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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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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2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2)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3-8)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9-11)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2-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13:1-17)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은 전체가 21장입니다. 그 중 1장에서 12장까지는 탄생에서부터 33년 6개월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장 이후 19장까지는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까지 만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긴 설교가 몇 편 있습니다. 

첫째는 산상수훈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입니다. 
둘째는 감람산 설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으로 주로 종말적인 교훈입니다. 
셋째는 다락방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다락방 설교의 큰 주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13장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랑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에서 16장까지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격려입니다. 17장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 입니다. 

본문은 다락방 설교의 시작입니다.  
13장은 주님께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설교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2)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신 배경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날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한 주간 계속되는데, 주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발을 씻어주신 날은 목요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날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 날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에 마귀는 예수를 대적하려고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배신을 충동질 했습니다. 이때로부터 24시간이 못 되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11제자는 주님 곁에서 도망쳤고,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정말 위기의 때입니다. 이런 임박한 위기를 알지 못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높은지 싸우고 있었습니다. 못난 제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못난 제자들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실 것인가? 본문은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사랑할 가치가 별로 없는 못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믿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발을 씻기신 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洗足式입니다. 세족식을 하게 된 배경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자식들을 앞에 모아 놓았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떠난 후에도 자식들이 영원히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즉, 주님은 영생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족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누가 잘났느냐고 서로 다투는 가운데 행하신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2:24-27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떠나시기 전날까지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베드로가 잘났느냐, 요한이나 야고보가 잘났느냐? 화목한 자식들을 놔두고도 떠나기 힘든 판인데, 서로 누가 잘났느냐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교회공동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세족을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저는 오늘 이 사건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구원적 의미요, 둘째는 윤리적 의미입니다.


세족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족에 담긴 첫 번째 의미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먼지를 닦으심이 아닙니다. 영혼의 죄를 씻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를 내다보며 세족식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족을 도덕적인 교훈으로 받기 이전에, 먼저 속죄와 구원의 차원에서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세 차례의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 속에 세족에 담긴 구원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보세요. 마치 선문답(禪問答) 같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전혀 모르고 묻고 답합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의 세족 행동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일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해괴한 일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4-6) 

예수님은 세족 절차에 있어서 단 한 가지도 제자들의 도움을 받거나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일을 홀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욱 황송했습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당연히 황송한 일입니다. 그러나 속죄의 차원에서 본다면 납득이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 주셔야지 우리가 예수님의 죄를 씻기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 분인데! 

두 번째 이상한 점은 식후에 발을 씻기신 점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은 식전에 손발을 씻습니다. 식후에 씻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족은 단순한 식사 예절이 아니며, 위생적 차원의 행동이 아닙니다. 보다 높은 영적 차원의 일입니다. 인간 영혼을 씻는 일입니다. 죄인을 속죄하는 의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물로 씻는 것은 속죄 의식입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36:25)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레8:6)
  
예수께서 씻어 주심은 곧 발의 먼지를 씻음이 아니요, 우리 영혼의 죄를 씻어 주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가 알리가 있겠습니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발을 씻어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더럽혀진 영혼을 씻어야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씻기시기 원하십니다. 주님께 내 영혼을 맡기고 씻음 받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펄쩍 뛰면서 사양했습니다.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결코, 영원히) 씻지 못하십니다.”(8)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겸양을 받으시기는커녕 정 반대의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 너와 상관이 없다! 여기서 ‘나’라는 말과 ‘너’라는 말이 강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주님’(thou)이 ‘나’(my)를 씻길 수 없다고 했고, 예수님은 ‘내가’(I) ‘너를’(you) 씻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thou-my, I-thou 의 대조는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나는 너를 씻겨야만 한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누가 너를 씻기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죄를 씻어 주실 분이 혹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예수 외에는 전혀 없으니 꼭 내가 너를 씻겨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윤리적인 면에서 받기 전에 속죄적인 면에서 받아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족식에 담긴 구원의 말씀을 간과하고 윤리적 교훈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낮아져라, 겸손해라, 예수님 같이!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헌터(Hunter)는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만 십자가의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존경하고 그의 도덕적 가르침의 고상함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 없이는 자신들이 죄 속에 버림받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브룬너가 말했듯이 현대인에게 기독교 제1의 불명예(scandals)이며, 사도적 복음의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겸손은 얼른 보기에는 좋은 태도 같지만, 따지고 보면 교만입니다. 맥그리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을 볼 수 있을 만큼 겸손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주에게 명령할 만큼 교만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씻음 받는 것을 자기 맘대로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되는 문제로 알았습니다. 속죄는 누구나 사람이면 반드시 받아야만 되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과연 나중에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셋째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10)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의 발을 씻든지 말든지 그것은 관심이 없었지만, 우선 ‘너와 내가 상관이 없어진다’는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많든 적든 예수님과 헤어지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발 씻는 문제 때문에 예수와의 관계가 끊어진다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었습니다. “주여 발 씻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손도 씻어주시고 머리도 감아 주옵소서!”(9) 실로 극과 극을 달리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필요가 없느니라.”(10) 

유대 풍속에는 잔치에 가는 사람은 먼저 집에서 목욕을 하고 가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잔치 집에 도착하면 발만 씻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도 마찬가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른 이상 베드로는 죽는 날까지 일생의 죄악을 다 용서받았습니다. 목욕한 자와 같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서 지은 죄악들은 날마다 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발을 씻는 작업입니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목욕은 ‘칭의’라고 부르고, 발을 씻는 것은 ‘성화’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선언됩니다. ‘너는 의롭다!’ 하고 법적인 무죄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됩니다. 

