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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대하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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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대하 1:1-17)


사람은 누구나 다 평생소원이란 것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 같지만, 혹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자기 인생이 행복의 절정에 도달할 것 같은 그런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평생소원이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어졌으면 하고 잠을 자면서도 꿈을 꿉니다.
하지만 정말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 주겠다는 그런 기회가 진짜로 온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정작 그런 일이 닥치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소원 한 가지를 정확하게 말해서 나중에 절대로 후회가 없을 소원 성취를 이룬다는 것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진 '세 가지 소원'이라는 동화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어느날 한 농부 부부에게 도깨비인지 꼬마 요정인지가 나타나서 딱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부부는 고민에 싸였습니다.
  
하여튼 뭔가 가장 중요한 소원들을 잘 골라서 다시 못 올 이 절호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해서 써먹어야 할 텐데, 그 세 가지 소원을 고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중에, 아내가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무의식중에 한다는 소리가 "아이구, 따끈한 소시지라도 하나 먹었으면"이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따끈따끈하게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시지 하나가 접시에 담겨 그 부부 앞에 달랑 떨어졌습니다.

물론 남편은 노발대발이었습니다.
그 귀중한 소원 셋 중에 하나를 그만 그 아내의 경솔한 한 마디 말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겨우 소시지 한 개 얻고서 그냥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남편은 "그 놈의 소시지, 당신 코에나 붙어 버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물론 그 소원도 당장 이루어졌습니다.
조금 전에 접시에 담겨 있던 소시지는 바로 아내의 코에 가서 길쭉하게 달라붙어 버린 것입니다.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세 번째 소원은 그 코에 붙은 소시지를 떼어 달라는 소원으로 써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평생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런 기회가 혹 생긴다 하더라도 그 소원을 바로 고르는 것 역시 결코 그리 쉽지 않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소원을 고르는 것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단 한 가지뿐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무슨 소원이든지 반드시 들어 주기는 하지만 딱 한 가지만 들어 준다는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소원을 생각해 내겠습니까?
물론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경우를 실제로 겪은 한 성경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평생소원 단 한 가지를 꼭 이루어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진짜로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금 전에 나왔던 동화 속의 부부와는 달리 그 귀중한 기회를 그냥 헛되이 날려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정말 가장 중요한 소원 한 가지를 정확하게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그 일생일대의 기회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결코 허황한 동화가 아닌 실화로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의 소원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구체적인 축복으로 성취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 제목이 될 때 하나님의 뜻과 맞추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1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2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을 명하고 3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 있음이라 4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쳤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위하여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5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의 지은 놋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6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기브온 산당에서 큰 특별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성막과 번제단은 기브온에 있었고 법궤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여기 "산당"이란 '높은 곳'이란 뜻인데, 아직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 언덕처럼 두드러진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던 제단을 뜻합니다.
즉 기브온 산당은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임시 예배처소로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바로 거기서 저 유명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요즘도 새벽기도를 일천 번 드린 것 등을 두고 '일천 번제'라고 부르는 교회나 교인들이 있는데 물론 꼭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불교의 '일천 배'나 '삼천 배' 따위의 용어를 연상시키는 그런 용어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솔로몬의 그 '일천 번제'는 기도나 제사를 천일 동안 드렸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솔로몬이 국정을 다 제쳐놓고 3년 이상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만 드리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물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가정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문의 정확한 문장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것을 '일천 일(日)의 번제'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개역성경에만 보아도 그 정확한 표현은 솔로몬이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일천 마리의 희생물로 번제를 드렸다'는 뜻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숫자는 솔로몬과 또 솔로몬과 함께 갔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함께 드렸던 번제물들을 다 합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솔로몬 혼자서 일천 마리의 짐승으로 번제를 드렸다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이 '일천 번제'가 '일천 일'이라는 날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주는 진짜 중요한 의미는 그런 날수를 세고 계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많은 제물을 정성껏 바치면서 그가 기도드렸던 이유에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자신의 사명과 책임에 대하여 많은 중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 다윗 시대에 부국강병으로 황금시대를 이루게 된 이스라엘이었으니, 그런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간다는 것은 그저 왕관 하나 머리에 얹게 되었다고 절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형제들 가운데 자기가 물려받게 된 왕위에 대한 책임감,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당연히 이런 생각들에 꽉 차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 간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해결을 받기 위한 것이었으며, 바로 그 간절함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런 '일천 번제'를 드리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섰을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드림으로써 그 길을 찾고 응답 받고자 하는 자세야말로 이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통하여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할 때가 있으며, 전혀 모르던 길에 발을 내디뎌야 할 때도 자주 생깁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걱정이 되고 두려우며, 때로는 막연하고 암담해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그런 상황도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때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의 통로를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고 장래에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미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면서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다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실 그처럼 자기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 신자는 응답을 받기도 전에, 아니 기도를 시작하면서 벌써 '일천 번제'의 감사예물부터 먼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신자와 불신자가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가는 방식에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불신자들도 어떤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신자와 같지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복권에 혹은 주식투자에 돈을 쏟아 부으면서 대박 성취의 꿈을 키웁니다.
