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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박한 초등학문에 다시 종 노릇 하려느냐? (갈 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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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초등학문에 다시 종 노릇 하려느냐? (갈 4:8-1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성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이다. 이 말은 반드시 어디엔가 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즉,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모든 사람은 종노릇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디엔가 지배를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가장 일반적인 우리의 종노릇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일단 어떤 비참한 종의 상태에서건 빠져 나오고 나면 그 곳에 있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개구리 올챙이시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모든 사람이 종노릇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면서 종노릇 한다는 것이고(너는 종노릇 하고 있다.x) 종의 운명은 그를 부리는 주인의 운명과 같다는 사실도 모르고 막연히 이끌려 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한 평생을 끝낸다는 것이다. 

사실 이 명절은 각자의 정체성을 찾는 때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참된 존재감이나 본질을 찾아보는 것이 비단 육신에 국한된 것보다는 영원 속에서도 중요함을 의식할 수 있었으면 하고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자 한다. 

세상의 상대적인 존재에서 절대적인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시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람만 못한 짐승 이하의 삶을 산다면 우리를 자신의 생명의 피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주님께 배은망덕이 될 것이다. 

특히 여기의 초등학문[헬, stoicheion, (배열에 있어서 순서적인 것으로) 원리, 기초]은 가장 하위 계층을 의미하기 때문에 최상의 절대적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윤리나 도덕은 물론이고 삶의 수준이 낮은 모습이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사실 최상의 것을 경험하고 최하의 것을 선택하려는 자세는 기계를 사용해 보는 데서도 있을 수 없는 모습인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모습임에도 정신 세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일반 사람들보다 못한 삶의 모습은 하나님보시기에 안타까우실 수 밖에 없고 여기에 대한 탄식을 하고 계신 말씀이 오늘 내용이다. 


Ⅰ. 과거에는 거짓된 것들에 종 노릇 하였다.(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과거에 죄의 종노릇 한 것은 하나님의 바른 의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를 주시면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라고 철학의 중심지였던 아덴에서 선포하였다. 

죄인 된 사람들은 과거뿐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도 오로지 염려의 대상일 뿐이다. 먹고 살 염려, 죽음에 대한 염려 그러나 과거의 어두움에서 자유 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염려이고 특히 내일을 염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의 삶을 함께 누리는 사람은 내일은 더 이상 염려의 대상이 아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또 [무엇으로부터 자유 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여기서 자유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직장과 가정에서 자유 하고자 하지만 그것들에서 뛰쳐나오면 노숙인 밖에 될 것이 없는 것이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눅11:24~25) 

주님을 알기 전의 삶은 거짓 것들에게 종노릇 했고 명절에도 거짓 것에 경배했던 이유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 자체가 거짓 것에 종노릇 하는 이유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 자체가 엄청난 복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어떤 대상을 섬기고 위한다면 그것은 안타깝지만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바울 사도의 경계를 들을 필요가 있다. 


Ⅱ. 이제는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사람이 있을까 만은 바울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셨다.” 라고 일깨워 준다. 이것은 이제 진노와 형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교제와 복 주심의 대상으로 아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강조하기를 “더욱이” 라고 덧붙인다. 우리가 늘 “나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사람이다!” 라는 의식을 하고 살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섬김과 지배의 대상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갖는 경계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죄로부터 사죄 받았다고 하는 자유만 있고 목표가 없다면 오히려 죄를 모두 용서 받았기 때문에 더 방탕할 수 있다는 데서 의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께서 사죄를 선언하시고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신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하게 일깨워 주신 것도 사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었다. 

우리 모두가 다 값없이 사죄를 받았지만 그 죄가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용서 됐다는 사실을 알아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힘겨우신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의 허황된 것에 끌려 다닌 것을 생각해보면 천국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보호로 의의 길을 가는 우리들 빛의 종으로서의 삶에 소홀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기를 … 


Ⅲ.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면 안 된다.(10~11)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계율에서도 자유 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복음은 가치가 없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희생한 모든 이들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 되게 한 십자가야말로 우리가 수시로 확인해야 할 우리의 가치의 변화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확인할 수 있는 출발선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5)고 했고 바울 사도는 다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고 우리를 격려한다.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으로 광야를 살았던 이스라엘 일부의 사람들 중에 과거 애굽의 종살이가 더 좋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고 불평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복음을 훼손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과거 애굽에서는 비록 종노릇 했지만 이보다는 낳았다”는 식이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6) 

부림을 받는 종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좋았었노라고 울며 탄식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다. 개돼지처럼 먹는 것에만 껄떡거린다면 사람됨의 가치를 잃어 버리는 그야 말로 동물과 다름이 없다. 

우리에게 어느 날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날이 없는 이유는 저주와 절망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것을 먹고 못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건강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랑하심이 우리의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유로 고백되고 교제하는 거룩한 삶이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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