그러나 인정받았다는 것 하고 실제의 모습하고는 별개입니다. 가령 우리가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합시다. 우리는 분명히 법적으로는 그 집의 자녀요, 상속권을 비롯해서 모든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그러나 입양되는 순간에 그 부모와 똑같아지지는 않습니다. 이전 성품이나 기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요. 그러므로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자식일지라도, 실제 성품은 하루하루 변화돼서 서서히 양부모(養父母)를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과거만의 죄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모습은 예수님처럼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토록 예수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聖化(sanctification)입니다. 

기독교는 목적의 종교이면서 과정의 종교입니다. ‘예수 천당’만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삶의 과정도 신앙입니다. ‘왜 사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생을 속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날마다 죄를 씻어가는 과정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목욕도 잘 하시고,날마다 예수님을 모방하면서 발을 씻어 가시고, 예수님 모습에 도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족은 사랑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 앞서서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끝까지 사랑하시는 방법이 바로 세족 사건입니다. 세족 행위는 영원한 사랑의 지침입니다. 세족에 담긴 사랑의 모습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낮아짐과 섬김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14) 

남을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과 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주와 선생으로 자인하셨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제자들은 ‘선생과 주’로 불렀고, 예수님은 ‘주와 선생’으로 불렀습니다. 말의 순서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의 주시요, 그 다음은 선생이십니다. 먼저 주종 관계요 그 다음은 사제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의 발을 씻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기고, 자녀가 부모의 발을 씻기고, 종이 상전의 발을 씻기는 것이 당시 사회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뒤집으셨습니다. 높은 자가 낮은 사람을 섬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상전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것도 옳게 보면 옳은 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려면 낮아짐의 변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형식적 낮아짐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겸손입니다. 마음과 외모가 함께 변신했습니다. 예수님처럼 해 보세요. 사장님이지만 사원의 모습이 되세요. 장군이지만 사병의 모습이 되세요. 스승이지만 제자의 모습이 되세요. 목자지만 양의 모습이 되세요. 구역장이지만 구역원이 되세요. 부모지만 자녀가 되시고, 남편이지만 아내가 되세요. 형이지만 아우가 되세요. 대통령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되세요. 섬기는 일에 지위나 체면 따지지 마세요. 진심으로 낮아지기 위해 안팎으로 변신해 보세요.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을 섬김으로 비참해진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랫사람에게 잘 해주다가 인생 망쳤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곧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낮아짐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로, 더러움을 씻어 주는 일입니다.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 

참 사랑은 남의 더러움을 씻어줍니다. 인체 중에서 발은 가장 천히 여겨집니다. 남 앞에서 얼굴을 자랑하고, 반가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지라도, 반갑다고 서로 양말 벗고 발을 내밀지는 않습니다. 발만은 감추는 게 예의입니다. 히브리 전통에 보면 발 씻는 일은 너무 천한 일이라 히브리 종에게는 시키지 않고 이방인 종에게만 시켰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 더러운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4-5) 

사랑은 남의 더러움을 들추어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씻어줍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면 흥분합니다. 옳다구나 기회로구나! 동네방네 들춰내고, 선전하고,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제발 들추어내는 사람 되지 마시고 씻어주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마르크스가 어떤 사람인지 레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종북 주의자들을 보면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의 어떤 집단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든지, 어떤 계층은 미워하고 투쟁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나병환자든지, 중풍병자든지, 간음하다 잡힌 여자든지, 부패한 세관원이든지, 살인강도든지, 유대인이든지 사마리아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나 받아 들이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제아무리 논리적이라 해도 환영할 수 없습니다. 세족에 담긴 사랑의 정신은 바로 남의 오점을 씻어 주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들추는 사람이 아니라 씻어 주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했습니다. 사랑의 방법을 아는 사람도 복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5) 

교회 역사를 보면 세족식을 교회 의식으로 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4세기 이후 수난주간 목요일에 교황이 친히 금대야에 물을 담아 신하들의 발을 씻겼고, 이 의식은 694년 톨레도 회의에서 교회 의식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까지 국왕이 빈민의 발을 씻기는 의식을 거행했고, 메노나이트나 연합 형제단에서도 이 의식을 정례화 한바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이러한 의식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해마다 그들은 극장식의 거창한 세족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이 공허하고 빈 의식을 행하고 나서는 마침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형제를 경멸한다. 더욱이 그들은 12사람의 발을 씻기고 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괴롭힘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아무튼 그리스도는 이 정례적인 의식에 참여치 않으신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형제들의 발을 씻길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Calvin)  
  
가장 먼저 실천해야 될 장소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최초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온갖 죄인이 모인 곳입니다.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그런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전과자, 범죄자, 양심 불량자, 살인 죄, 간음 죄, 도적질, 사기, 거짓말, 온갖 죄인들입니다. 

비록 예수님 믿고 용서는 받았어도 여전히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보세요. 교회마다 싸웁니다.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집사와 집사가 싸웁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행복한 교회, 축복된 교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유일의 방법이 바로 발을 씻겨 주는 일입니다. 서로 죄를 씻어 주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씻어 줘야 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주님의 세족은 모든 공동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세족은 교회가 건강해 지는 원리입니다. 세족은 가정이 건강해지는 원리입니다. 세족은 인간 사회의 공동체가 건강해 지는 원리입니다. 어디든지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이 원리가 시행되고 실천되는 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오늘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인간 사이의 문제도 세족의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이 원리를 세상 끝 날까지 실천에 옮기세요. 반드시 복된 삶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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