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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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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3-18)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평화를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평화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교장 선생님의 잔소리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가르침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평화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평화를 삶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세계 평화란 우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남북의 평화도 역시 우리가 직접 챙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의를 세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만으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평화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공허한 외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그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교회는 두 집단의 다툼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 두 집단이란 율법주의자들과 은혜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고 은혜주의자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들이었지만 율법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달랐습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율법과 할례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 은혜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때에는 별로 심각한 문제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은 개혁자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인 날입니다. 그 루터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은총과 더불어 신자의 업적도 필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교회와 루터 사이에 발생한 그 문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뜻이 맞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와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다툼은 초대 교회 안에서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아직 체계가 잡히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과 바나바도 2차 선교 여행 때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그런 다툼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실상이었고 또 지금도 변함없는 교회의 실상이기 때문에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율법 준수를 거부하는 은혜주의자들의 위험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 은혜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 행위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완고한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복음의 비밀을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극단적인 은혜주의자들 때문에 교회가 무너질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평화를 해치는 일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야고보는 경고했습니다. 그가 볼 때에 교회의 평화를 해치는 자들은 자칭 선생들이라는 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약 3:13 상반절) 그들은 말은 참 잘 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에서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많은 말들이 교회를 파괴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뭔가 아는 것처럼 나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반대 의견을 말하면 아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반대 의견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격렬한 논쟁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그 주장이 정욕에 따른 것일 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욕은 진리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분쟁 자체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그런 생각, 즉 땅의 지혜와 대비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소개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약 3:17 참조) 그는 여기서 일곱 가지 항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교회의 일꾼들의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땅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들입니다. 그는 그 중에서 두 번째 항목인 화평을 다시금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그렇다면 화평으로 심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만 있으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분쟁이 없는 것이 곧 평화는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세상과의 불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언제 평화를 맺고 언제 투쟁해야 할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겉으로 친하게 지내고 큰 다툼 없이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평화의 씨앗을 심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구현할만한 능력은 없지만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어느 한쪽을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평화를 선택할 것입니까? 땅에 속한 정욕으로 싸움과 다툼을 선택할 것입니까? 야고보가 염려하는 것은 후자를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정욕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자칭 선생이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신자들을 다투게 했습니다. 교회 안에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서로 적개심을 불태우게 만든 것이 바로 땅에 속한 정욕에 사로잡힌 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민족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경제 민주화도 좋고 동반 성장도 좋습니다. 독도를 지키는 것도 좋습니다. 종군 위안부들에게 일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참 평화가 이 땅에 정착하는 것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깃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학교, 그리고 일터에서 참 평화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남과 북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평화 없는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그것이 참 지혜라는 사실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지시하는 것을 보면 가장 아름다운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분명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부지런히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마침내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둠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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