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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보았는가? - 예배자의 모습 (계 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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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았는가? - 예배자의 모습 (계 5:9-14)
  

청년교회의 청년들이 5분간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에 대해서 말을 걸어왔다. 진정한 예배자! 나는 그 대답을 신학적으로 계시에 노출된 자의 반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 이 말은 계시에 노출되지 않으면 반응할 수 없고 계시에 노출이 된 자는 예배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예배자는 누구나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대면한 자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사43:2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사43:7) 예배하도록 지어졌는데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생에게 예배자가 되도록 계시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죄인을 구원하러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이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우리는 예배하는 무리들을 보게 된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천상의 예배 광경을 보았다면 요한계시록 5장은 예배자의 모습, 예배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어떻게, 무엇으로 예배하는가?

1. 새 노래로 예배한다. (계5:9~10)

계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새 노래를 부르는 그들은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설명할 때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은 하나님이 빚으신 영적 존재들의 대표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적 천사들의 상징이었다. 또 이십 사 장로들은 구원 받은 존재들의 대표였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흰옷 입은 사람들,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노래가 사용된다. 사실 예배하는 자는 노래없이 예배할 수 없다. 찬송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새 노래란 ‘New Song’이 아니고 노래를 부르는 자의 새 마음에서 나오는 새 노래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노래도 새롭고 예배도 예배답게 살아난다. 그러니까 예배자는 새 마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새 마음을 갖게 되는가? 예수를 바로 알면 된다. 완전 계시이신 예수를 만나면 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두루마리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다.(계5:9) 계5:1~5을 보면 천상에서 두루마리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도 없다. 요한은 이 그림을 보면서 아무도 펴지도 못하고 아무도 인봉을 뗄 수도 없음에 대해 울었다. 그런데 어린 양으로 묘사된 예수님이 계5:5을 보면 인을 떼는 자격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을 떼는 것은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는 것이요, 인을 떼는 것은 환난이 시작되는 것이요, 인을 떼는 것은 종말과 심판을 통해 천년 왕국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진행자, 예언의 성취자, 계시의 완성자, 심판의 권세자가 예수라는 것이다. 이 예수가 끝날의 Key를 쥐고 있음을 알면 새 노래로 부른 이유가 충분하다. 찬송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예수는 나를 구원만 할 것이 아니고 종말의 진행자다. 예수는 만민을 피로 사서 왕노릇하도록 삼으신 이시다.(계5:10)

예수님은 놀라우시다. 우리를 이 땅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피를 흘려 피로서 죽을 죄인들을 사셨다. 핏값을 치르고 모든 열방 가운데서 사람을 속량하사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하여 죽을 죄인이 살아나고 죽을 사람이 축복을 나누어주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결국 이 땅에서 왕노릇하도록 하셨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살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구원을 받은 것에서 사명자가 되게 하시고 결국 왕노릇하여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까? 어찌 새 노래로 찬양하지 않을까?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이것을 알고 이것을 누리고 있기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다. 거문고와 금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를 부르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예배의 참 모습은 새 노래에 있다. 그리고 계5:8에 기록된 거문고는 무엇인가? 시147:7를 보면 감사의 찬송을 할 때 사용하는 악기이다. 그렇다면 금대접은 무엇인가? 롬14:23에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받는 그릇이다.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자가 감사가 담긴 예배와 믿음의 기도가 바쳐지도록 해야 함을 배운다. 새 노래와 함께 감사와 기도는 예배자가 지닐 도구들이다.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라. ① 천상에서처럼 새 노래의 찬송을 부르는가? ② 기쁨의 감사가 드려지는가? ③ 믿음의 기도가 올라가는가?

2. 누구나 예배한다. (계5:11)

계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만만이요 천천이란 헤아릴 수 없는 천사의 수다. 억이 되고 또 억이 백 만개가 되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예배한다.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수억의 천사 모두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영광을 돌린다. 예배에 제외자가 없다. 구원 받은 사람의 수도 셀 수 없다. 계7:9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외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역시 예배에 제외자가 없다. 

