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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완성된 축복 (잠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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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축복 (잠 22:4)

저는 우리나라 전체가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나라가 복을 받는 길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북유럽 국가 중에 인구가 약 500만 밖에 안 되는 핀란드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핀란드 사우나로 유명한 나라이지요. 핀란드는 역사상 전쟁이 990회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 사상이 들어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피를 흘리며 투쟁하는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공산 사상에 빠지면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의 어머니들이 믿음이 좋아 기도하여 결국 그 나라가 민주주의로 견고히 섰습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나라가 사는 길은 예수뿐이고 하나님뿐이고 교회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국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 우리 개신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지상 천국 같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범죄가 거의 없고 경제인들의 청렴결백 지수가 세계 1위입니다. 세금을 속이는 경제인이 없고, 부정을 행하는 공무원이 없습니다. 사창가가 없고, 스트립쇼를 하는 곳이 없고, 요정이 없습니다. 노래방도 없습니다. 수돗물은 바로 마실 수 있는 100% 좋은 생수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을 교회에서 합니다. 평화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면 나라도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개인도 잘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이 나라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 가지 복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완성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완성된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사람들이 복을 받기는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불완전한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은 있는데 건강하질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도 있고 건강하기는 한데 명예가 부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육적으로는 풍성한데 영적인 부분이 부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는 풍성한데 육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받은 복은 뭔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받은 복에는 부족한 점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받은 복이 미완성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완성을 향해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학적인 용어 가운데 성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점점 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전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모든 복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적인 훈련을 거치면서 점점 풍성해지는 완성된 복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삼하 5:10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아주 강성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사울에게 쫓기고 도망을 다니고 토굴에서 생활할 정도로 약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강성해져서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주변국들을 다스리는 강성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완성된 복을 보여주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어렵고 힘들어도 결국은 완성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힘들다고 신앙생활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그리하면 결국은 완성된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룹니다. 먼저는 완성된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완성된 복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고 저와 여러분은 완성된 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완성된 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1) 완성된 복의 내용 첫 번째는 재물입니다. 
   
‘재물’은 ‘오셰르’라는 말로 ‘부, 재산’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재정적인 축복도 주셨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 13:2에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그에게 영적인 신령한 복만 주신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을 주셔서 완성된 복에는 재정적인 축복도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재정적인 축복에 대한 믿음도 갖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잠 10:22에 보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분명한 말씀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부하게 하십니다. 재정적인 복입니다. 그리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십니다.
   
특히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물질적인 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고후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천지의 주인으로서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완성된 복의 첫 번째 내용은 재물입니다. 
 
   
2) 완성된 복의 내용 두 번째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카보드’라는 말로 ‘영예, 명예’를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영광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 28:1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신 28:13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명예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영광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나를 높이시고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열심히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복이 완성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되게 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여 브닌나에게 핍박과 서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셔서 한나에게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삼상 2:8입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한나는 자기 백성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믿는 하나님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거름더미에 던져진 하찮은 사람을 일으키시고 높이셔서 영광을 주시며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3) 완성된 복의 내용 세 번째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이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이임은 복수형입니다. 복수형을 사용한 이유는 육체의 건강과 영적인 건강 모두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육체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병들지 말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혹 지금 병든 분들이 계시다면 복음의 능력으로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우리가 건강한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8:17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던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짐을 짊어지고 힘들어하는데 제가 여러분의 짐을 대신 짊어지면 여러분은 어떻게 됩니까? 그 짐의 무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로 인하여 병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것은 복음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만 건강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해도 영적으로 죽어있다면 말짱 꽝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는 건강하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영적인 상쾌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 28:12에 보면 안식과 상쾌함을 말씀합니다. 영적인 상쾌함은 영적으로 찜찜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 영적인 찜찜함을 느낍니까? 죄를 범했을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사랑하지 못할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영혼의 부담감에 순종하지 못할 때도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잘못된 습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무엇엔가 눌려 있을 때 영적으로 찜찜합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으면 당연히 영적으로 찜찜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영적인 찜찜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상태가 중병에 걸린 정도의 수준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엇인가 영적인 면에서 찜찜한 상태에 있다면 해결할 것은 해결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시고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상쾌함의 수준을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영적인 자유와 상쾌함이 더해져야 정상입니다. 갈수록 영적으로 건강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생활이 습관화되어지고 오히려 영적으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찜찜한 것들을 털어버리지 않고 가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 작은 허물이라고 해결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히 12:1에 보면 사도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벗어버릴 것은 벗어버리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찜찜한 것들을 털어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이 쌓이게 되고 결국 그것들이 우리를 영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몸에 수은이 소량이 들어오면 몸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수은이 몸에 들어와서 쌓이게 되면 수은 중독에 걸리게 되고 우리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영적인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영적으로 상쾌하여 영적인 생명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완성된 복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이 복을 모두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2. 완성된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이라고 말합니다. 겸손하게 삽시다. 하나님을 경외합시다. 그럴 때 완성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겸손해야 합니다. 
   