혹은 자식 하나만 잘 키워 놓으면 여생에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거기에만 모든 것을 온통 투자하는 부모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소원을 가지게 되면 그처럼 헛된 꿈을 좇는 인생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그 소원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 제목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소원을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평생을 뜬구름 잡는 길로 가게 되지만, 신자는 바로 그 소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려 기도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 소원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며, 그저 개인적인 인생 목표 정도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 성취를 향한 차원 높은 방향이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의 기로나 위기 상황에서 어떤 간절한 소원이 생길 때 그 무엇보다도 일단 기도부터 드림으로써, 그 원하는 바와 목표가 곧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에 사용되는 실로 오묘한 기도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에 목적을 두게 될 때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7절 이하 10절에 "7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8솔로몬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 나로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9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로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을 삼으셨사오니 10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기브온에 와서 특별기도의 제단을 쌓고 있는 솔로몬의 심중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무슨 소원이든지 간에 딱 한 가지 소원은 네 마음대로 이루어 주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무슨 동화에 나오는 도깨비나 요정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시니, 솔로몬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꿈꾸는 그런 기회를 현실로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원은 단 한 가지만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라면 그것은 실로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일생일대의 기회이니 나중에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소원 하나를 구해야 할까 하고 매우 고민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고 하룻밤만이라도 제게 생각해 볼 시간을 좀 주십시오."라고 부탁할만한 장면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소원 한 가지가 이미 자신의 심령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기브온에 찾아와서 특별제사를 드린 것도 바로 그의 심중에 품은 그 한 가지 소원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왜 지혜를 구했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선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 다윗 왕을 통하여 크게 세우신 이스라엘이 더욱 강건하게 이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라고 말한 대로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이 그처럼 부국강병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음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처럼 이스라엘에 내려진 특별한 축복이 자기 대에 와서 끊기거나 약하여져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혜를 구하게 된 첫째 동기는 바로 부친의 대로부터 이스라엘에 내려진 은혜와 축복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그는 그 이스라엘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들 앞에서 "출입하게 하기 위하여"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출입이란 말은 '처신하다' 혹은 '공무(公務)를 보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왕이 된다는 것은 바로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할 공적 직무를 맡은 것임을 인식한 말입니다.
그는 일국의 왕이라는 정말 좋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 자리가 자기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주어진 복덩어리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되도록 바로 다스려야 할 중책의 공직인 것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 이 두 가지가 솔로몬이 다른 것들을 다 제쳐 놓고 오직 '지혜' 한 가지를 그의 유일한 소원으로 하나님께 아뢰게 되었던 동기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에는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즉 그의 소원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에서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친 대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더 잘 되게 하고자 하는 이 동기,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하겠다는 이 사명감이 그의 한 가지 소원을 오직 '지혜 주실 것을 구하는 것'으로 결정짓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딱 한 가지 소원을 마음대로 이루어 주겠다고 하시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소원을 드리게 될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어떤 소원을 드리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항상 심중에 품고 있는 단 한 가지 최대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꿈에라도 내 인생을 통하여 꼭 한번 이루어졌으면 하고 심중에 품고 있는 소원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평생소원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을 통하여 실제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언인지를 정확하게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권 당첨이 평생소원인 사람, 자녀의 명문대학교 입학이 최대의 소원인 사람, 죽기 전에 금강산 구경 한번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인생 최대의 소원인 사람 - 만약 신자들이란 사람이 이런 정도라면 정말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원은 그 명색이 신자라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귀히 여기고 무엇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무엇을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고 살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고 산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인생 가운데 구속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이 위대한 사실을 믿는다면, 정말 내게 주어진 생명과 건강과 가정과 직장이 하나님께서 내게 내려 주신 은혜와 축복의 터전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평생소원은 결코 그런 것들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소원이 꼭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는 것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이 놓여 있는 처지와 사명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소원을 가진다면, 우리가 딱 한 가지 소원, 가장 귀중한 평생소원 하나를 가진다면 그것은 적어도 솔로몬의 것과 같은 동기와 목적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야겠다는 바람,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을 위하여 내 인생이 바로 쓰여야 하겠다는 바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크고 힘 있게 충성해야겠다는 바람, 바로 이런 선한 욕심이 우리의 평생소원을 결정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신의 평생소원 한 가지를 찾고 작정하고 간구하며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인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목적을 세우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인생의 소원을 기도 제목으로 삼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에 그 기도 소원의 초점을 맞추었던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1절과 12절 말씀에 "11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12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곧 솔로몬에게 그가 구한 지혜뿐 아니라 부와 명예와 권세까지 극에 달하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으며 13절 이하 17절의 내용은 그 축복의 약속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성취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한 가지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어느 설문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취업과 대학입학'에 관한 것이 35퍼센트로 가장 높았고 나머지는 '사랑과 행복', '건강', '자기 개발 능력', '부자가 되는 것'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소원으로 가지기 마련이지만,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그는 자신의 평생소원 한 가지를 두고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이나 장수"를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솔로몬의 기도 제목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마음이 네게 있구나.'라는 칭찬을 받고 그 기뻐하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솔로몬은 그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무한정의 소원을 다 성취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 이 주님의 약속은 결코 빈말이나 공수표가 아닌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라는 말은 소위 온갖 '자수성가'나 '인간 승리'의 스토리에 흔히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 '꿈'이라는 것을 그저 꿈으로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막연한 '꿈'을 눈 깜짝할 사이에 현실로 '성취'시켜 주는 도깨비 방망이나 요정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제로 '성취'시켜 주실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당신의 자녀들의 모든 소원을 항상 듣고 계시며 그 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 기독신자들은 불신자들이 그저 동화 속에서나 꿈을 꾸고 있는 기적적인 축복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원을 헛된 꿈으로 남겨 두지 말고 날마다의 '기도 제목'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일확천금이나 꿈꾸는 환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고부동한 삶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의 기도 제목, 내 인생을 통하여 가장 간절히 구할 가장 큰 소원의 기도 제목을 바로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으로만 정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진짜 축복을 성취 받는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소원하며 이런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의 일생에 '이 모든 것까지 더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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