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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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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17-24)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최고의 교부 가운데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플라톤에 능통한 탁월한 철학교수였습니다. 후에 그는 신플라톤주의 이론으로 무장했고 또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지만 당대에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욕입니다. 어거스틴은 16살부터 사회적 신분이 천한 여인과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 여인과 헤어져 14살의 로마 여자와 약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법적 결혼 연령인 16세까지 2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는 다른 여인과 동거를 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는 삶과는 다르게 성적으로 난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스스로도 늘 괴로워했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최고의 철학은 무슨 소용이 있나? 이렇게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도 절제하고 해결하지 못하면서 네가 무슨 대학교수이며 스승인가?’ 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밀라노의 주교로서 교회를 이끌며 명설교가로 이름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구하기 위해 듣기 시작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그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생활의 대부분을 끊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갈등을 심각하게 하고 있을 때 창문 밖에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어거스틴은 그 노랫말을 들으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을 느끼는 가운데 서재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쳐 들고 제일 먼저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식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는 로마서 13장 12-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어거스틴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얽매여 살았던 음란하고, 무질서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사도 바울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기면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교부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옛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을 새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의 삶은 ‘악’이 서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악순환의 삶입니다. 22절에 그 악순환의 시작이 되는 첫 고리가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구습, 즉 옛 습관’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이 시작되는 원인을 ‘유혹의 욕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을 지배하는 근원은 유혹의 욕심입니다. 욕심은 악한 삶이 시작되는 최초의 고리입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욕심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선악과를 따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 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무시했습니다. 욕심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19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람이 유혹의 욕심에 매이기 시작하면 총명이 어두워지고, 지혜를 잃게 되며, 마음이 욕심으로 굳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판단력이 흐려져 분별의 감각을 잃게 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허망한 것을 쫓아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혹의 욕심으로 인해 허망하게 삶을 마감한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 왕입니다. 그의 인생의 시작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도리어 교만과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혜로왔던 사람이 욕심을 품기 시작하면서 총명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12지파에게 정해주신 행적 구역을 자기중심으로 재편성합니다. 그 재편성의 내용을 보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큰 땅을 반토막 냈습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하면서 지참금으로 이웃 왕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떠나 결국은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전도서 1장 2절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축복되었던 그의 삶은 욕심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자손들에게까지 아픔의 역사를 물려주었고 결국은 허무를 탄식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개인과 가정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욕심입니다. 사회와 나라조차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욕심입니다. 과한 욕심이 얼마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공동체를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우리는 아픈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얼마나 어리석을 행동을 하게 하는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도 보고 있습니다. 

욕심 앞에는 대통령도, 장관도, 교수도, 기업가도, 시민운동가도, 종교인도, 목회자도 없습니다. 유혹의 욕심에 쌓이기 시작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각을 잃어 어리석게도 허망한 것을 쫓으며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옛 사람의 못된 습관을 끊고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이 익숙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려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것에서 벗어나 어색하고 힘든 과정을 지나야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옛 사람의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된 습관은 당대만이 아니라 대를 이어 가정과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 때 아주 욕을 잘하는 가정에서 자란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욕을 잘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성장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부부는 어떤 기회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욕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 하나가 있는데 싸울 때마다 아빠는 ‘이년이..’라고 하고 엄마는 ‘이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지켜보던 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빠!! 년이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아빠는 ‘응, 그..그게...어른들이 여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야.’ 라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엄마, 놈은 무슨 말이야?’ 역시 엄마도 당황해 하며 ‘그러니까 그게... 어른들이 남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란다.’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가서는 욕을 잘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아빠 엄마가 이년이, 이놈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가 무슨 말이야’ 할머니 역시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으~~응, 그게 말이지... 잘했다고 박수 친다는 소리야.’라고 했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가 학부모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롱 잔치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재롱 잔치가 끝난 후 단상에 올라와 꾸벅 절을 한 이 아이는 또랑또랑한 말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자리 오신 모든 연, 놈들...!! 다함께 지랄하고 자빠집시다!’ 

벗어야 할 옛 습관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모이면 인생이 됩니다. 사람은 습관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드는 사람은 병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 같지만 습관이 자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습관이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옛 사람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의 잘못된 습관을 버릴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2-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에서 ‘새롭게 되다’라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 나를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해 내가 새롭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내 힘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가 사단의 종노릇 하던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새 사람의 습관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벗는다. 입는다’는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우리들은 옛 사람의 악한 습관을 바꾸어 가는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하고자 하는 기준이 ‘하나님을 따라’입니다. 

옛 사람은 무엇을 따르는 삶이었느냐 하면 22절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르던 우리가 예수님은 만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따라 닮아가기를 사모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치약 짜는 습관 하나, 옷을 벗어 놓는 습관 하나 조차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십 년간 자신의 욕심과 욕구를 중심으로 살아오는 가운데 몸에 배어 있는 언어와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욕심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을 중심으로 한 생각들과 언어들이 주장되고 행동되니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심이 서로 충돌하는 삶의 자리는 전쟁터이며 지옥 자체입니다. 그곳에는 평안과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탓, 변명과 불평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옛 사람의 악한 습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거룩함이 기준이 되는 새 사람의 습관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에는 치유되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하나 됨으로써 갖게 되는 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루어야 하는 가정이고 교회입니다. 그 변화를 위해 우리들은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 가는 훈련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삶도 영적인 시행착오가 반복되겠지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거룩한 삶이 훈련되는 현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주 동안 사랑과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를 복되게 품고 세우는 새 사람의 습관이 행해지는 가운데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영역이 천국으로 변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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