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한은 무엇을 보았는가? (계 4:1-11) - 예배

첨부 1


요한은 무엇을 보았는가? (계 4:1-11)  

성경은 어느 부분을 읽든지 주요 메시지가 있고 그 주요 메시지를 위해 그릇을 준비하여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주요 메시지를 찾아내야지 메시지를 담아서 전해주는 그릇에 관심을 너무 가져서는 안된다. 그릇도 중요하다. 허나 담아야 할 알멩이를 위한 것이 그릇인데 누가 그 주요 메시지인 알멩이를 빼고 그릇에만 정신을 빼앗기겠는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릇 속에 담긴 주요 메시지를 놓치고 그릇에다가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는 안된다. 가령 존 윅 보우만이란 학자는 요한계시록이란 책이 희곡의 타입으로 쓰여졌다고 하였다. 즉 7막 7장의 드라마라고 하였다. 

이 드라마 형식에서 복음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즉 교회가 개선 행진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성취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릇은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읽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요한계시록 4장은 장면이 하늘로 바뀐 이야기이다. 지상 교회인 일곱 교회의 이야기에서 천상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에 사람들은 놀라서 이것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천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혼돈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한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4장을 교회가 휴거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계4:1下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러니까 환난 이전에 휴거론자들은 성도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휴거론자들은 몇 가지 이유를 말한다. 그럴 듯 하다. 그 이유를 무조건 외면하지도 않는다. 

다만 요한계시록 4장은 휴거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4장만 제대로 읽으면 성도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오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거하여 환난과 상관없게 되기를 희망할 수 있지만 마태복음 24장을 읽어보라. 

① 마24:5~9 대환난 때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한다.

② 마24:21~22 환난을 감하신다고 하였지 빼낸다고 하지 않았다. 감하신다는 것은 환난을 지나는 대신 주어진 시간의 길이를 줄여준다는 뜻이다.

③ 마24:9~13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끝이란 재난의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를 뜻한다.

④ 마24:29~31 환난 후 택하신 자를 모으신다고 하였다. 그 날 환난 후 이는 특정한 날 대환난의 기간 후란 말이다. 그러니까 환난 후에 모으시는 휴거다. 환난 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에서 요한이 이리로 올라오라는 것은 교회가 아닌 요한 개인이 음성을 들은 것이고 개인적으로 성령에 감동이 되어 하늘의 보좌를 목격한 것이다. 요한이 무엇을 보았는가?
  

1.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계4:2)

계4:2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4:9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계4:10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이처럼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란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이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 모양은 사람의 모양이 아니다.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 인격이신 하나님일뿐이지 코와 입, 귀와 수염이 달리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그 하나님의 모양은 앉아계시는 모양인데 계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은 그럴 수 없다. 다만 보석 빛처럼 찬란한 모양이다. 백옥은 푸른 빛이 감도는 고운 옥으로 하나님이 보이고 홍보석은 붉은 빛이 감도는 찬란한 보석으로 보이고,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으로 구성된 화려한 하나님으로 보이고 녹보석은 초록빛이 감도는 평안의 보석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모양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스스로 있는 분이시오, 구구에 의하여 피조된 분이 아니시다. 빛의 영광으로 존재하신다. 소멸되지 않는 영원자로 존재하신다. 그런데 그 찬란하고 빛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앉으신 모양이 무지개로 둘렀다.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언약을 영구히 지키는 분이 보좌에 앉으신 이다. 
  

2. 하늘에 베푼 보좌를 보았다. (계4:4~8)

세세토록 사시는 이, 그 하나님이 앉아계신 자리가 보좌다. 계4:2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요한은 보좌를 보았는데 그 보좌가 이렇게 배치되어 있다. 계4:4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있다. 그 24장로들은 흰 옷을 입었고 금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앉아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산헤드린 의원들이 앉아있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24장로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흰 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믿음으로 구원 받고 행위로 상을 받은 이들의 대표이다. 그런데 24장로란 꼭 24명의 사람들이 보좌에 둘러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24장로란 12+12, 즉 합해진 숫자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의 숫자다. 보좌 주위에 반원형으로 있는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고 심판하는 자리를 차지한 교회의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보좌로부터는 번개, 음성, 뇌성이 난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말해준다. 

