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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 되신 하나님 (요 8: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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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되신 하나님 (요 8:39-47)


미국 프린스턴대 설교학 교수인 블랙우드는 그리스도인이 남겨야 할 세 가지 유산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쁜 기억의 유산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정에서 좋은 기억을 가지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기억이 있으면 죄악 가운데서도 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들의 주일성수 모습,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어른 존중하는 모습, 남을 돕는 모습 등은 아이들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두 번째는 좋은 습관의 유산입니다. 
아이들의 생일날 음식점에서 낭비하는 모습보다 아이들과 함께 보육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추억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높은 생의 목표의 유산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지만 돈을 위해 산다”는 등의 기억을 남겨주는 것은 불행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고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유산입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이 말은 자기 충족적 예언 즉,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주위의 예언이나 기대가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면 교사가 어떤 학생을 ‘우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가르치면 그 학생은 다른 학생보다 우수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가정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얼마 전 서울대 학생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습효율을 높이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모의 신뢰가 자녀의 성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대상의 절반이 넘는 70명(58%)이 ‘부모의 신뢰’를 주요인으로 꼽아 ‘부모의 긍정적인 기대’가 자녀의 학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학생들은 부모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자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해 공부하도록 했고 수십 권의 책 목록을 내밀었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두 구입해주었을 때 부모가 자신을 믿고 격려해준다고 느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부모가 자녀의 생각을 이해해주고 자녀의 능력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기대를 할 때 학습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부모와 자녀 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가슴속에 능력을 강화시키는 불씨가 강하게 타오른다고 말합니다. 이때 부모의 말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야, 참 잘한다.” “대단한데, 수고했다. 네가 최고다.” “넌 소중한 존재다.” 이런 말은 긍정적인 자아상 형성에 도움이 됩니다. 잔소리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칭찬과 격려는 잠재력을 일깨우고 한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1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청소년 시절에 부랑자였습니다. 아버지의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일삼고 친구와 어울려 유흥업소와 경찰서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렸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잡게 해 기독교사에 빛나는 성자로 만든 것은 한 마디 말이었습니다. 
“조지,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낙심하지 말고 노력하면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동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 말이 마음을 지배했고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선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란 뜻의 시몬이란 이름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소유자였으나 이후 반석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됐습니다. 칭찬에는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결국 부모가 보여주는 자녀들의 꿈과 힘과 능력에 대한 진심어린 칭찬과 격려는 장차 그들이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마음의 힘입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자녀들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 자녀들이 홀로서기에 필요한 능력과 자신감을 발전시켜 나가는 동안 그들을 지원하고 돕는 것이 부모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자녀가 모두 이렇듯 지혜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정치적으로 좌파네 우파네 아니면 중도파네 하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결국 소속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방식에 따라 이기주의 또는 이타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이는 삶의 방식에 따른 구분입니다. 하지만 같은 단테에 소속이 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의 생각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더욱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는 판단하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드러나는 모습만 가지고 판단했다가는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붙잡혀가서 밤새 심문을 받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예수를 심문합니다. 그런데 공회원 가운데 그러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함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 동조를 합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들 가운데 참 믿음의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모두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그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을 하여 허락을 얻어냅니다. 또한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 왔었던 니고데모가 장례에 쓸 물품들을 가지고 함께 돕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날이 샐 때 공회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자기들도 예수처럼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가 버린 시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용기를 내게 만들었을까요? 아니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공회원들 가운데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이 있었겠다 싶은 마음도 듭니다. 어쨌든 그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죽음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그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비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지라도 예수야 말로 참 메시야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더 이상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또 누구보다도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참되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던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믿음이고 무엇이 진짜 믿음의 좋은 것입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은 것 같아도 아무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도 그런 자신의 삶과 비교해서 부족한 사람들은 판단하고 비판하는데 시간을 쓰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주님이 칭찬하실 수 있겠습니까? 
요일 4:6~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한 요일 3:14~18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습니다.
무리들이 이르기를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기를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히 11장은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거니와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자기들에게 말한 사람인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대적한 자가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함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의롭다고 자부하고 누구보다도 바르게 살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인정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실상은 오히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예수를 대적하여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는 너의 아비가 행하는 일을 하는도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시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마귀에게 속한 자의 대표적인 모습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곧 주주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들을 귀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되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따르지를 않습니다. 뭘 알아야 따를 것이 아닙니까?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데 어떻게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알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고 하는 믿음으로 따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음식도 단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신 것도 있고 짠 것도 있습니다. 떫은 것도 있습니다. 맛은 아니지만 맛처럼 느끼는 고통 매운 맛이 있습니다. 말씀도 꿀과 같이 단 것도 있지만 때로는 쓰디쓴 약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구는 아멘으로 받는데 누구는 나를 친다고 말합니다. 나를 친다고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은 곧 그 부분이 내가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어깨든 팔 다리를 주물러보면 건강하면 아무리 주물러도 별 이상이 없습니다. 그저 시원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한데 이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하지만 아프기에 더 그 부분을 마사지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풀립니다. 그런데 아프다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 어떻습니까?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큰 병이 되곤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말씀에 흥미가 없다면 그래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씀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지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거나 악한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빨리 회개하고 믿음으로 들어와야 하고 속고 있다면 돌이켜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은혜 아래서는 아니오가 없습니다. 오직 예하고 아멘 할 것입니다. 은혜는 살리는 것이요 죽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를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저와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밉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그건 내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렇다면 내 생각과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죽이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비난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주 무안할 정도로 몰아쳐 한쪽 구석으로 처박는 사람입니까? 

