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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강 건너 (수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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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건너 (수 3:3-6)

변화는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은 일년 중에 가장 강물이 불어난 시기입니다. 추수를 계절인 봄에 북쪽에 헐몬산에 있는 눈이 녹아서 요단강의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려운 시간을 약속의 시간으로 선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3단계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인생을 위한 지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광야생활, 가나안 점령이라는 3단계의 역사를 거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지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삶을 훈련합니다. 40년의 준비 과정 후에 그들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구원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죄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에서 탈출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넘어서 우리를 훈련시키심으로써 제자로 만드십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곧바로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 그들은 7족속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입니다. 영광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준비하고, 이 과정을 거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인생의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습니까? 영화의 자리까지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감격만으로 살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을 거쳐야 하고, 온갖 유혹과 도전에 맞서서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광야 생활이 힘들지만 그래도 광야에는 적군은 없습니다. 광야 생활은 육체적 고생스러움이 있지만 치열한 전쟁은 없습니다. 광야의 삶이 힘들까요. 
아니면 요단강 건너의 삶이 힘들까요? 육체적으로는 광야가 힘들지만, 오히려 더 큰 위험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 큰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적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적군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경험하는 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전쟁 중의 평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감당해야 할까요? 여호수아는 다음 세대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말씀의 지도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에는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도 이기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진입은 당시 7족속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서 보낸 두 정탐꾼의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묶고 있던 두 정탐꾼은 라합에게 자신들을 숨겨줄 것을 부탁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라합은 여관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한 위대한 민족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의 바로의 통치를 벗어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는 사람들의 간담을 녹였습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수2:11) 
  
하나님의 말씀은 간담을 녹이는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2천 규빗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규빗은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 중간의 관절까지의 길이입니다. 사람의 한 보폭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거리는 약 2천 보 정도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거리가 유지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도 가나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지형을 따라서 움직이며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들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도착할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땅입니다. 해수면보다 훨씬 낮은 땅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관리를 해 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우리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안내해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여호수아 3-4장에만 언약궤라는 말이 1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에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말씀만 따라가면 약속의 땅에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도착이 늦더라도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관리가 속도관리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좁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멀리 내다보면서 인생을 사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면서, 즉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비게이션 인생이라고 할까요? 작은 컴퓨터 화면과 그것보다 더 작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아마 신앙 생활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을 안내하는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천 보 정도 떨어져서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내자가 되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씀만 따라가면 길 잃어버릴 염려 없습니다. 

  
성결의 삶
  
하지만 지도와 지형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언약궤 자체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간혹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종종 언약궤 안에 있는 말씀이 아닌 언약궤 자체를 의지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약궤를 가지고도 전쟁에서 패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는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싸운 이스라엘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언약궤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블레셋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했고,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반면에 1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궤는 빠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언약궤는 전쟁의 모든 승리를 확증하지는 않습니다. 언약궤 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말씀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언약궤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약궤 안에 있는 말씀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점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sanctifiy).”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전투 태세를 갖추라는 주문이 아닌, 성결함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성결함이란 “분리됨set apart”을 뜻합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과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상숭배가 가득한 땅에서 분리된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이 점을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여호수아 7장을 보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빼앗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앞세우고, 끊임없이 성결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지금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혹시 구원의 감격에 빠져 있으면서 성화의 단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투 준비도 하지 않은 체 마치 이미 가나안 땅에 입성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데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율법을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일곱 족속과의 전쟁은 우리가 해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성결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우리는 요단강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지금 사람들의 간담을 떨리게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에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어버리나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만홀히 여김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았나요? 지금은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제대로 살펴야 하는 시기입니다. 말씀에서 2천 보 떨어져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옷을 입고 일곱 족속이 살고 있는 요단강 저편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발 밑의 요단강을 바라보지 마시고 여러분보다 2천 보 앞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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