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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누구입니까? (요 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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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누구입니까? (요 13:21-30)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고난주간 마지막 목요일. 지상 생애 마지막 저녁. 그 중요한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 중요한 자리에서 주님이 계속 언급하신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18)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19)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18-21) 

이 말씀을 이런 뜻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안다. 그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다. 내가 미리 말하는 것은 이런 배신행위가 일어났을 때에 내가 메시아임을 너희가 깨달으라는 뜻이다. 정말 마음 아픈 일이지만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 대놓고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미리 배신행위가 있을 것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 가룟 유다 얘기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누구인가? 그의 됨됨이, 생각, 행동 양식. 가룟 유다를 연구하자는 뜻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적인 모습을 깨닫자는 뜻입니다.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만남의 초기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가룟 유다를 어떻게 품고 가셨는지, 어떻게 대하셨는지? 오늘 이 세상은 가룟 유다들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해답이 오늘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주여 배반자가 누구입니까?

첫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고, 주님은 그 사실을 덮어두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하니까 제자들은 소동(騷動)합니다. 성미 급한 베드로는 궁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밥상머리에서 누구냐고 소리쳐 묻기도 그렇고,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면서 빨리 주님께 여쭤보라고 성화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23-24) 대표로 요한이 주님께 묻습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25) 

이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열두 명 중에 누가 범인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중에 배반자가 있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냐, 알면 요절을 내겠다.”는 얘깁니다. 

둘째로, ‘혹시 내가 배반자는 아닌가?’ 하는 걱정스런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강한 것 같아도 사실은 약한 법입니다. 예수를 배반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혹시 압니까? 누가 와서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위협하면 부인하게 될는지? 사실 베드로도 죽는 게 두려워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심각하게 묻습니다. “주여 내니이까?”(마26:22)
  
제자들의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범인을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범인이냐?’는데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누가 범인인지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공개 원칙입니다. 가룟 유다가 돌아서서 나가는 순간까지 배반자가 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하시면서도 그것이 가룟 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 하시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의미를 공개치 않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유다가 범인임을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유다 자신의 유익입니다. 우선 유다는 예수님의 비공개 원칙 덕분에 안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배반자라는 사실이 일찍 공개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그는 공개 테러를 당했을 겁니다. 겟세마네에서 말고가 주님을 체포하려 할 때에 베드로는 주머니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유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알고 우뢰의 아들 요한이 알았더라면 귀가 문젭니까? 아마 심장이라도 찔렀을 겁니다. 주님이 감춰주신 덕분에 살았지요. 또한 그 덕분에 유다는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고, 긴 시간 주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일찍 공개됐다면 그는 일찍 사도의 무리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배반자를 끝까지 드러내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인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제자들의 유익입니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제자들은 각자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배반자적 기질이 없는가?’ 심각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범인을 모른 덕분에 12명이 그런대로 화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반자, 혹은 범죄자를 드러내는 문제에 대해서 신중해야 합니다. 드러내는 것이 다수에게, 혹은 누구에게 유익한 일인지?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지만, 혹시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바른 사람이 된다면? 당사자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한 일인지?  그래서 주님은 우선 범죄자를 드러내지 않고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 

범죄 한 형제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는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동네방네 선전부터 하고 봅니다. 

오늘날 매스컴은 시시콜콜 범죄 행위를 들춰내는 데 열을 올립니다. 보고 듣는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당사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상관치 않습니다. 그저 범죄를 흥미 위주로 다룹니다. 범죄 행위를 보는 순간 어른들 마음에는 걱정거리 생기고, 청소년은 범죄를 모방하고, 범죄자는 회개의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의 가라지를 뽑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놔두십니다. 신앙의 가라지, 인격의 가라지, 조직체의 가라지를 왜 놔두시겠습니까? 가라지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자는 뜻이요, 알곡에게는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자는 말입니다. 또한 가라지를 뽑아냄으로써 오는 공동체의 손상을 막자는 것입니다.  
  
누가 배신자냐고 묻지 마세요. 먼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먼저 배신자를 은밀하게 대하는 비법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주는 자가 그니라

두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선대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은 배반자라고 푸대접하거나 학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아주 감추신 것은 아닙니다. 결국 주님은 배신자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필경은 드러날 것이고, 제자들도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26) 

G. B. Eager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식사 때에 U자형 테이블 둘레에 모로 눕습니다. 아주 드러눕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모으고 다리를 반쯤 오므리고 모로 기댄 형태입니다. 대개 왼편으로 기대고 오른손으로 먹습니다. 식탁의 서열은 U자의 왼쪽 끝에 주빈이 앉고, 반시계 방향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 이 서열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두머리를 중심에 하고 좌우로 제2, 제3의 서열이 매겨진다고 합니다. 이 방식대로 한다면, 사도 요한이 주님의 가슴 쪽에 자리하고, 베드로는 그 다음, 가룟 유다는 주님의 다른 한편에 자리 잡았을 겁니다. 가룟 유다는 이 마지막 식탁에서도 상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께로부터 음식을 친히 떼어 주시는 친절을 받았습니다. 식탁에서 음식을 떼어 주는 행동은 친밀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예수께서 배신자 유다에게 친절을 베푸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평소 미운 사람 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반감을 품은 사람은 절대로 용납지 않습니다. 수첩에 새겨 놓고 두고두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의 소행이나 성품을 아셨습니다. 스승을 팔아먹으려는 마음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과 차별 없이 대하셨습니다. 그에게 같은 권능을 주셔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게 하셨습니다.(마10:1) 돈을 훔쳐가는 것을 아시면서도 돈궤를 맡기셨습니다.(12:6) 배신할 마음을 보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13:12) 그리고 이제는 먹여 주기까지 하십니다.(26)  
  
