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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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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 (눅 7:11-17)

어떤 사람이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겪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위암으로 투병 중이시고, 남편은 간이식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식을 받지 않고 죽겠다고 술만 마셔댑니다. 이 사람은 그 환경이 정말 힘들어서 아파트 9층에서 뛰어 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베란다로 올라서는데 만취한 남편이 순간 그것을 보고 “거기서 뭐하느냐!”고 비틀거리면서 딴에는 잡으려고 다가가는데 죽으려고 베란다에 올라섰던 그 여자는 순간 술 취한 남편이 잘못해서 비틀거리다가 자기를 밀어 버릴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가까이오지 마! 누굴 죽이려고 그래!”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도로 내려왔다고 하면서 죽는 것은 절대로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우스운 얘기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 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고 대답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기준은 언제나 행복이냐 불행이냐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가져야행복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삶이 되어야 행복의 궤도에 올라 설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숨 가쁘게 달음질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불행하다.” 라고 결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 얼마를 가지고 얼마를 누려야 행복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즉 행복의 답을 그 소유에서 찾으려한다면 그 한계란 영원히 없단 말입니다. 행복이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있을 수고 있고, 자기만의 세계에 훨씬 많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베토벤] 의 음악에는 남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음악의 대부분이 도입부에는 슬프고 처량하지만 마지막은 환희를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음악이 명곡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고통의 삶에 얻어 낸 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열일곱 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토벤은 나이 서른에 음악가의 생명인 귀에 이상이 생겨 만년에는 청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보라치는 쓸쓸한 밤에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눈을 감겨준 사람도 지나가던 한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은 고백합니다. “나는 괴로움을 뚫고 항상 기쁨을 발견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의 행복은 어디에서 왔다는 것입니까?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자기 가치관에서 오히려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행복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를 생각해야합니다. 가치관이란 한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행복이냐 라는 명확한 자기 기준이 바로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만장자의 불행이 있을 수도 있고, 가난한 자의 행복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의의를 지니고 있느냐까지를 생각하는 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 세계관이 역시 그의 행,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삽니다만 그것을 잘 살펴보면 크게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운명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절대적으로 운명이나 요행을 믿으며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기대하며 거기에 인생을 거는 사람입니다. 기회만 엿보고, 사행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마치 화투장을 쥐고 있는 도박꾼처럼 삶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소망이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보상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주 합리적이요, 현실적이요, 지성적이며 당연한 생각이 있습니다만 모든 것에는 보상이 따라야 하고 노력의 대가로 반드시 얻어지는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똑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얻을 건 얻고, 받을 건 받아서 정당한 것 같은데 무언가 메말랐습니다. 세 번째는 <은혜중심적인 세계관>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우선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은혜가 있다는 <선재 적 은혜(先在的 恩惠)>를 믿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 안에 내 수고가 있는 것이고, 그 은혜 안에 내 땀 흘림이 있고, 은혜 안에 결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은혜중심의 세계관> 입니다. 

이러한 은혜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따라 오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은혜를 눈으로 목격하고 마음으로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삶인지 아시지요? 은혜를 알면 그 은혜의 뿌리를 알고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이란 어떤 은혜를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는 주님과 동행할 때에 얻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다음에 나인이라 이름 하는 성으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님과 동행했다는 이 사실이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나인성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나게 되고 예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사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같은 은혜는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장면이지 않습니까?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라지만 불쌍한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는 것은 동행하는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동행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냥 걸어가는 것이 동행이 아닙니다. 함께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같아야합니다. 말하자면 동행이란 따로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목적지가 같아야합니다. 그리고 뜻이 같아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부란 살면서 모든 것이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생각도 행동도 같아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평생을 갈 수 있는 것이거든요. 재밌는 이야기 중에 부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연애 결혼한 사인지 중매 결혼한 사인지 안다고 한다잖아요. 부부가 나란히 걸어가면 연애 결혼한 사이고, 남편이 저 만치 앞서서 빨리 가고 아내는 땀 흘리면서 뒤따라가는데 왜 빨리 안 오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가는 부부는 영락없이 중매결혼한 사람이랍니다. 연애결혼이 좋고, 중매결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만큼 사랑의 감정으로 더 많이 동행했느냐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연애한 만큼 동행한 흔적이 있거든요. 

주님과 더불어 동행한다고 할 때도 주님이 정말 좋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기에 한 발자국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주님의 목적에 내 목적이 맞춰지고, 주님의 뜻과 방법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동행이 있어야 영광도 볼 수 있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변화로 말미암은 은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과부였습니다.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던 어느 날 남편이 시름시름 앓더니 손도 써보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겨우 추스르고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그 아들마저 지금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가했더니 이제 땅이 꺼지는 슬픔이 또 닥쳐 올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졸지에 닥쳐 온 불행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여인에게는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힘이 되지 않습니다. 관을 따라 나오면서고 얼마나 울었던지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울지 말라.” 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는 여인을 달래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 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 관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청년의 시신이 있습니다. 즉 해결해야할 문제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의 문제에 개입하셨습니다. 천하 만민이 무수히 관에 손을 대고 둘러매기까지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죽은 청년이 살아나는 것과는 무관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죽음이 생명이 되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단 말입니다. 

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나의 문제에 손을 대시고 그 문제에 개입하시면 거기서부터 문제는 풀리는 것입니다. 도무지 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는 소망이 없는 문제일지라도 주님이 개입하시면 완전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15절을 보면 주님께서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는 “어머니에게 주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회복입니다. 아들이 죽었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관에 넣었다는 것은 사실상 포기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이 장례식입니다. 그랬었는데 그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되돌려 받기까지 했으니 집에 돌아와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아마 장례 음식이 잔치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변화가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는 무엇이 변화되었습니까? 그 변화는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계십니까? 변화로 인한 은혜, 은혜로 인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큰 은혜입니다. 목적도 뜻도 주님과 함께 하여 그 은혜로 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 또한 놀라운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한결 같은 그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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