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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지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마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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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마 16:24)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에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달라고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카리우스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예수님 당시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관점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각기 달랐지만 거기에 일치되는 것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제자들로부터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또한 자신의 신앙 대상으로 믿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로부터 신앙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주님께 그와 같은 처참한 일이 닥쳐서는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엄히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어야 할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교훈하시고 복음을 위한 순교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요즘 여자들 장식품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사랑을 상징한 하트 모양이고 그 다음은 십자가 모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장식의 악세사리들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십자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에는 목매는 방법과 칼로 단두대에서 목을 잘라 죽이는 방법, 불로 태워 죽이는 방법,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큰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데 나무 위에 사람의 손과 발을 못박아 햇볕에 쪼여서 길거리에다 매달아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는 십자가 형벌을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이었습니다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합니다. 그런데 그 잔인한 십자가가 장식품으로서 인기가 있다는 것을 정말 아이러니칼한 일이라 하기도 합니다. 굳이 좋게 생각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깊은 뜻을 이해하고 마음속 깊이 새겨서 그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표시로 달고 다니는 것이면 좋겠다하기도 합니다.

어쨌던 십자가는 가장 힘들고, 괴롭고, 무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을 향하여 가시는 중에 로마 병정들의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채찍 끝에는 쇠갈고리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을 때마다 붉은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너무나 무겁고 지치셨기에 쓰러집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결국에 갈보리 산에서 녹슬고 굵은 쇠못으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을 십자가에 달려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날카로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를 다 쏟아졌습니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이기에 가장 힘들고, 괴롭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괴롭고,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다 십자가로 말합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까닭에 당하는 어려움을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까닭에 핍박을 받는 것, 예수를 믿기 까닭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 예수를 믿기 까닭에 짐을 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원래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창피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진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 노예,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데 쓰였던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형벌을 상징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십자가는  본래 죄수에게 형벌을 주는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여러 가지 사형 도구가 있었으나 가장 극악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통나무로 만든 십자가 형틀에 사형수를 올려놓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은 채 매달아서 피와 진액이 흘러내려 고통 중에 죽어가게 하는 잔인한 형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나무로 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 경우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고 하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의 피로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신 21:23).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그 양편에 두 사람의 강도가 처형당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들을 “행악자”라고 하였습니다(눅 23:39).
   
그러므로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나 멍에를 상징합니다. 옛날 이삭은 아들 에서에게 유언을 하면서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했습니다(창 27:40). 이 말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하셨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마 26:3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지고가야 할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멍에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거나 가족 가운데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또는 애물단지 같은 자식을 두고 마음에 고통을 겪는 경우 흔히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기독교의 표상이며 자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유 외에도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십자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고 기독교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의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며 십자가의 양면성을 나타내었습니다(고전 1:18).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빨간 십자가 깃발이 있는 곳이면 서로가 생명을 아끼고 돌봐주는 인류애가 꽃피었습니다.

십자가의 표식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기독교의 상징(Symbol)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를 표시하는 공통적인 기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기구나 단체들도 거의 십자가의 도안을 로고에 넣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십자가는 인종이나 정치, 종교에 구분 없이 인도주의 정신으로 사랑과 봉사활동을 하는 기관임을 나타냅니다. 청십자나 녹십자의 의미는 병원이나 약국 같은 생명을 돌보는 기관의 표시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인류에게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대명사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상징이며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의 표식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도리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의 형틀에 올려놓는 것은 그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판정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다 죄 아래 있어서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거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지만(히 4:15)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그에게 지우셨기 때문입니다(서 53:6)

십자가는 대속의 원리를 알려줍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원시복음이요, 속죄의 제도입니다(창 3:15).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제사 제도는 소와 양 같은 짐승의 피를 흘리고 그것들을 제단에서 불태워 드렸는데 이는 사람이 받을 형벌을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속의 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고 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희열과 행복의 근거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기서 사랑과 평화와 희망을 발견합니다. 범죄한 인간이 사죄의 기쁨을 얻습니다(눅 23:43). 극심한 갈등과 대립도 십자가 밑에서는 사랑과 화목으로 바뀝니다(엡 2:14-17).
이러한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는 사람은 사랑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찬송가 작가 클레페인(E. C. Clephane)이라는 여성은 신체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밀착된 삶을 통하여 그의 생애를 행복하고 향기롭게 살았다합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고 노래합니다(415장).
십자가의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원동력이 됩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부활과 승리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마 16:2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3-4).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과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딤후 2:11).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될 때 반드시 부활의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생 마음의 요동을 잠잠케 하고 승리하게 합니다.

성 프란시스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그가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인은  밭을 지나서 모퉁이에 있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옵니다. 그런데 그는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는 그렇게 깊지 아니한 우물에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면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참 신기하다 싶어 그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 속에 나무 조각을 집어넣어 끌어올리느냐?" 그랬더니 그 하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 조각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많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지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보면 반 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 보게." 마음이 공포로 짓눌리고 요동할 때는 십자가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나타내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마 10:38).

찬송가 339장을 작사한 토마스 쉐퍼드(T. Shepherd)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을 연상하면서 성도들도 저마다 제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논할 때 십자가와 분리시켜 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속에 오묘한 진리가 있음을 암시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나 아덴 지역은 희랍에서도 대표적인 철학의 도시이며 지성의 고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결과를 도출해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치부되었습니다(행 17:18). 그것은 사실입니다. 신비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은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이러므로 십자가를 지되 달게 지고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되 무거워도 억지로라도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자는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막 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올라갔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얻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라"(롬 16:13)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억지로 진 십자가도 영광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이이면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야 할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달게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로마에 가면 십자가의 길이 있고 베드로가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던 길이 있다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피해서 도망가는데 예수님께서 로마 성을 행해서 가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도스 도미네)"하니 주님은 "네가 십자가를 피해가기 까닭에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로마로 들어가노라"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십자가를 피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를 부인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자기 부인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 몫의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성도들이 되어애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나실 때도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동안은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이요 자기 포기요, 자기를 완전히 죽이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인정해 달라 대접해 달라 알아 달라 기분을 맞혀 달라 뜻을 존중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포기하고, 철저히 자기가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완전히 죽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앞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고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고 했습니다.

가족이 알아주지 않고 세상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 외로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손해보는 것 같은 길이요 어떤 때는 억울한 소리도 듣는 일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큰 영광으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 16장 27절)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니 그런 길을 왜 가시느냐고 베드로가 말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의 표시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오히려 책망을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몰랐을 때라면 당연히 주님을 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사람이 편리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갈 1:10)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길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함께 합니다. 
  
한 중년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그만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 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에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너무 섭섭하고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다음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닌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버스 운전기사가 이 부인에게 말했습니다.‘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주고 아줌마가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 주니까요.’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힘들 때,‘자신도 이루기 힘든 일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갔다고.’예수님을 원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원망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예수님 이제 우리 뒤에서 우리를 뒤따르며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보시며 ‘보이지 않는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우리’라고 하는 그 속에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신앙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있습니다. 
이 사실 바로 알고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 되되 십자가 지는 좋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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