배반자에게 호의를 베푸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를 깨닫게 하자는 뜻입니다. 주님은 유다가 배반자라는 사실을 타인들에게는 숨기셨습니다. 범죄자를 감춘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범인 은닉죄만 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유다 자신에게까지 눈감아 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유다 자신에게는 안팎으로 많은 자극을 줬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 채찍과 당근을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배반에 대해서 경고를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친절과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유다에게는 채찍보다 오히려 당근이 더 많이 주어졌습니다. 배신자를 선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양심을 자극하고, 회개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은 유다를 정죄하고 심판하시지 않고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내 곁에 배신자가 있습니까? 주님의 방법을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세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향한 최후통첩입니다. 범죄자를 마냥 덮어주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끝나면 결국 죄는 처벌받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주면서 당사자인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무슨 일을 빨리 하라는 것인지? 돈궤를 맡았으니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는 말씀인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말씀인지? 다른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28-29) 네 할 일을 속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두 가지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주님의 ‘포기 선언’입니다.  “이제 회개할 기회는 다 지났다. 나는 너를 포기한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제자로 부르시던 날부터 이때까지 주님은 유다를 향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빛이니 빛이 있을 동안에 믿어야한다! (12:36) 너희가 깨끗하나 다 깨끗하지는 않다!(10) 네 발을 씻어 줄 테니 그 전에 목욕을 해야 된다.(8,10)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그런데도 유다는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최후 선언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떠나야만 한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돌이키려는 노력도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이제 네 갈 길로 가거라.”
  
우리는 때때로 죄를 지으면서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겠느냐? 하나님이 아무리 높으신들 무슨 지식이 있겠느냐?”(시73:11)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혹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다고 쉽사리 선언해버립니다.(시14:1) 

여러분! 하나님이 무기력하셔서, 혹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못된 짓들을 놔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고 견디면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그러나 때가 차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왜 배우십니까?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철저하신 심판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배워야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로마의 심판. 가까이는 인간 理性에 도취되어 마음껏 교만해 있던 20세기 초반의 인간들에게, 수억의 인구가 짐승처럼 어우러져서 무자비하게 죽고 죽이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심판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한 범죄자가 어떻게 처벌 받으며, 한 독재자가 어떻게 사라져 가며, 숨은 죄인들이 어떻게 고통 받는지를 무수히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24:1,16) 아직 우리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입니다. 불현듯 숨을 거둘 때는 이미 늦습니다. 주님이 부지런히 부르시는 때에 돌이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가 지나면 주님도 포기해버리십니다.
  
둘째로, ‘네가 네 일을 해야 나도 내 일을 한다’ 말씀입니다. 이제는 유다에게 매달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시간입니다. 속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대신 져야만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인류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그 십자가를 향해 떠나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묘하게 가룟 유다의 일과 주님의 일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들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이니, 유다가 할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유다가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순간이 다가 왔습니다. 기구한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돌이키려 했는데 결국 너는 악의 도구가 되는구나! 이제 너 할 일을 속히 하라.” 12제자가 같이 부름 받고, 같이 먹고 자고, 같은 교훈을 받았건만, 11제자가 선한 도구로 구원을 이루는 순간에, 유다는 악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번한 인생, 가룟 유다!
  
똑같은 햇빛이 얼음은 녹게 하고 진흙은 굳게 합니다. 햇빛은 같으나 받는 자의 마음이 문젭니다. 주님의 교훈은 같았는데 가룟 유다와 11제자의 마음이 달랐어요. 11제자가 주님께 마음을 열었다면 유다는 끝까지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의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결코 스승의 뜻을 따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믿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 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지 않으면 심판아래 있는 자다. 그래도 그는 결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제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겨 주실 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발을 내밀고, 속으로는 스승을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발의 먼지만 씻고 마음의 죄를 씻지 않는 위선자! 그 마음의 차이 때문에 유다는 악의 도구가 되고,11제자는 의의 도구가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두 가지 용도로 하나님께 사용됩니다. 의의 도구 아니면 악의 도구! 그것은 오직 마음에 달렸습니다. 마음을 바로 하세요. 의의 도구로 하나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되시기 바랍니다.


유다가 곧 나가니 밤이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 가룟 유다는 어둠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는 실로 어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12:5-6) 사람들 앞에서 자선가인척 하면서 이기심을 감춘 위선자요, 내세를 믿지 못한 현세 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남의 의견을 듣지 못하는 마음의 불구자요, 자기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양심의 파산자였습니다. 어둠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3:18-21) 유다의 마음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다 속으로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27) 사탄이 유다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탄을 환영했습니다.
  
유다가 어둠 속으로 달려간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에는 예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도 빛을 배척했습니다. 예수 없는 세계는 암흑이며, 그 결국은 죽음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등지고 나간 지 얼마 안돼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습니다.(마27:3,행1:18) 실로 그는 예수 없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오늘 가룟 유다가 누굽니까? 예수 없는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속죄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해 줘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뒤틀리고 비뚤어진 채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남의 진실한 사랑을 무감각하게 받아 넘겼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도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친절과 호의를 받을수록 강퍅해졌습니다. 우리는 가끔 전과자들이 왜 교도소 안에서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나빠져서 나오느냐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곳은 어둡습니다. 예수 없는 마음, 예수 없는 가정,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사회. 그 모든 곳이 암흑입니다. 오늘날 세상 어둠은 점점 더해갑니다. 빛이 와서 전해도 듣지 않고 받지 않는 세상!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0-24)

예수 믿으세요!  곁에 계신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는 나의 생명, 예수는 나의 빛!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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