성경은 겸손이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특히 잠언에서 겸손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잠 18:12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유명한 어거스틴이 하루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훌륭한 크리스찬이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잘 믿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겸손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사가 마귀가 된 것은 교만 때문이고, 사람이 천사가 될 수 있는 길은 겸손하면 되느니라” 천사가 교만해 가지고 결국 마귀가 되었습니다. 교만하면 아무리 천사라도 마귀가 됩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사람이라도 천사처럼 됩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남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빌2:3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남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낫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뜻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자기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복을 받았던 이유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겸손했다는 증거는 그의 일생이 자기의 뜻을 이루는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애였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행 13:36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다윗의 일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겸손함은 사울 왕에 대한 처신에서 나타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굴속에 사울이 뒷일을 보기 위하여 들어왔습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사울만 죽이면 도망자 생활이 끝이 나는 것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의 종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겸손함의 증거입니다.
   
사람에게 겸손한 사람은 상대를 존중합니다. 상대가 가진 재물이나 상대의 능력을 따라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겸손하면 상대에게 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겸손한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말발이 아주 센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며느리입니다. 항상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며느리였습니다.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조용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며느리의 겸손에 시어머니가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처음부터 꽉 잡아 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시집살이를 아주 강하게 시켰습니다.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일부러 모욕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겸손하게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냐?” 

며느리는 공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 

어느 때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 며느리는 도리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 식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대꾸라도 해야 큰소리를 치며 나무라겠는데 무슨 말을 하여도 다 겸손히 받았습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저와 여러분은 겸손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겸손을 표현하시고 사람에게는 상대의 영혼을 보고 상대를 귀중하게 여겨서 겸손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충만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경외의 두려움은 날마다 매를 드는 무서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공포심을 갖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신기한 두려움입니다. 즐거움이 있는 두려움, 행복한 두려움입니다. 어떻게 즐거워하면서 두려워하고 행복해 하면서 두려워할 수 있을까요? 신기한 두려움입니다.
   
시 2:11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하나님 때문에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신 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떠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외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항상 함께 갑니다. 

신 6:2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신 10:12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하나님 경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창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보다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장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순종해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겨우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음성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이삭에게 칼을 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말리셨습니다. 

창 22:12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우선순위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 이삭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을 보시고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살펴봅시다. 나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있는가? 혹시 우선순위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순위가 자식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순위가 물질에 있지는 않습니까?
   
왕상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의 신앙을 보여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잇습니다. 그 당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세계가 기근으로 굶주릴 때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셔서 한 과부를 통해서 공궤를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났을 때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할 때였습니다. 엘리야가 그 마지막 남은 가루로 자신을 위하여 떡을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했을까요? 

왕상 17:15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마지막 남은 가루인데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합니다. 그녀의 우선순위는 자기 목숨이나 아들의 목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우순선위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지금은 마지막 시대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데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데 우선수위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내가 손해를 봐도 하나님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인 증거는 세상에 나가서 우리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린드버그는 1930년, 당시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느 날 린드버그가 파리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온다는 소문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 당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5만 달러면 약 6천 만 원입니다. 지금부터 8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 정면에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 피울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담배 회사 사장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린드버그의 그 말이 다음 날 바로 파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나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린드버그의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완전한 축복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을 보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상’이라는 말은 ‘발뒤꿈치를 잡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이 단어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취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모하십시오. 간절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 달려드십시오. 겸손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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