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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골짜기에 개천을 파는 신앙 (왕하 3: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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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 개천을 파는 신앙 (왕하 3:13-20)

요즈음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건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성폭행 사건이 그것입니다. 정말 사회적인 문제로 남아 있는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성폭행 범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종의 집착입니다. 성인물 잡지나 영상을 보고 그것을 상상하며 그대로 시행해보려고 하는 집착이 행동으로 나타나 사건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집착이 만들어내는 어이없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뭔가 한 가지에 집착하면 그것 밖에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얻어야만 끝이 납니다. 

사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집착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옳은 것과 아무리 집착을 해도 얻어서는 안 되는 그른 것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부모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범인들은 이런 교육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든가 주로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낸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릴 때에 습관이 되고, 학습화 된 이 잘못된 집착을 성인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올바르고 건전한 것에 편집(偏執)한다면 발전적이고 성숙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에 편집(偏執)한다면 마지막은 언제나 불행입니다. 

[헨리 나우웬] 이 쓴 <마음의 문을 열고>라는 책에 나오는 한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발작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간호사 두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후에 진료를 시작하려던 의사는 환자가 오른 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스로 손가락을 펴보니까 딸그랑 하고 퍼렇게 녹이 슨 동전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환자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는 이 동전과 같아서 ‘누가 와서 칼로 찌르고 이것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이걸 빼앗기면 나는 죽는다.’ 라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매일을 시달리면서 있는 힘을 다해 동전을 움켜쥐고 지금까지 살았던 정신적 질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중독증과 집착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중독이 있고, 인생을 망치는 집착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디에 집착을 하고 사느냐,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사느냐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주파수를 어디에다 고정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적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말을 나도 하고, 그분이 침묵할 때 나도 침묵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라디오나 FM방송을 들을 때에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얼마나 듣기가 거북합니까? 잡음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신경질이 나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끝까지 주파수가 안 맞아지면 어떻게 합니까? 네, 꺼버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과 영적주파수가 잘 맞춰져 있을 때는 몸도 마음도 깨끗합니다. 신앙생활에 아무런 잡음이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아주 잘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그 주파수가 빗나가면 신앙도, 삶의 모습도 그렇게 엉망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 쪽에서 결코 주파수를 뒤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내 편리한대로 주파수를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주파수가 언제나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주파수가 세상에 고정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입맛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앙으로 주파수를 돌려놔야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파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왜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위기 속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태위태한 일들을 만나며 갑니다. 이러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돌아보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전파를 맞추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잡음들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자존심, 허영심, 명예욕, 미움, 다툼, 시기, 질투, 고집, 오만, 불손, 비방......이 모든 것들은 잡음들입니다. 깨끗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방해 전파들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실패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세상이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주파수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절망의 골짜기에 샘물이 흘러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모압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중에 에돔광야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가자 마실 물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골짜기에 까지 바짝 말라 물을 구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꼼짝 없이 생명이 위급한 이 상황에서 [여호사밧] 이 [엘리사] 를 통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개천을 많이 파라고 하신 후에 그 개천에 물이 흘러넘치도록 채우시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연합군이 모압을 이기는 승리를 주십니다. 

자, 전쟁 중 광야 한 복판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왕 [여호람] 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절망은 곧 불평과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10절 말씀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작정하셨구나.” 하고 한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 은 신앙적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우리의 이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고 말합니다. 이 두 왕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문제 앞에 낙심과 절망과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모습과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신앙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또한 이 둘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이 위기 앞에 마침내 믿음이 있었던 유다 왕 [여호사밧] 의 말대로 연합군 왕들이 [엘리사] 를 찾아가는 신앙적인 해결 방법을 택합니다. 이제 [엘리사]가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13-14절에 나오는데 풀어 말씀드리자면 이런 말이 됩니다. “천하에 불 신앙적이고 불평꾼이고, 원망 꾼인 이스라엘 왕 여호람, 당신은 내가 얼굴도 보기 싫소이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한 번도 찾지 않던 불신앙으로 살다가 이제 어려움이 닥치니까 겨우 원망이나 하려고 하나님을 찾다니 쳐다보기도 싫고 얼굴도 대하기 싫소이다. 다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의 방법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진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참는다.” 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적을 이끌어 낸 것은 [여호람] 의 인간적인 지혜나 모사 때문이 아니라 [여호사밧] 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사] 가 하나님께 아뢸 준비를 하는데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거문고 탈자를 불러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문고를 타는 중에 엘리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해줍니다. 이 속에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신앙적 준비입니다. 말하자면 이 거문고 줄은 엘리사의 영성의 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통의 줄이었습니다. 영성의 줄, 믿음의 줄이 느슨해지고 헝클어지면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들에게 문제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이 풀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부의 적인 모압 군대의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가 더 큰 법입니다. 그래서 문제의 최고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오늘 [엘리사] 는 [여호사밧] 의 부탁을 받고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할 자세입니다. 여러분의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잘 조율이 되었습니까? 기도의 줄이 풀리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찬양의 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의 멋진 연주를 해내야할 여러분의 영성의 거문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 준비하고 나아가는 엘리사에게 문제해결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오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문제해결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골짜기가 어떤 골짜기였습니까?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당연히 시냇물이 흐르고 샘이 솟아야 할 골짜기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말라버린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 대신 돌멩이만 뒹구는 마른 골짜기였지 않습니까? 

옛날에야 아무리 훌륭한 골짜기였을지라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지 못하는 말라빠진 골짜기라면 그 존재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내세울 만한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있다할지라도 그 영혼 속에 생명의 샘, 구원의 샘, 은혜의 샘이 흐르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이요, 메마른 골짜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빈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고하십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비올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다만 믿음으로 파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개천을 파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징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개천을 파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고 내리시는 처방입니다. 그 음성이 들린다면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내가 주장할 상식도, 이유도, 핑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듣고 순종하여 개천을 파면 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골짜기를 걸어가는 인생에게 위기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은 믿음 있는 자위에 임합니다. 절망의 골짜기, 위기의 골짜기라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믿음으로 개천을 파는 자에게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한분께만 주파수를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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