이 강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그 중 한 마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 테야!” 다른 개구리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나뭇잎에는 몇 마리의 개구리가 남았을까? “두 마리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틀렸다. 나뭇잎 위에는 여전히 개구리 세 마리가 남아 있다. 어째서 그럴까? 뛰어들겠다는 ‘결심’과 정말 뛰어드는 ‘실천’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뛰어들겠다는 결심만 했을 뿐이다. 녀석이 정말 물속으로 뛰어들지, 또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다시 앉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는 일과 말씀을 실천하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일과 말씀을 실천하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마 21장에 보면 주님이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해라”라고 말하니 아들이 대답합니다. “예,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포도원에가서 일 하겠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금방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주님이 질문하셨습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여러분!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습니까? 당연히 말씀에 순종한 둘째 아들입니다.   
신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신 11:26-28입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순종의 문은 좁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요즘 주님이 주시는 레마가 있습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음성을 듣기는 잘 듣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의 문은 좁습니다. 
 

3. 기도의 문이 좁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곧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하십니다. 이 말은 기도의 문은 좁은 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승천 직전에는 500여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니 얼마나 흥분이 되었을까요? 정말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기도의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형제가 500여명이었으니 자매와 아이들 까지 합치면 2천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을 덧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기다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남아서 기도하다가 성령 받은 사람은 남녀노소 통틀어서 120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 중에서도 기도의 좁은 문에 들어간 사람들이 약 16%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말세지말입니다.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세에 대한 교훈을 주실 때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지속적인 기도생활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첫째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기도하기보다는 쉬거나 놀거나 일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려면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둘째는 마귀가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에 깨어 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이 우리를 기도하게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요즘은 백수도 바쁜 세상입니다. 기도하려고 엎드리면 할 일이 생각납니다. 세상은 육체를 즐겁게 합니다. 즐거운 일이 널렸는데 고리타분하게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호흡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숨 쉬는 것을 멈추면 죽는 것처럼 기도를 쉬게 되면 영적으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히트했던 손목시계가 있었습니다. 티멕스 시계(TM)입니다. 이 시계가 인기를 끌게 된 결정적 동기는 TV 광고였습니다. 시계를 비행기 위에서 떨어뜨립니다. 트럭으로 깔아뭉개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계를 향해서 바윗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결국 시계는 깨지고 망가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계가 가고 있었습니다. 

광고 마지막 멘트가 이것이다. “티멕스 TM, 그래도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래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기도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4. 감사의 문이 좁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다보니 나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에게 돌아와서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0명 중에 1명만이 주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감사의 문도 좁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여러 목사님들이 함께 지방을 다녀오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상일동에 사시던 목사님이 옆에 앉은 목사님께 “나는 창 쪽에 안고 싶으니 자리를 바꿔주세요”라고 하셨어요. 창가에 계신 목사님도 창밖을 보는 것이 좋지만 그 목사님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분이 창가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트럭이 버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딱 한분만 돌아가셨는데 자리를 바꿔 창가에 앉으셨던 상일동 목사님만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먼저 그 자리에 앉았었던 목사님은 자기가 죽었을 텐데 자리를 바꾸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그 다음에 그 목사님은 상일동목사님으로 인해 살게 되었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고맙지요. 그래서 그 목사님은 상일동 목사님의 가족들을 지금까지 돌보고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 분을 생각하며 감사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혹 다른 은혜를 받지 못해서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산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은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문제를 만나도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LA에서 목회하시는 한 유명한 목사님이 백령도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실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께서 배에 타려고 하니 경찰이 안 된다며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배에 너무 많이 타서 더 이상 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흥회를 인도할 강사라서 꼭 이 배를 타고 가야 됩니다.”, 
“안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야 됩니다.”, 
“못 갑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경찰을 확 밀어내고 배에 뛰어오르려 하는데, 경찰이 목사님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사님이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의 온몸과 가방이 물에 다 젖었습니다. 

여관으로 돌아온 목사님께서 “그 경찰관 때문…….” 하며 다 젖은 성경을 말리고 있는데,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경찰관이 막 달려온 것입니다. 

“목사님, 제게 감사하세요.”, 
“무슨 말이오? 내가 이 꼴이 되었는데 감사는 무슨 감사요?”, 
“목사님, 목사님께서 타시려던 배가 침몰했어요. 풍랑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죽었답니다. 저 때문에 목사님이 산 줄 아세요.” 

목사님께서 사신 것은 그 경찰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이 형통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사고가 나거나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나도, 일이 안 되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큰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종으로 팔린 것도, 종살이도, 옥살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이런 것을 깨달은 사람은 감사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고난도 감사하고 문제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들어가야 할 좁은 문 몇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1. 구원의 문이 좁습니다.
   2. 순종의 문이 좁습니다.
   3. 기도의 문이 좁습니다.
   4. 감사의 문이 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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