이 장엄한 모습을 상상해보라. 10,000명의 합창단의 찬양, Expolo 대회에서 울려퍼진 1,000명의 찬양도 장엄하고 감동적인데 모든 천상의 가족들이 예배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예배란 누구나 예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 예배를 빠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삶의 살아가는 목적이 예배인데 이것을 모르고 육체의 욕구와 정욕을 채우려고 하면서 예배를 피하는 삶이란 영적으로 저주의 삶이다. 

예배를 모르는 삶은 시간 안비의 인생이다. 예배가 삶을 꽃피우게 한다. 예배가 평화와 감동과 쉼을 공급해준다. 예배가 인생을 바꾸고 운명을 바꾼다.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배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예배하므로 인생이 기름지게 되는 복을 얻는다. 예배자여, 하나님을 만나라. 어서 그 계시를 대면하여 예배자로 돌아서라.

3. 피조물도 예배한다. (계5:13)

계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상의 피조물이 아니라 천상 아래의 모든 피조물까지 예배한다. 구속의 날을 기다리는 피조물까지 나무와 새, 곤충과 기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광과 권능을 돌려드리며 예배한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미물의 짐승도, 아침 저녁으로 우짖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그들의 깃을 들이는 나무 잎새까지도 예배 드리는 소리가 들려진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 장면을 바로 깨닫는다면 예배에 앞장서야 한다. 피조물도 예배하는데 예배의 깊이와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 신성을 모르는 자처럼 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짐승도 예배한다. 헤엄치는 고기도 예배한다면 예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얼마나 영적 안테나가 부러진 인생인가? 예배자가 되어야 참 인생의 본분을 사는 것이다. (전12:13) 피조물도 예배함에 도전을 받으라.

4. 완전한 하모니로서 예배한다. (계5:14)

계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상의 예배의 장면은 완전한 하모니이다. 예배의 장면을 설명할 때 계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계5:13 “내가 또 들으니”, 계5:13下~14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이처럼 천상의 예배는 따로 따로의 예배가 아니다. “ 으며, 들으니, 돌리지어다”로 이어져가고 있다. 예배의 하모니가 보인다. 이 하모니 안에는 물 흐르듯 이어져가는 예배의 연속성이 있다. 예배의 참여자 모두의 통일성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피조물의 노래에 네 생물이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니 화답의 코러스가 있다. 예배는 아멘이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엎드리는 겸손의 태도가 하나님의 높여드리게 된다. 아멘 연습을 잘하고 아멘에 풍년이 들자. 세상에는 엎드리지 않으나 하나님 전에는 무조건 허리를 굽히자. 

오늘 본문 가운데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오직 예배의 대상은 죽임 당하는 어린 양이다. 그 예배 속에 감사, 기도, 찬송으로 가치를 돌려드림이 담겨 있다. 아멘과 경배로 가치를 돌려드림이 담겨 있다. 예배는 누가 먼저 노래를 시작하든지 간에 예배자에겐 그의 삶에서 높고 높은 신분이 문제 되지 않는다. 천사들이든, 구원받은 성도이든, 피조물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예배 받으실 만한 그분에게 예배를 통해 모든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만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지 신분, 계급의 유무를 찾지 않으신다. 

예배의 장면을 넘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요한계시록 5장, 교회는 이 요한계시록 4~5장을 통해 잘못된 예배를 확 바꿔야 한다. 형식에 빠져 생명과 감동 없이 죽어가는 예배를 살려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가 죽으셨다는 십자가의 보혈의 계시를 만난 자는 태도가 달라진다. 즉 제일 먼저 예배의 태도가 생긴다. 이제 그 계시 앞에서 반응하는 크리스챤은 절대로 예배에 침묵하는 크리스챤이 될 수 없다.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새 노래를 부르는 멋진 예배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내 옆에 어떤 분이 있든지 높고 낮음, 인종과 혈통 등이 상관 없이 하모니를 이루는 예배, 주님을 지존으로 높이는 최고의 예배는 하늘에 올라가서도 계속되는 참된 예배의 모습이다. 매 주일 이런 예배를 만들어내도록 준비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나와 주님을 높이는 예배의 주인공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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