출19:16을 보라. 시내산 위에 우레와 번개 소리가 있고 나팔소리가 날 때 진중 모든 백성이 떨게 된다. 보좌의 권위를 말해준다.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을 켠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다. 거룩한 성령이 보좌 앞에 있으시다. 보좌는 하나님만이 좌정하신 옥좌가 아니고 완전하신 보혜사 영이 그 앞에 있으시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유리 바다는 깨끗함, 순전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는 흠 없이, 티 없이 정결하고 깨끗해야 한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 네 생물의 모습은 사자 같고 송아지 같다. 또 사람 같고 독수리 같다. 그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앞뒤에 눈이 가득하다. 온 세상을 살피고 심판할 권세를 가진 자다. 천상에 있는 보이지 않는 피조물, 영적 존재들의 대표들이다. 

이처럼 요한이 본 보좌는 이렇게 기이하고 신령한 영적 존재와 구원 얻은 교회와 성령님이 계신다. 이것이 놀라운 비밀이요 경륜이다. (엡1:9~10, 3:3~7) 하나님이 계신 보좌, 요한이 본 영광의 보좌를 우리도 보여달라고 하자. 그러나 사실 이 보좌의 모습이 주요 장면인 것 같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영광의 광채가 나시는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보좌에 계신다. 
  

3. 하늘에서 계속되는 예배 장면을 보았다. (계4:9~11)

계4:9~11을 보면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려드린다.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란 말이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워십)이라고 한다. Worship이란 앵글로색슨어인 Worth-Scipe에서 유래한 것으로 Worth와 Ship의 복합 명사로 ‘~에게 가치를 돌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계4:9~11의 장면은 쉬지 않는 예배 장면이다. 

네 생물이 예배하고 24장로들이 예배한다. 영적 존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천사와 구원 받은 성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것이다. 네 생물은 찬양으로 예배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사6:15) 성전에서 본 천사들과 똑같이 참회하며 예배한다. 24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예배한다. 계4:11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하고 예배한다. 하나님께서 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가? 그 이유는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그 분은 창조주시다. 무에서 있게 하시고 말씀으로 생겨나게 하시고 주의 영으로 혼돈을 질서 있게 만드시고 삼라만상을 차례를 따라 만드시고 그 솜씨 오묘하다. 그 솜씨 광대하다. 그 솜씨 아무도 흉내낼 수 없으시다.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만드시고 식물과 동물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만드시고 마침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저 파도 소리, 저 해 뜨는 아침,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시는 자연의 세계,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땅하다.

천상에서 보좌를 보고 보좌에 앉아 계신 이를 본 것은 대단한 장면이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 있는 24장로와 4생물이 다같이 예배하는 것이 더 대단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다. 천상에서 다같이 예배하듯 영광의 빛이 하나님을 넘어, 언약의 하나님을 넘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엎드려야 한다.

왜 지상의 교회가 이 사실을 외면하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니 예배를 폐하려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예배를 드린다 하면 방학하자고 한다. 예배가 끝나면 자유를 얻은 자처럼 좋아한다. 

내가 가 본 미국의 교회는 수요 예배가 없어졌다. 생일 축하하고 저녁 식사하는 것이 수요 예배다.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를 드리려 한다. 이래서는 안된다. 신비하고 기이한 하늘 보좌, 아무리 그 보좌가 빛으로 황홀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예배하더라는 것이다. 

주님의 형상을 가진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받아써야 될 머리의 관, 상급까지도 다 벗어 주의 보좌 앞에 드리며 예배하는 것이 천상의 장면이라는 것이다. 이 천상에 나아간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도록 하라. 하나님을 예배하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살아있는 예배가 필요하다. 믿음의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가 살아야 한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계속되어야 한다. 토굴에서도, 로마 황제의 궁에서도, 시장 속에서도, 고기 잡는 어촌에서도 예배가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늘이 주는 메시지다. 

여러분! 예배하십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