둘째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비탄에 잠겼습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아들을 단 5분만 만나보게 해주세요. 단 5분만…”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아들을 5분 동안만 만나게 해드리죠. 아들의 언제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 어머니의 품에서 재롱 피우던 모습인가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인가요.” 
어머니는 한참 생각한 뒤 천사에게 말했다.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제게 용서를 빌던 모습입니다. 눈물 흘리던 그 모습이 제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주면서도 더 못해준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어머니는 지우개가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지워주고 싶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듭니다. “우리는 음행을 통하여 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니라” 아니 뭔 얘기를 그렇게 섭섭하게 한단 말입니까?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하며 비판하는 마음은 이윽고 미움으로 번져 나가 미워하며 외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즉 우리를 살인자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다면 너희는 나를 사랑하였으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주를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 15:9~12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이 참 사랑을 실천한 자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활동을 마무리 짓고 이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흔히 가는 요단강 건너편 길이나 지중해 해안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선발대를 구성해 가지고 “너희들이 먼저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서 우리가 하룻밤 묵을 집을 알선해 보거라. 지금 우리는 제자들이 12명이고 따르는 무리들도 있는데 잘 집도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고 그리고 간 김에 내가 좀 강론도 할 수 있는 장소도 알아보고 그리고 병자들도 좀 고칠 수 있는지 좀 알아보고 오너라” 해서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똑똑하고 잘난 척을 많이 했던 제자 세 명이 있었습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누굽니까?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었습니다. 선발대가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도저히 우리 일행에게 집을 못 내 주겠다고 합니다. 돈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당신네들은 이스라엘 정통 혈족들이고 우리는 이방인과 피가 섞여졌다고 해서 당신네들이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정 급하면 돌아가세요 왜 꼭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려고 그래요. 하면서 통과도 안 되고 집도 못 줍니다. 거부를 했습니다. 이때 이런 말을 들었던 요한이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 괘심한 것들 하나님의 아들을 못 알아봐? 죽은 자라도 살리는 이를 못 알아봐? 그래서 예수님께 감히 나가서 진언을 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불을 명해서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주님 원하십니까? 불태워 가지고 몰살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요한은 이렇듯 불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다혈질이었습니다. 요한은 분노를 쉽게 터뜨리는 자였습니다. 요한은 끊임없이 실수하는 자였습니다. 어느 날은 자기 어머니를 시켜 주의 나라의 가장 귀한 두 자리를 욕심내다가 제자들과 함께 대판 싸움을 하기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저가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깨닫게 되는 데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탁하신 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며 섬기는 가운데 참 사랑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섬김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섬기는 자에게 참된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저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곧 섬김을 통한 사랑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겸손으로 낮은 곳에 처하며 지극히 작은 자, 소위 별 볼일 없는 자라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더욱 진실된 마음으로 섬기며 격려하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요한의 받은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에 대하여 힐책하겠느냐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니라 이는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되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되신 주님을 믿는 증거는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작은 섬김으로부터 시작하여 참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 아쿠오는 청취하다, 귀담아 듣다, 순종하다 그런 뜻을 자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하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내가 그것을 실천하겠다 결심하고 듣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집 밖으로 나와 정원 앞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노인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말했습니다.
“저희 집에 들어오시지요.”
그 노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함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죠?”
“내 이름은 부(富)이고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또 다른 친ㅌ구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셔서 우리 셋 중에 누가 당신의 집에 거하기를 원하는 지를 생각해 보세요.”
부인은 집에 들어가 그 말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은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우리 부(富)를 초대해서 우리 집을 부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은 “여보! 왜 성공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조용했던 가정이 금방 싸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며느리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잖아요.”
“우리 며느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랑을 우리의 손님으로 맞아들입시다.”
부인이 밖으로 나가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드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두 사람 부와 성공도 일어나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서 그 부인이 부와 성공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단지 사랑만을 초대했는데요. 두 분은 왜 따라 들어오시죠?”
두 노인이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부 또는 성공을 초대했다면 우리 중 다른 두 사람은 밖에 그냥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초대했고 사랑이 가는 어느 곳에나 우리 부와 성공을 그 사랑을 따르지요.”
사랑이 있는 곳 어디에도 또한 부와 성공이 있지요. 사랑 없는 부와 성공은 늘 외롭고 슬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요일 4:16은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섬김과 격려를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세워나가는 참 사랑의 실천자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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